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요동, 요서의 마지막입니다
어려운글 읽어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요동요서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만이 ~ ~ (^.^) 아시겠지요
오늘은 왜 "요"가
요동요서의 기점이 되었으며 왜 요동, 요서를 혼돈하고들 있는 지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 왜 遼가 遼東 遼西의 기점이 됐을까 ?
>
① 진장성에서 하수(河水)까지의 중앙의 지점에 있다.
②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서쪽으로 튀어나온
두 지점에 제일 가까운 지명이다.
③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나족(支那族 :漢部族)과 조선족의 격전지이기 때문에 요충지역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
④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옛이름이 서개마대산(西蓋馬大山)이다.
그 명칭을 다 쓸수는 없어서 약칭이 필요했던 것이다.
⑤ 요동요서의 표현은 바로 국경 즉 전역(戰域)의
표시인 것이다.
요동에는 조선족의 국가가 요서에는 지나족(한부족)의
국가가 있어 대치되었으므로 자주 거론이 되었던 것이다.
< 왜 遼東, 遼西가 혼돈되었는가 ? >
요(遼)나라가 907년부터 1124년까지
존재하면서 요동을 기록함에 있어 요동과 9세기 이전 요동기록에서 요동(遼東) 시발점에 대한 혼돈을 촉발 시켰던 것이다.
요나라 상경도 상경임황부(上京道 上京臨潢府)는
한나라때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의 땅에 있었으니
요나라는 요동에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동경부(東京府)는 요하(遼河)의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서 요하(遼河)의 동쪽을 요나라의
동쪽이라하고 요동(遼東)이라 불렀다.
그래서 요동반도라는 지역명칭이 생긴 것이다.
(고구리의 땅일 때는 남옥저의 명칭이었다)
요(遼)나라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요나라
이전의 요동을 찾으려 하지 않고,
요나라 동쪽인 요동으로 9세기 이전 역사에서 요동으로 표현하게 되니 10세기 이후 요동과 혼돈하게 되였고 지금은 遼나라 이전의 요동 요서와 遼나라 이후의 요동을 거듭 혼돈하고
있는 것이다.
혼돈의 시작은 907년 요나라 건국부터 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요동은 산서성 요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였다.
< 산서성 요(遼 : 좌권)를 중심으로 동쪽에 우리역사와 관계가 깊은 지명들 >
< 요(遼:左權)의 동쪽 >
광영(광녕) 독산성 석문 은산 밀운 북평
양향 탁 역 고안 안차 용성 신성 신농 수성 창주 신해 안평 청하 평원 은 황산 대산(대산) 동명 연주 운주 사수 치주 청주 제성 내주 용도(북평:용도) 고대인성( 주구점) 귀덕 서화 항성 몽성 해 풍 우 서 영국 선성 함산 독산 회영
(廣靈(廣 ) 獨山城 石門 銀山 密雲
北平 良鄕 易 固安 安次 容城 新城 新農 遂城 滄州 新海 安平 淸河 平原 恩 黃山 岱山(大山) 東明 州 州 泗水 淄州 靑州 諸城 萊州) 甬道(北平:龍道) 古代人城( 주구점) 歸德 西華 項城 蒙城 海 豊 虞 徐 寧國 宣城 含山
獨山 懷寧 )
< 요의 중심과 서쪽 >
숭산 진성 고평 여성 태원 요 남 운중 안문 대 삭 음산 오대산
특히 안평의 서쪽(서안평)에 찬황이 있다.
(崇山 晉城 高平 黎城 太原 遼 嵐 雲中 雁門 代 朔 陰山 五臺山
특히 안평의 서쪽(西安平)에 贊皇이 있다.)

< 마치면서 >
오재성 선생님의 요동, 요서를 되도록 이면 쉽게 풀어본다는 것이 겨우 지도 몇 개와
한자에 국문 토다는 정도에 불과 하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역시 선생님의 깊은 뜻을 알기에는 제지식이 너무 모자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에 올라오는 모든 내용들이
더 쉽고 한번보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그런 쉬운 역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송준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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