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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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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해)의 해석과 渡海(도해)의 대한 해석에 도움될 중국 내부의 기록 >
우리는 '해'는 '바다'로 '도해'는 '바다를
건너간다'라고 풀이하여 삼국시대의 동이각국의 위치에 대하여 연구를 하는데 매우 민감한 것이 해와
도해이다.
그런데 중국역대 기록에서 동이전에 기록된 외에 장안중심 국가의 '내부 기록'에서 '도해'를
사용하였음을 찾아 볼수 있다.
우리식으로 풀이하면 중국의 해변에서 한반도나 일본이나 필리핀 등으로 다닐 때만 가능한 기록일 것이다.
여기서 도해는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므로 '해'자 해석에 참고가 될것으로 보여서 소개하고자 한다
< 중국정사에서의 渡海(도해) 기록 >
< 本紀 史記卷六 本紀第六 p-0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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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七年十一月,行至雲夢,望祀虞舜於九疑山 浮江下,觀籍柯,渡海渚 過丹陽 至錢唐>臨浙江,水波惡,乃西百二十里從狹中渡上會稽,祭大禹,望于南海,而立石刻頌秦德
「九疑山在永州唐興縣東南一百里。皇覽?墓記云舜?在零陵郡營浦縣九疑山
「丹陽郡故在潤州江寧縣東南五里,秦兼?天下,以??郡也。」
錢唐,今杭州縣。
「其流東至會稽山陰而西折,故稱浙。音折。」
「蓋在餘杭也。顧夷曰『餘杭者,秦始皇至會稽經此,立?縣』。」
"구의산은 호남성 남쪽에 있고 단양은 남경 동쪽에 있다"
< 魏書 三國志卷四 魏書四 三少帝紀第四 p-0118 >
夏六月,以遼東東沓縣吏民渡海居齊郡界,以故縱城?新沓縣以居徙民
< 魏書 三國志卷四 魏書四 三少帝紀第四 p-0119 >
正始元年春二月丙戌,以遼東汶?北?縣民流徙渡海,規齊郡之西安?臨??昌國縣界?新汶?南?縣,以居流民。
< 魏書 三國志卷二十六 魏書二十六 滿田牽郭傳第二十六
p-0728 >
太和末,公孫淵以遼東叛,帝欲征之而難其人,中領軍楊??豫應選,乃使豫以本官督?州諸軍,假節,往討之。會吳賊遣使與淵相結,帝以賊?多,又以渡海,詔豫使罷軍。豫度賊船垂還,歲?風急,必畏漂浪,東隨無岸,當赴成山。成山無藏船之處,輒便循海,案行地勢,及諸山島,?截險要,列兵屯守。自入成山,登漢武之觀。賊還,果遇惡風,船皆觸山沈沒,波蕩著岸,無所蒙竄,盡虜其?
< 列傳 晉書卷一百六 載記第六 p-2768 >
季龍謀伐昌黎,遣渡遼曹伏將?州之?渡海,戍?頓城,無水而還,因戍于海島,運穀三百萬斛以給之。又以船三百?運穀三十萬斛詣高句麗,使典農中?將王典率?萬餘屯田于海濱。又令?州造船千?。使石宣率步騎二萬擊朔方鮮卑斛摩頭破之,斬首四萬餘級。
