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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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백제 사로가 요중심 동쪽과 한반도 두곳에 있다는 것에 대한 판단 ? >
반갑습니다
새로운 해석을 접하기 위하여 전체적인 조명이 필요합니다
요중심 동쪽에 고구려 백제 사로가 있다는 것과 한반도에 있다는 것에 판단 ?
우리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백제가 요서 산동
강소성 등지로 진출했다고 하고 신라인이 진출한 신라방이 있다고 가르치는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으나 진출신라방이 아니고 진출백제지가
아닌 그 땅에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반도역사가 공백에 될 것이라는 우려하고 있으나 한반도는 최씨의 낙랑국 다음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다음 백제
침입으로 신라가 독립 만주까지 통치하고 다음 고려에 계승되었다고 비공통부분과 유적으로 밝혀지고 있으니 결코 한반도역사가 공백이 되는 것이
아니며 사서에 의한 역사는 밝혀질 수밖에 없다.
"고구려 백제가 전성시대에 강병백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 (가운대는 필자 최치원의 신라위치?) 북으로
유연제노를 침범하여 중국(황제가 있는곳)의 큰 좀이
되었다"는 역사 기록을 입증할 지역은 현역사상 신라방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지역일까 아니면
한반도였을까 하는 것은 여러분의 판단에 달려있다
삼국사기와 중국25사 그리고 유적을 통하여 중국 요중심의 동쪽과 한반도 중 어느
쪽이 사서와 일치하는가 여러분의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
㉠ (유적)
중국25사에서
동이인 유적의 연속성지역은 산서성 요 동쪽에 있으나 한반도는 연속성이 결여되어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역사의 연속성은 어디로 보아야 하나 ?
치우 塚, 소호능, 기자 塚, 의자왕묘, 부여융묘비, 흑지상지묘비.
㉡ (지명)
중국25사
동이 지명이 산서성 요의 동쪽에는 있으나 한반도에는 없다.
< 25사 >
- 치우때 동평, 기자때 서화 몽성, 김유신때
지명인 태산 동명 침구 백강 주류성 항성 , 장보고때 지명인 서주 무령,
< 삼국사기 >
- 소호 고신 기자의 땅, 의자왕 김유신때 평원 황산 동명 태산 백마하 항성 침구
주류자 서성 동성 잠산 독산 덕안, 장보고 최치원때 지명 서주 무령 사 연수 진해 태산
모본왕때 북평 태원, 보장왕때 은산 고대인성 신성 용도 등이 있다
신라방 지역에는 지명이 있으나 한반도에는 없으니 삼국이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하나 ?
㉢ (조공일정)
장안 또는 낙양에서 삼국 수도까지 같은 달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은 연경 및 북경에서 한성까지는 2개월 이상 소요되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장안 또는 낙양 정부까지 같은 달로 기록되었다면 삼국수도가 요중심 동쪽으로 보아야하나 아니면 한반도로 보아야 하는가 ?
㉣ (조공품목)
조공을 하였는데 조공품의 생산지가 요의 동쪽에
있다.
나전칠기의 섭라(흡), 자석과 침생산지
자, 고려이전 면생산지, 노(弩)의 생산지, 기자때부터
시작한 양잠의 생산지, 우황의 생산지는 요중심의 동쪽이었을까 아니면 한반도였을까 ?
㉤ (인구)
조선시대 인구로서는 비교할 수 없는 삼국인구가
있었다.
조선초기 인구가 약50만인데
백제인구는 76만호에 약620만명,
고구려인구가 69만호,
신라수도178,936호라고 하였다.
현재역사상 백제수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기.충청.전라도의 호수가 백제가 패망한지 700여년이 경과된
이후 근세조선 초기에 6만호를 초과하지 못하고 있다.
신라 수도 호수는 17만8936호라고
하였는데 신라가 패망한지 480여년이 지난 후에도 신라수도 호수에도 못 미치는 경상도 호수(戶數) 약5만호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 589년 진평11년에 나라 서쪽 홍수로
30,360호가 표몰된 기록도 있는데 이 또한 조선 경상도 인구의 75%에 가까우니
이해하기가 어렵다)
조선초기와 같은 명나라 초기에 백제지명인 평원 황산 동명 주류자 침구 항성이 있는 동쪽 산동성인구가 77만호였다니 백제인구나 신라인구에 가까운 곳은 신라방 지역인가 한반도인가 ?

㉥ (명절)
9.9일.
8.15일은 당나라와 일본에는 없는 신라고유명절이라고 하였다.
현역사상 당나라가 있던 중국이나 한국 모두 8.15 명절이 있으나 9.9은 중국에서만 있다.
두 명절을 지냈던 지역이 신라방지역일까 아니면 한반도였을까
?
㉦ (기상)
신라의 5월
이전 홍수 기록이 많다.
한국땅에는 6월 이후가 홍수시기이다.
홍수 기록을 할수 있는 지역이 신라방 지역인가 아니면 한반도인가 ?
㉧ (유행병)
11월에서
2월사이의 신라 수도에서 유행병이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로 보면 겨울인데 유행병을 기록할 지역이 신라방지역인가 아니면 한반도였을까 ?
㉨ (일식관측지)
7세기 이전 삼국의 일식관측지는 중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인도 한반도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하면서 중국 기록을 차용하였다고 비판하여 왔으나 낮에 금성을 관측한 독자적인 기록이
있으니 차용일수는 없다.
한국논문은 독자기록 중국에 집중관측지가 있다(누가해도 같은 결과일 수밖에 없다)
일식기록할수 있는 지역이 신라방지역인가 한반도 기록으로 차용했을까 ?

㉩ (위치배열도)
삼국지 후한서 동이위치배열도에 지명삽입후
고지도에 도입하면 중국에 일치하고 있다.
현지도에는 신 구당서 등 동이지명이 더 많다.
『당서(唐書)』동이(東夷) 배열도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동이(東夷)

중국25사
동이전과 삼국사기에 나타난 지명을 동이전 배열도에 삽입하고 고지도인 우적도와 현 아시아지도에 대입하면 신라방지역에는 일치하나 한반도에는
일치되지 않는데 동이전이 일치되는 중국 요중심의 동쪽 역사로 보아야 하나 한반도역사로 보아야하나 ?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고 해도 한반도역사가 공백이 될수도 없는데 한반도에서 진출했다면 인정하고 그곳에 삼국이 있었다면 부정적으로
보아서야 어찌 사서에 의한 역사연구라고 할 수가 있을까?
위의 여러사실을 한반도에 일치하지 않으므로 버려야 한다면 중국25사나 삼국사기에서
남아서 취할수 있는 것은 몇%나 될까??
우리가 부정하고 취사선택한다고 언제까지 숨길수 있을가 심히 우려되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왔다.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인 것이다
더욱 바르게 역사를 연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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