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2.net - 송준희 칼럼 모음 (2001-2002)

우리 역사책 부정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

2001-03-14 08:57:44


제목

제목: 우리 역사책 부정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

등 록 자

오재성

날짜

2001-03-14 08:57:44

   

반갑습니다

우리역사에 대하여 걱정하시는 모든분들의 걱정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역사책을 부정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

『삼국사기』를 부정하면 아사아 전체 역사기록을 부정하는 것이다. 왜야하면 『삼국사기』 내용은 『삼국유사』와 『25사』동이전 내용을 모두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東夷 후예로써 현재까지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유일하게 반도에서 편찬한 것이다. 그럼에도 『삼국사기』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삼국사기』는 九黎의 苗시대 지나고,조선의 기자 시대를 지나서, 해모수 및 주몽의 高句麗, 혁거세의 신라, 온조의 百濟, 최리의 낙랑국, 비미호의 倭시대가 있었고, 광개토대왕 다물(통일)시대가 있었고, 문자왕의 高句麗, 문주왕의 百濟, 지증왕의 동신라, 모태왕의 서신라, 670이전의 倭로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나 중국『25사』 기록들을 모두 수용하고 있음에도 이를 부정하고 취사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 아닐수 없다

즉 중국『25사』 기록에서는 九黎(구리) 시대를 지나고 고조선의 단군 기자시대를 거쳐 위만의 조선과 다국시대인 주몽 이전과, 高句麗, 伯濟國 駟盧國 卑彌國 狗盧國 시대를 시대를 다시 거치고 高句麗 百濟 양국 시대를 지나 高句麗, 의자왕의 百濟, 모태왕의 신라, 및 무의 倭 시대를 지나 법민왕의 신라, 대조영의 발해, 해주 동쪽의 신라로 이어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있으나 『25사』에 없는 것은 낙랑국과 동신라 관계 뿐이다.(동신라는 高麗동쪽과 해주 동쪽이라는 기록뿐)
김유신과 계백 장고보를 반도인으로 만들면 중국『25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광개토대왕 진흥왕碑 모두를 부정해야 한다

김유신의 선조 헌원은 중화인인민공화국 국조로 모셔지고 있으며 소호 금천씨는 강수 즉 양자강의 청양 즉 동성 잠산 덕안 독산의 동쪽에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청양이 있는 지역에 위와 같이 김유신시대 지명이있다.

기자가 살던 고조선을 계승한 신라에 김유신이 있었다.(삼국유사, 삼국사기 25) 기자가 살던 서화와 기자묘가 있는 몽성의 남북에 김유신시대 지명이 지금도 있다.

김유신시대 신라에서 만들어 타국에 보낸 錦(비단), 자석과 침(羅針盤), 綿(목화),弩(쇠뇌)의 생산지는 서화 항성의 동쪽이었음에도 김유신이 반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중국『25사』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완전히 부정하고 반도인만을 민족으로 만들기 이전에는 사서에 의한 김유신은 반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이며 기록을 부정하고 반도인으로 만들 수도 없는 것이다.

계백을 반도의 부여지역인으로 만들고 있으나 부여에서 출토된 碑에는 柰祗城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자가 실던 서화 항성 동쪽이며 묘가 있는 몽성의 북쪽에는 계백의 황산, 홍수의 평원, 의자왕 백마강, 흑치상지의 주류성등이 있음에도 계속하며 계백이 반도인이라 할 수있는가 ? 반도에 맞추어 논 현재의 지명으로 김유신 계백이 반도인이라면 모든 사서는 거짓이어야 하는 것이다

근세조선강역을 설정하고 사서를 부정하려고 한다.
『삼국사기』 『25사』동이전등 기본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서를 부정하는 버릇이 들어 있다 .이유는 내용이 근세조선 강역에서는 이루어 질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강역을 반도로 한정하지 않고 사서를 정리하고 정리된 상태에서 강역을 찾아보면 사서를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 조선강역을 먼저 우리민족 강역으로 설정하고 사서를 맞추고 있으니 반도에 일치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부정하게 된 것이다.