< 列傳 南齊書卷五十一 列傳第三十二 p-0882 >
建武二年,欣泰移虜廣陵侯曰:「聞攻鍾離,是子之深策,可無謬哉!兵法云『城有所不攻,地有所不爭』。豈不聞之乎?我國家舟?百萬,覆江橫海,所以案甲于今不至,欲以邊城疲魏士卒。我且千里運糧,行留俱弊,一時霖雨,川谷涌溢,然後乘帆渡海,百萬齊進,子復奚以御之?乃令魏主以萬乘之重,攻此小城,是何謂歟?攻而不拔,誰之恥邪?假令能拔,子守之,我將連舟千里,??相屬,西過壽陽,東接滄海,仗不再請,糧不更取,士卒偃臥,起而接戰,乃魚鱉不通,飛鳥斷?,偏師淮左,其不能守,?可知矣
< 列傳 梁書卷五十四 列傳第四十八 p-0809 >
慧深又云:「扶桑東千餘里有女國,容貌端正,色甚潔白,身體有毛,髮長委地。至二、三月,競入水則任娠,六七月?子。女人胸前無乳,項後生毛,根白,毛中有汁,以乳子,一百日能行,三四年則成人矣。見人驚避,偏畏丈夫。食鹹草如禽獸。鹹草葉似邪蒿,而氣香味鹹。」天監六年,有晉安人渡海,?風所飄至一島,登岸,有人居止。女則如中國,而言語不可曉;男則人身而狗頭,其聲如吠。其食有小豆。其衣如布。築土?牆,其形圓,其戶如竇云。
< 列傳 魏書卷一百二 列傳第九十 p-2275 >
大秦國,一名黎軒,都安都城。從條支西渡海曲一萬里,去代三萬九千四百里。其海傍出,猶勃海也,而東西與勃海相望,蓋自然之理。地方六千里,居兩海之間。其地平正,人居星布。其王都城分?五城,各方五里,周六十里。王居中城。城置八臣以主四方,而王城亦置八臣,分主四城
< 列傳 北史卷七十六 列傳第六十四 p-2592 >
十一年,又率師渡海,<08>破高麗奢卑等二城。高麗?國來戰,護兒大破之。將趣平壤,高元震懼,使執叛臣斛斯政詣遼東城下請降。帝許之,詔護兒旋軍
< 列傳 舊唐書卷五十九 列傳第九 p-2326 >
會煬帝?化及所?,鴻?卿?長?以鬱林、始安之地附於蕭銑,馮?以蒼梧、高?、珠崖、番?之地附于林士弘,各遣人召之,和初未知隋亡,皆不就。林邑之西諸國,?遣遺和明珠、文犀、金寶之物,富?王者。銑利之,遣長?率百越之?渡海侵和,和遣高士廉率交、愛首領擊之,長?退走,境內獲全,郡中樹碑頌德。會舊驍果從江都還者,審知隋滅,遂以州從銑。
< 列傳 舊唐書卷六十九 列傳第十九 p-2515 >
十四年,入?工部?書。明年,遷太子詹事,出?洛州都督。及侯君集誅,以亮先奏其將反,優詔褒美,遷刑部?書,參預朝政。太宗將伐高麗,亮頻諫不納,因自請行。以亮?滄海道行軍大總管,管率舟師。自東萊渡海,襲沙卑城,破之,?男女數千口。進兵頓於建安城下,營壘未固
< 列傳 舊唐書卷八十四 列傳第三十四 p-2792 >
。從顯慶五年以後,征役身死,更不借問。往前渡遼海者,?得一轉勳官;從顯慶五年以後,頻經渡海,不被記錄。州縣發遣兵募,人身少壯,家有錢財,參逐官府者,東西藏避,??得脫。無錢參逐者,雖是老弱,推背?來。
< 列傳 舊唐書卷八十六 列傳第三十六 p-2829 >
時有?,征邊遼軍人逃亡限內不首及更有逃亡者,身?處斬,家口沒官。太子上表諫曰:「竊聞所司以背軍之人,身久不出,家口皆擬沒官。亦有限外出首,未經斷罪,諸州囚禁,人數至多。或臨時遇病,不及軍伍,緣?怖懼,遂?逃亡;或因樵採,被賊抄掠;或渡海來去,漂沒滄波;或深入賊庭,有被傷殺。軍法嚴重,皆須相?。若不給?,及不因戰亡,?同隊之人,兼合有罪。遂有無故死失,多注?逃。軍旅之中,不暇勘當,直據隊司通狀,將作?逃,家口令總沒官<04>,論情實可哀愍。書曰:『與其殺不辜,寧失不經。』伏願逃亡之家,免其配沒。」制從之。
