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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 정립 안됐을 때는 史書에 일치하는 강역을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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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정립 안됐을 때는 사서(史書)에 일치하는 강역을 찾아야지
강역을 정하고 사서를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삼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있었다고 배우고 있으나
삼국을 나타낸 전거(典據)가 「삼국사기」인데도
불구하고
그 사서는 사대주의 및 모화사상에 의하여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보면서
수정하고 취사선택하였고 「삼국지」동이전도 수정하고 취사선택하는 것은
아직도 삼국역사가 정립(定立)이 안되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시대사인 국사와 전통 및 연속성을 기록한 민족사를 정립하지 못하고 현재 국가에 맞게 국사(國史)로 하려다보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 정인지 등의 『고려사(高麗史)』,
- 거칠부의『국사(國史)』(간신라 : 干新羅),
- 고흥의『서기(書記)』(백제 : 百濟),
- 이문진의『신집(新集)』(고구려 : 高句麗),
- 당(唐) 영호징의 『신라국기(新羅國記)』(사로신라 : 영해(寧海)신라 : 王신라)등은
국사(國史)이기 때문에 당시 국가 지역이라는
현장에 의해서 쓰여 질 수밖에 없으며
당시 국가강역만을 기록하였으니 위 사서는 민족강역 일부 역사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호태왕비(碑), 진흥왕비(碑)도 국사의 일부(?))
그 당시 국가 역사인 국사와는 다르게 민족사는 강역(彊域)을 먼저 설정하기 어려운 것이며
기준 국가를 설정하고 그 후예는 하나로 하는 것이 민족사이다.
현존하는 『삼국사기』『25史』동이전(東夷傳) 등으로 우리 민족 각 국가의 강역을 찾고
우리 민족 전체 역사 강역를 정리하는데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민족사가 정립이 안된 상태에서 안정복, 신채호는 강역을 먼저 근세조선(제4조선)으로 설정하였고,
신채호 시대의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별하여 사서를 연구하다 보니
제4조선 강역과 맞지 않는 것이 많이 발견되니 이것은 사서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그는 사서를 수정하고 취사선택하게 되었으니 그 연구결과가 [조선사연구초]이다.
사서가 제4조선 강역에 맞지 않는다고 신채호와 같이 수정을 가하는 것보다는 강역을
설정하지 말고 史書를 구분 정리하고 그 위치를 찾았어야 옳은 우리역사 연구 방법이 아니었을까 ?
시대별 민족사인 『25사』동이전이나 『삼국사기』는 국사가 아닌 민족사이니
각 국가의 위치를 현대 지도에 맞추어 설정(設定)하는
방법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황해 동쪽인 남북한 역사로 설정하고
남북한 지역에 맞추는 방법이 있을 것이요.
둘째는 사서 원본(史書 原本) 편찬 지역에서
맞추는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에는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먼저 남북한 지역에 맞추고 또 하나 동이전(東夷傳)은 중국 하남성 서화, 항성(西華
項城) 동.서쪽에 맞추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셋째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동이전』과 같은 부분은 동이전지역에 맞추고 다른 부분을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는 방법이다.
위와 같이 여러 방법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첫째의 방법은 현대인들이 『삼국사기』『동이전(東夷傳)』등을 남북한에 맞추고 있는 방법인데
지금까지 역사에 대한 의문이 많다는 것은 가정(假定)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니 연구(硏究)의 대상이다.
둘째의 방법은 『동이전』이 남북한 지역의 것이라 하여 『동이전』을 편찬 지역에 맞추어 연구(硏究)된바가 없으니 그 방법이나 가정이 잘못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연구를 해보아야 한다.
셋째의 방법도 『동이전』을 편찬 지역에 맞추고 연구한바 없으니 알 수가 없으니 연구해 보아야 한다.
첫째의 예로 신채호는 『동이전』이나 『삼국사기』를 남북한강역으로만 맞추어 보니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삼국지』와
『삼국사기』를 수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방법은 매우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우리역사 연구가들이 자기의 추정 강역(彊域)과
일치하지 않으면 사서를 부정하고 수정하고 취사선택하는 버릇을 심어 주게 되었다.
사서에 의해서 우리 민족사가 정립되지 못하였을 때 강역을 먼저 설정하고
사서를 맞추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먼저 사서를 정리하고 바르게 정립한 이후에 제4조선 국가사관이 아닌 조선을 기준으로
하는 사관에 맞추었다면 보다 새로운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宋本 '우적도'나 『송본지리지장도』를
보았다면 또 다른 결괴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
완전히 정립된 이후에는 강역에 역사 기록을 맞추어도 이상이 없을 것이다.
신채호가 황해 서쪽에 치우천자(天子), 소호금천씨(少昊金天씨), 기자(箕子) 등의 후예들이 세운
맥제(百濟), 사로신라(駟盧: 泗盧: 斯盧: 寧海: 王新羅)와
가라(加羅)와 왜(倭)가 있었다는 것을 사서를 정리할 때 구분하여 알았다면
아니 현 중화국에 신라 맥제(百濟)가
진출했다고 하지 말고 금천씨, 고신씨(金天氏, 高辛氏)의 후예(後裔)가 세운 삼국이 있었으며
삼국후예(三國後裔)나 『25사』의 기준인 헌원이나 모두 동이(東夷)이며 동이가 우리조상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었다면 역사 연구의 방향은 달라졌을 것이다.
강역(彊域)을 설정하고 사서를 부정(否定)하면서 수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왕(王)이라 부른 신라(新羅)와 간(干)이라 부른 신라(新羅)가
있었음을 감지했던지 또는 발견했다면 결코 사서를 부정하면서 수정하고 취사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4조선 국가사관이 빚은 애석한 일로서 사고의 전환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케 한다.
정사(正史)를 기준(基準)으로 뼈대를 세우고 야사(野史)로 살을 붙여 밝힐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해석한 것은 다르게 해석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確認)하여 보아야 하며,
정사(正史)를 기준(基準)으로 하고, 야사(野史)로 살을 붙여 우리역사(歷史)를 완성해야 한다.
필자의 위치로 돌아가서 생각해 볼 것
모든 기록에서 필자(筆者)의 위치로 돌아가서 살펴봄으로서 위치와 진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필자의 위치는 문장의 내용 중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지명 또는 부족 및 각 국가의 위치를 알게 또는 모르게 표현(表現)이 되고 있다.
그래서 위치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연구자는 집필자의 위치에서 사서를 검토하여야 집필자가 본 동이(東夷) 여러 나라(高句麗 百濟 사로신라 신라 加羅 倭)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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