史書를 부정하고 수정하며 취사선택하고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역사 기록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반복하여 수정 출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그대로 복사해서 전하여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게 수정하여 편찬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보는 것이 최초의 출판물이 아니라는 점이 사서를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다. 또한 기록내용도 시대에 따라 그 시대에 맞게 수정함으로 본래의 뜻과는 상당한 차이를 둘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체험 할 수 없는 우리는 남아있는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재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기록자체를 또 현대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있는 사서를 연구하고자 하는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기록들을 종합하여 검토하면서 정리해야지 현재의 시각으로 사서를 부정하고 취사선택하여서 어찌 당시의 역사를 복원 할 수 있겠는가

연구할 때 歷史 국가와 위치에 대한 前提條件에서 탈피해야 된다.
우리歷史를 연구함에 있어 高句麗 百濟 신라 가라가 제4조선(근세조선) 彊域 즉 남북한에 있고 신라시대 倭가 현 일본열도에 있었다는 전제조건에서 연구되어서는 안된다. 먼저 조건을 두면 그 조건에 맞추기 위하여 본래 사서를 부정하는 결론을 유도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전제조건을 두지 말자는 것이다.

현재와 삼국 또는 朝鮮(고조선)이 같은 彊域에 있었다고 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지명과 삼국의 위치에 대한 전제조건에 구애받지 말고 다시 정리하여 보자는 것이다.



삼국 彊域을 남북한 및 만주로 한정시키고 사서를 맞추려 않고 사서를 정리하고 彊域을 찾아보았다.

현재 우리는 오랜 역사속에서 남겨진 記錄들을 보면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옳지않다고 역사속에서 얻어진 경험에 의한 價値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있어도 그 기록이 '僞書다' '아니다'라고 평가를 할수 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설사 그 기록 시대를 살았다고 하여도 價値 기준이 달라서 다르게 기록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같지 않게 보는 시각의 차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虛僞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1995
년 현재까지의 역사 연구는 高麗 이후 남북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을 우리 民族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은 상태에서 본 사관으로 정리하여 왔다고 할 것이다.

즉 ㉠ 百濟 신라 가라가 한강 이남에 있었고 高句麗 발해가 만주까지 차지했었다는 것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 만주가 高句麗 발해 땅이었다고 하면서도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女眞族, 만주족 등으로 부르고 압록강, 두만강 이남인을 조선족 즉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상식적이고 正常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 황해 서쪽은 漢族 강역이고 신라 百濟가 남북한에서 황해 서쪽으로 진출했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 일제 등 외세의 침략만을 받은 他律성과 남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을 조선족이라는 의식을 심어 준 결과라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우리 민족 삼국이 활동했던 지명이 낙양 동쪽 즉 遼중심의 동쪽인 하북성 산동성 안휘성 강소성 복건성 등에 있는데 구체적으로 北平(阜平) 太原 石門 東明 項城 德安 汀洲의 동쪽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알았다면 삼국강역을 남북한으로 확정하고 사서를 연구하지도 않았고 우리 歷史에 대한 평가는 달랐을 것이다. 즉 幽燕齊魯와 吳越에서 高句麗 百濟 사로신라 가라 倭가 있었다는 기록을 재검토하였다면 지금까지와 같은 우리歷史가 전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제시대 이전 제4조선에서 이미 우리는 스스로 歷史와 彊域을 남북한 지역으로 축소하였고 소위 민족사관이라는 近世史觀도 高句麗 渤海 歷史를 우리 歷史라고 하면서 그들의 후예를 조선족과 다른 여진족 만주족 등으로 불러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

삼국의 후예가 하나의 민족이고, 朝鮮의 후예가 하나의 민족이며, 朝鮮 이전 九黎의 후예가 하나의 민족으로 보기 위하여 彊域을 설정하고 史書를 대입하여 연구하지 않고, 史書를 정리하고 삼국 彊域을 찾아서 삼국을 정립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를 정리하여 우리 歷史를 쓰려고 노력하였다.