< 志 舊唐書卷四十一 志第二十一 p-1761 >
崖州下 隋珠崖郡 舍城 州所治。隋舊縣。其崖、?、振、瓊、萬安五州,都在海中洲之上,方千里,四面抵海。北渡海,揚帆一日一夜,至雷州也。
< 志 唐書卷四十三下 志第三十三下 p-1151 >
安南經交趾太平,百餘里至峰州。又經南田,百三十里至恩樓縣,乃水行四十里至忠城州。又二百里至多利州,又三百里至朱貴州,又四百里至丹棠州<13>,皆生?也。又四百五十里至古湧步,水路距安南凡千五百五十里。又百八十里經浮動山、天井山,山上夾道皆天井,間不容?者三十里。二日行,至湯泉州。又五十里至祿索州,又十五里至龍武州,皆?蠻安南境也。又八十三里至?遲頓,又經八平城,八十里至洞?水,又經南亭,百六十里至曲江,劍南地也。又經通海?,百六十里渡海河、利水至絳縣。又八十里至晉寧驛,戎州地也。又八十里至?東城,又八十里至安寧故城,又四百八十里至雲南城<13>,又八十里至白崖城,又七十里至蒙舍城,又八十里至龍尾城,又十里至大和城,又二十五里至羊??城。
< 列傳 宋史卷二百九十六 列傳第五十五 p-9843 >
澈字晏如,徽之宗人也,世家建陽。父思進,晉天福中北渡海,因家於?州之北海,累佐使幕。澈幼聰警,七歲讀春秋左氏傳,?曉大義。周宰相李穀召令默誦,一無遺誤,穀甚異之。年十六,思進??趙從事,會昭慶令缺,使府命澈假其任。時河決?郡,府督役甚急。澈部徒數千,徑大澤中,多蘆葦,令采刈?筏,順流而下。?至,執事者訝以後期,俄而葦筏繼至,駭而問之,澈以狀對,乃更嗟賞。
< 列傳 金史卷一百二 列傳第四十 p-2258 >
初,東平提控鄭倜生擒宋將李資,綱奏賞倜。宰臣謂:「李資自稱宋將,無所憑據,請詳究其實。」綱奏:「臣自按問俱獲宋將統制十餘人,皆以資?將無異辭。此輩力屈就擒,豈肯虛稱?將以重獲者之功?今多故之際,賞功後時,將士且解體。凡行賞必求形跡,過?逗?,甚未可也。」詔?賞之。綱奏:「遼東渡海,必由恩、博二州之間,乞置經略司?撫。」從之
< 列傳 元史卷一百二十九 列傳第十六 p-3159 >
十九年,乞解軍職,乃命其長子同知江西宣慰司事散木뜰?span lang=EN-US>?本軍萬戶。占城之役,?/span>奉旨給其糧餉器械、海艦百?,久留??,冒疾而還。俄有詔命?/span>從皇子?南王征交趾,結筏渡海,奪天長府。交趾遂空其國,航海而遁。?/span>封其宮庭府庫,追襲於海洋,敗之,得船二百?,幾獲其世子。會
< 列傳 元史卷一百四十九 列傳第三十六 p-3524 >
戊午,旭烈兀命侃西渡海,收富浪。侃?以禍福,兀都算灘曰:「吾昨所夢神人,乃將軍也。」?來降。師還,西南至石羅子,敵人來拒,侃直出掠陣,一鼓敗之,換斯干阿答畢算灘降。至賓鐵,侃以奇兵奄擊,大敗之,加葉算灘降
< 列傳 明史卷一百十七 列傳第五 p-3588 >
遼簡王植,太祖第十五子。諭之曰:「自東勝以西至寧夏、河西、察罕腦兒,東勝以東至大同、宣府、開平,又東南至大寧,又東至遼東,抵鴨綠江,北至大漠,又自雁門關外,西抵黃河,渡河至察罕腦兒,又東至紫荊關,又東至居庸關及古北口,又東至山海衛,凡軍民屯種地,毋縱畜牧。其荒曠地及山場,聽諸王駙馬牧放樵採,東西往來營駐,因以時練兵防寇。違者論之。」植在邊,習軍旅,屢樹軍功。建文中,「靖難」兵起,召植及寧王權還京。植渡海歸朝,改封荊州。
