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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고조선:기자) 기자(箕子)에 대하여 - 기자는 대사상가 !

2001-02-28 07:25:55


제목

제목: 1-1(고대사:고조선:기자) 기자(箕子)에 대하여 - 기자는 대사상가 !

등 록 자

오재성

날짜

2001-02-28 07:25:55

   

< 기자(箕子)에 대하여 >


우리는 기자에 대해서 광복후 국사에 삽입 또는 삭제를 거듭하고 있는데 이는 기자가 한반도에 왔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하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되고 있다

우리는 기자기 한반도에 왔는가 보다는 기자가 살던 조선땅이 어딘인지를 가려보려고 노력해야한다

기자(箕子)가 살던 서화(西華)까지가 조선의 경계로 파악되어야 삼국시대도 바르게 파악될수 있다

기자는 고조선(古朝鮮)과 주()의 경계에 있던 동이조선(東夷朝鮮)땅 기()에 살던 서여(胥餘)를 이르는 말인데 존칭하여 자()를 붙여 기자(箕子)라고 하고 잇는데 그가 살던 곳과 묻힌곳을 밝혀야 조선(고조선)의 범위를 알 수 있고 삼국의 활동강역을 규명할 수 있다.

1996
년까지 기자를 우리역사에서 삽입 삭제를 반복하는 것은 그가 남북한 지역에 왔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논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으나 사서에서는 중국하남성 "(")에서 살다가 중국안휘성 "몽성"에 묻혀 있다고만 되어 있다.

기자가 활동하던 곳까지 밝히지 못하면 우리민족의 강역을 밝힐 수 없다.
바로 기자가 살던 땅의 이름이 기()인데 변경되어 "서화"가 되었으니 이곳을 찾고 이곳까지 연결되는 우리역사무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지명은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땅에 붙여 준 이름이다.
유명인의 이름을 따기도 하고 자연의 특징을 살펴서 짓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통치를 하는 사람들의 의향에 따라서 바뀌기도 하고 의미를 심어 주기 위해서도 바뀌는 경우가 있다. 남북한 지역에도 그러한 곳이 있으나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서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중에서 바뀐 것이 있다.

『구당서, 당서』에 의하면 고구려시대 고구려 국민에게 기자신(箕子神)이라고까지 존경의 대상이 된 분이 있었으니 기자(箕子)이다.
『사기』에 기자의 묘는 안휘성 몽성(安徽省 蒙城)에 있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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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國蒙縣有箕子塚 - 史記권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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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預曰梁國蒙縣北有薄伐城城內有城湯塚其西有箕子塚 - 수경주 권23

기자가 살았던 땅은 하남성 서화(西華)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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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華故箕地在開封府西九十里初聖師食宋箕故稱箕子今邑中有箕子台 -『大淸一統志』172
그러나 서화(西華)는 처음부터 그 지방의 이름이 아니라 기자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기()라 불렀다고 한다.

언제 어느때 기()라는 명칭이 서화로 왜 바꾸게 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사기』에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까지 살펴보기로 하자.
서화의 옛이름은 기()였는데 개봉부 서쪽 90리 지역에 있다.
서화는 현재 하남성에 있는데 그 이전의 이름이 기()였는데 어떻게 서화로 바뀌었는가 ?

㉠ 기자는 조선땅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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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史記 권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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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道衰箕子去之朝鮮(漢書권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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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王封箕子於朝鮮(後漢書 권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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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旣適朝鮮(三國志 권30)

㉡ 기자가 살던 땅은 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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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者箕國名也子爵也紂親戚也箕子名胥餘,梁國蒙縣有箕子塚(史記권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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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預曰梁國蒙縣北有薄伐城城內有城湯塚其西有箕子塚(수경주 권23)

㉢ 기()는 조선 땅이다.

()라는 지명을 존재시킬 때 후인들이 조선땅이 시각적으로 노출이 되는 것이 중화민에게는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를 서화(西華)로 바꾸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변경시켰을까?

기자의 본명은 서여(胥餘)이었는데 기() 땅에 살았던 대사상가(大思想家)이기 때문에 기자(箕子)라고 불렀다고 보여지는데 살던 땅 명칭이 변경되어 있다.

지나족(支那族, 한부족 漢部族)으로 역사를 정립하기 시작한 것은 장안을 중심으로 국가를 세웠던 한()이었다.
한은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던 주, (,)에 이어 한()이 되었기 때문에 장안 중심의 역사를 정립할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사서를 편찬하게 되었다.

한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당()은 한()이 분리된 역사를 기록한 이후 당에 이르는 국가를 포함하여 장안 중심의 지나족역사를 재정립했다.

장안 중심의 역사가 정립되면서 遼東(요의 동쪽)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 또는 북이(北夷)로 기록하다가 동이(東夷)로 통일하여 부르게 되었다.

기자(箕子)가 살았던 기()땅이 동이(東夷)의 조선 땅이었는데 기() 남쪽 항성(項城)이 사로신라와 당()의 경계였다.

당이 장안을 중심으로 존재하면서 아시아에서 중부국가라는 개념이 중국으로 자연스럽게 사용이 되었다.

장안중심의 한나라 때부터 지나족(한부족)으로 불렀는데 당이 망하고 중부국가와 요()의 동쪽 동이국 사로신라도 망하고 송이 건국한 이후 송()에 의해서 중부국가 개념과 구리(九黎) 후예의 동이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만든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후 북경중심(北京中心)이 되고 중화사상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중화는는 한과 당이동이(東夷)에서 분리(分離)를 선언했던 장안 중심의 지나족(한족)과 요의 동쪽 동이일부(東夷一部)를 중화(中化)한다는 중화사상(中化思想)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여진다.

중화사상이 정립되면서 동이(東夷)의 숭배를 받고 있는 서여(胥餘), 바로 그 기자(箕子)가 살았던 기()의 지명을 변경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에 살던 기자의 이름 서여(胥餘)에서 여()자를 빼고 중화사상(中華思想)에서 화()자를 빼내어 서여(胥華)를 만들고 동음이자화(同音異字化)에 의하여 서화(西華)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大淸一統志』에 "西華故箕地"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밝힐 수 있는 것이다.

황해 서쪽에서 송()은 동이일부(東夷一部)를 병합하고 그 지명마저도 중화사상에 의해서 변경시킨 사례인 것이다.

()땅이 서화(西華)로 변경하여 지나족(한부족)과 동이의 중화(中華)를 꾀하고 동이(東夷)의 영역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지나족들이 기술한 사서가 존재하고 우리의 기록이 존재하는 한 요()의 동쪽인 하남성, 서화, 항성(河南省 西華 項城)의 동쪽은 구리(九黎)시대부터 구세기(九世紀)까지 동이(東夷)의 영역이었다.

<
오재성 >

< 지도 : 서화, 항성, 몽성 - 지명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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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퓨쳐 / coo2.net 송준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