BC3
세기에서 AD9세기까지 새로운 角度로 연구함에 있어 이 시대를 나타낸 모던 사서를 종합하여 내용이 같은 부분과 다른 부분으로 구분하고 정리된 상태에서 彊域을 찾으면

첫째 사서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둘째 彊域이 현재 남북한과 달라도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歷史를 정리 할 뿐이며 그 史書가 옳고 그렇다고 하면서 취사선택하고 부정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다. 정리된 상태에서 같은 부분의 위치가 어디인가, 다른 부분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밝히고 현재 敎育되고 있는 부분과 무엇이 다른가를 정리하여 보았다.

현재 다른 민족으로 표현되고 있는 조선 이전 九黎 백성인 苗裔가 세운 삼국彊域을 찾아 어디에 살던 모두 우리 民族으로 보고 정리하려고 했다.

현재 우리는 국경을 기준으로 민족을 가르려고 하고 있으며 현 중국은 여러 民族이 모인 다민족 국가로 표현하고 있고, 남북한에서는 남북한에 살고 있던 제4조선의 후예를 단일民族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어떤 민족으로 부른다고 하여도 史書상에서 기록된 기준국가 蚩尤天子시대의 九黎 후예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려고 하였다. 기준을 正史에 기록된 天子時代 즉 환웅시대인 九黎시대의 彊域과 백성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기준과 한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역사가 정립 안됐을 때는 史書에 일치하는 강역을 찾아야지 강역을 정하고 史書를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삼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있었다고 배우고 있으나 삼국을 나타낸 典據가 「삼국사기」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서는 사대주의 및 모화사상에 의하여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보면서 修訂하고 취사선택하였고 「삼국지」동이전도 수정하고 취사선택하는 것은 아직도 삼국역사가 定立이 안되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시대사인 국사와 전통 및 연속성을 기록한 민족사를 定立하지 못하고 현재 국가에 맞게 國史로 하려다보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정인지 등의 『高麗史』, 거칠부의『國史』(干新羅), 고흥의『書記』(百濟), 이문진의『新集』(高句麗), 唐영호징의 『新羅國記』(사로신라: 寧海신라: 王신라)등은 國史이기 때문에 당시 국가 지역이라는 현장에 의해서 쓰여 질 수밖에 없으며 당시 국가강역만을 기록하였으니 위 史書는 민족강역 일부 역사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호태왕碑, 진흥왕碑도 국사의 일부(?))

그 당시 국가 역사인 國史와는 다르게 민족사는 彊域을 먼저 설정하기 어려운 것이며 기준 국가를 설정하고 그 후예는 하나로 하는 것이 민족사이다. 현존하는 『삼국사기』『25史』東夷傳등으로 우리 민족 각 국가의 강역을 찾고 우리 민족 전체 역사 彊域를 정리하는데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민족사가 정립이 안된 상태에서 안정복, 신채호는 彊域을 먼저 제4조선으로 설정하였고, 신채호 시대의 我와 非我를 구별하여 史書를 연구하다 보니 제4조선 강역과 맞지 않는 것이 많이 발견되니 이것은 史書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그는 史書를 수정하고 취사선택하게 되었으니 그 연구결과가 [조선사연구초]이다. 史書가 제4조선 강역에 맞지 않는다고 신채호와 같이 수정을 가하는 것보다는 강역을 설정하지 말고 史書를 구분 정리하고 그 위치를 찾았어야 옳은 우리역사 연구 방법이 아니었을까 ?