< 列傳 明史卷二百十二 列傳第一百 p-5620 >
郭成,四川?南衛人。隆慶元年冬,擢署都督僉事,?廣東總兵官。渡海追曾一本大獲,進署都督同知。叛將周雲翔等殺參將耿宗元,亡入賊中。屯平山大安?,將寇海?。
< 列傳 明史卷二百六十七 列傳第一百五十五 p-6881 >
若麒劾黃道周以媚嗣昌。歷職方?中,新甲遣赴寧、錦督戰,覆洪承疇等十餘萬軍,獨渡海逃還,論死繫獄。李自成陷都城,出降。
< 列傳 明史卷二百七十五 列傳第一百六十三 p-7042 >
天?二年擢刑科給事中。遼東難民多渡海聚登州,招練副使劉國縉請帑金十萬振之,多所乾沒。學龍三疏發其弊,國縉遂獲譴。王紀?魏忠賢削籍
< 列傳 明史卷二百七十六 列傳第一百六十四 p-7067 >
吳鍾巒,字巒稚,武進人。崇禎七年進士。授長興知縣。以旱?,徵練餉不中額,謫紹興照磨。踰年,移桂林推官。聞京師變,流涕曰:「馬君常必能死節。」已而世奇果死。福王立,遷禮部主事。抵南雄,聞南都失,轉赴福建,痛陳國計。魯王起兵,以鍾巒?禮部?書,往來普陀山中。大?兵至寧波,鍾巒慷慨謂人曰:「昔仲達死?禍,吾以諸生不得死。君常死賊難,吾以遠臣不得從死。今其時矣!」乃急渡海,入昌國衛之孔廟,積薪左?下,抱孔子木主自焚死。仲達者,江陰李應昇,鍾巒弟子,?魏忠賢死黨禍者也。
< 列傳 明史卷三百二十一 列傳第二百九 p-8337 >
安南都會在交州,?唐都護治所。其疆域東距海,西接老?,南渡海?占城,北連廣西之思明、南寧,雲南之臨安、元江。土膏?,氣候熱,穀歲二稔。人性?悍。驩、演二州多文學,交、愛二州多倜?士,較他方?異。
< 列傳 明史卷三百二十三 列傳第二百十一 p-8368 >
二十三年,世子?寧遣人請襲。福建巡撫許孚遠以倭?未息,據先臣鄭曉領封之議,請遣官一員齎?至福建,聽其陪臣面領歸國,或遣習海武臣一人,偕陪臣同往。禮官范謙議如其言,且請待世子表至乃許。二十八年,世子以表至,其陪臣請如祖制遣官。禮官余繼登言:「累朝冊封琉球,伐木造舟,動經數歲。使者蹈風濤之險,小國苦供億之煩。宜一如前議從事。」帝可之,命今後冊封,止遣廉勇武臣一人偕請封陪臣前往,其祭前王,封新王,禮儀一如舊章,仍命俟彼國大臣結狀至乃行。明年秋,貢使以狀至,仍請遣文臣。乃命給事中洪瞻祖、行人王士禎往,且命待海寇息警,乃渡海行事。已而瞻祖以憂去,改命給事中夏子陽,以三十一年二月抵福建。按臣方元?復以海上多事,警報頻仍,會巡撫徐學聚疏請仍遣武臣。子陽、士禎則以屬國言不可爽,使臣義當有終,乞堅成命慰遠人。章俱未報,禮部侍?李廷機言:「宜行領封初旨,?武臣不必遣。」於是御史錢桓、給事中蕭近高交章爭其不可,謂:「此事當在欽命未定之前,不當在冊使?遣之後,宜?所司速成海?,勿?今歲渡海之期。俟竣事復命,然後定??一之規,先之以文告,令其領封海上,永?遵守。」帝納之。三十三年七月,乃命子陽等速渡海竣事。
< 해(海)는
지(地 : 땅)와 바다의 두뜻이 있습니다 >
우리는 바다를 한자로 표기할 때는 해로 표기한다. 그래서 해만 들어가면 '바다'로 해석하려는 습관이 배어있다.
만약 바다로만 해석한다면
동해곡(東海谷)은 동해 바다 골짜기로
풀이할 수 있는데 동해곡은 고구려태조 55년 지명으로 되어 있다.
남해(南海)로 풀이한다면 남쪽바다가 될
것이나 순행을 하였다고 했으니 지명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해가 들어간 지명으로 한국에는 남해, 동해(南海, 東海)가 있으며 중국에도 동해, 상해(上海 : 이상 강소성),
청해(淸海 : 내륙에 있었음), 해서, 해북, 해남
등이 있다.
모두 지명이다.
역사의 기록에서 해의 기록이 미묘한 것이 한(韓)의
동서의 해(海)가 있고 백제(百濟) 기록에서 대해(大海)와 도해(度海)이다.
이것은 바다로 보느냐 땅으로 보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차이를 나타낸다.
백제 말기의 기록중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 발치청래해지병칠천인(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구당서 199上 ------- 발치청래해지병칠천인(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당서 220----------- 발제병칠천(發齊兵七千)
이 기록은 군사를 징벌한 내용을 수록한 것이데 모두 지명이 아니면 군사를 징벌할 수가 없다.
치(淄)와 청(靑)과 래(萊)는 태산(泰山)의
동쪽에 있다. 해(海)는 어디에 있었는가?
태산(泰山)의 남쪽에 해(海)가 있다. 현재는
동해(東海) 또는 해주(海州)라 한다.
분명히 해(海)는 지명이다. 바다로 풀이한다면 용궁군사를 징벌해야 되는데 그 당시 용궁이 있다면 지금도 용궁을 보아야 하니 절대로
이곳에서는 지명이다.
해에 대한 해설을 폭넓게 하기 위하여 청해성(靑海省)의 주위를 살펴보자
북쪽에는 해북(海北)장족자치주가 있고, 서쪽에는 해서(海西)몽고족
장족자치주가 있고, 남쪽에는 해남(海南)장족자치주가 있다.
즉 청해를 중심으로 북쪽은 북해, 서쪽은 서해, 남쪽은
해남을 붙여 이름을 만드는데 해동(海東)은 어디로
갔으며 어디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까 ?
해동은 청해성의 동쪽 어느 곳에서 사람들의 이동과 함께(?) 아니면 역사 기록을
동쪽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표기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는 현재의 대양(大洋)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해가 지명과 지역과 바다를 함께 사용하여 넓다는 뜻을 내포하여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삼해(三海)항목에서
북해, 중해, 남해(北海,中海,南海)를 표현하기를 다음과 같다.
【三海】 在北平新華門外 卽太液池也 南北互四里 其上源自玉泉山合西北諸水至地天安門水門流入匯爲大池 原名西華潭 其上爲瓊華島 池上跨長橋坊楔對峙
東曰玉 西曰金鰲 橋北稱北海 橋南稱 中海 瀛臺以南稱南海
여기서 보듯 북해 남해라 표기하는 것이 큰 바다만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북경
근처의 호수에서도 북해, 중해, 남해를 사용하고 있다.
『삼국지』『후한서』의 동이국 표현에서 "동서이해(東西以海)"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의 백제의 서쪽에 대해가 있었다고 한다.
이 대해를 황해(黃海)로 풀이하느냐 아니면
지명이나 지역으로 보느냐 또는 호수로 보느냐에 따라 백제의 위치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해 동쪽에 백제가 있다고 했는데 한성에 한수(漢水)가 흐르는데 한수(漢水)를
하수(河水)라고 개로왕전에서 밝히고 있으며 낙랑(樂浪)태수 지역의 서쪽에 백제가 건국되었다가 한수(漢水) 이남으로 옮겼다고 한다. 한수(漢水)와
하수(河水)가 황하(黃河)의 옛 이름이다
한수(漢水)의 주위에 석문(石門)과 제성(諸城)등이 있다.