시대별 민족사인 『25史』東夷傳이나 『삼국사기』는 국사가 아닌 민족사이니 각 국가의 위치를 현대 지도에 맞추어 設定하는 방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황해 동쪽인 남북한 歷史로 설정하고 남북한 지역에 맞추는 방법이 있을 것이요.

둘째는 史書 原本 편찬 지역에서 맞추는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에는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먼저 남북한 지역에 맞추고 또 하나 東夷傳은 중국 하남성 西華 項城 동.서쪽에 맞추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셋째는 『三國史記』『三國遺事』에서 『東夷傳』과 같은 부분은 東夷傳지역에 맞추고 다른 부분을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는 방법이다.

위와 같이 여러 방법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첫째의 방법은 현대인들이 『삼국사기』『東夷傳』등을 남북한에 맞추고 있는 방법인데 지금까지 歷史에 대한 의문이 많다는 것은 假定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니 硏究의 대상이다.

둘째의 방법은 『東夷傳』이 남북한 지역의 것이라 하여 『東夷傳』을 편찬 지역에 맞추어 硏究된바가 없으니 그 방법이나 가정이 잘못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硏究를 해보아야 한다.

셋째의 방법도 『東夷傳』을 편찬 지역에 맞추고 연구한바 없으니 알 수가 없으니 硏究해 보아야 한다.

첫째의 例로 신채호는 『東夷傳』이나 『삼국사기』를 남북한강역으로만 맞추어 보니 一致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삼국지』와 『삼국사기』를 修訂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방법은 매우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우리역사 연구가들이 자기의 추정 彊域과 일치하지 않으면 사서를 부정하고 修訂하고 취사선택하는 버릇을 심어 주게 되었다.

史書에 의해서 우리 민족사가 정립되지 못하였을 때 강역을 먼저 설정하고 史書를 맞추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먼저 사서를 정리하고 바르게 정립한 이후에 제4조선 국가사관이 아닌 조선을 基準으로 하는 사관에 맞추었다면 보다 새로운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宋本 '우적도'나 『송본지리지장도』를 보았다면 또 다른 結果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 완전히 정립된 이후에는 彊域에 역사 기록을 맞추어도 이상이 없을 것이다.

신채호가 황해 서쪽에 치우天子, 少昊金天씨, 箕子등의 후예들이 세운 百濟, 사로신라(駟盧: 泗盧: 斯盧: 寧海: 王新羅)와 加羅와 倭가 있었다는 것을 사서를 정리할 때 구분하여 알았다면 아니 현 중화국에 신라 百濟가 진출했다고 하지 말고 金天氏 高辛氏의 後裔가 세운 삼국이 있었으며 三國後裔나 『25사』의 기준인 헌원이나 모두 東夷이며 東夷가 우리조상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었다면 역사 연구의 방향은 달라졌을 것이다. 彊域을 설정하고 사서를 否定하면서 수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王이라 부른 新羅와 干이라 부른 新羅가 있었음을 감지했던지 또는 발견했다면 결코 史書를 부정하면서 수정하고 취사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조선 국가사관이 빚은 애석한 일로서 사고의 전환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케 한다.

正史를 基準으로 하고 野史로 살을 붙여 밝혀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해석한 것은 다르게 해석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確認하여 보아야 하며, 正史를 基準으로 하고, 野史로 살을 붙여 우리歷史를 완성해야 한다.

필자의 위치로 돌아가서 생각해 볼 것
모던 기록에서 筆者의 위치로 돌아가서 살펴봄으로서 위치와 진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筆者의 위치는 문장의 내용 중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지명 또는 부족 및 각 국가의 위치를 알게 또는 모르게 表現이 되고 있다. 그래서 위치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연구자는 집필자의 위치에서 史書를 검토하여야 집필자가 본 東夷 여러 나라(高句麗 百濟 사로신라 신라 加羅 倭)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다.

반갑습니다

 


※ (참고) 본 사이트가 송준희님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한퓨쳐 / coo2.net 송준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