한족들은 백제가 요(遼) 중심의 동쪽에
있다고 송서부터 기록하였으며 남제서, 신구당서, 위서, 양서, 남사 (南帝書, 新 舊唐書, 魏書, 梁書, 南史)에서 백제의 지명을 기록하고 있는데
섭라, 대방, 광양, 광릉, 청하, 낙랑, 조선, 서하, 진평이군, 항성, 백마, 제성, 박성, 대산, 동명, 덕안 (涉羅, 帶方, 廣陽, 廣陵, 淸河, 樂浪, 조선, 西河, 晋平二郡 項城, 白馬, 諸城, 薄城, 大山, 東明, 德安)등의 지명이 있다
이중 섭라, 광양, 청하, 진평이군, 항성, 백마, 제성, 박산, 대산, 동명, 덕안 등의 지명이 중국 요의 동쪽에 있으니 지나족(한부족)의 동이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그 당시 삼국지명이
모두 중국에 있다고 하니 대해(大海)의 풀이가 바다가
아니고 지명으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방의 옛땅에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하니 대해(帶海)의
동음이자, 대해(大海)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백제와 왜의 관계에서 접(接)과 도해(度海)가 동시에 쓰이고 있다.
과연 같이 쓸 수 있을까?
삼국지 권 30 한(韓)에서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으며 동서에
해(海;地?)에 통하고 남쪽에는 왜(倭)와
가깝게 접하고 있다.(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限南與倭接)
후한서(後漢書)85 한(韓)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 있으며 북쪽에 낙랑이 있고 남쪽으로 위와 접하여 있다.
구당서(舊唐書)199상 백제(百濟)
백제는 부여의 일부인데 일찍이 마한(馬韓)의
옛땅에 건국하였는데 장안에서 6천2백리에 있는데 대해(大海)의 북쪽에 있고 소해(小海)의 남쪽에 있으며 동북에 신라가 있고 서쪽으로 도해(度海)하면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 도해(渡海)하면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 도해(渡海)하면 高麗(고리)에 이르다.
(百濟國本亦夫餘之別種嘗爲馬韓故地在京師東六千二百里,處大海之北,小海之南,東北至新羅,西度海至越州南度海至倭國,北度海至高麗)
위의 세 가지에서 알아야 하는 것은 백제와 왜에서 접(接)과 도해(渡海)를
같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접(接)이란 붙어 있다는 뜻이 되고, 도해(渡海)는
바다를 건넌다는 뜻이다. 같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또 해(海), 대해(大海), 소해(小海)의 기록이 있다.
백제의 남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작은 바다가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소해, 대해, 도해, 해를 바다 또는 지(땅)인가를
밝히려면 세부적인 것부터 해독해야 한다.
현재 중화국의 청해성의 청해 주변을 살펴보면 북쪽은 해북, 서쪽은 해서, 남쪽은 해남으로 표기하는데 동쪽에 해동(海東)이 없다.
왜 그럴까 여기에 있을 해동(海東)이
바로 황해 동쪽까지 밀려 버리고 동이의 역사는 숨겨지고 말았다.
그러니 해의 해석은 바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한, 백제, 신라, 월주, 왜(馬韓, 百濟, 新羅, 越州, 倭)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백제와 신라는 요(遼) 중심의 동쪽 즉, 중화국 동부에도 있었고 해동(한국)에도 있었기 때문에 보류를 하였다.
마한의 위치는 어디인가? 옛땅에 백제가 있었기 때문에 밝힐 필요가 있다.
기회(箕准(준:準))은 마한(馬韓)이었다. (기준지왕마한야 : 箕準之王馬韓也, 삼국지30의 38)
위만이 기준(基準)을 몰아내고 스스로
조선왕(朝鮮王)이라 한다.(후한서85) 그 손자 우거에 이르러 예군남여(濊君南閭)가 배반을 하고 한(漢)의 창해군이 되었다.
고구려의 북평, 태원과 왜의 회계, 이주, 단주, 담이의 사이에 창해가 있었으니 지금의 하북성에 창(滄)과 신해(新海)가 있는 지역이다. 창과 신해의 남쪽에 해라는 지명이 있으니
이곳이 기준(基準)이 흘러 들어간 지역으로 보여진다.
그 강의 지명도 준(準)과 비슷한 회(淮)이다.
그러므로 백제는 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월주(越州)는 강수(江水) 이남을
말한다. (사기30, 한서24)
고구려, 백제가가 유연제노(幽燕齊魯)와 오월(吳越)에
있었으니 백제(百濟)의 해(海)는 넓은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오재성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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