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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국사기」내용이 근세조선 강역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보면서 修訂하며 취사선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그 시대를 나타낸 기록들 즉
高句麗 장성의 서남쪽에서 高句麗는 영양왕 11년 『신집』5권을
만들었으니 요의 동쪽에서 高句麗 장성 서쪽까지 사이에 있었을 것이고
한수(하수)서쪽이고 석문(접대방)의 남쪽에서 百濟는 근초고왕 30년에 『서기(書記)』가
쓰여졌으며,
석문, 동명, 덕안, 항성, 정주 서쪽에 있는 장안 중심 지나족(한부족)의 당 영호징이 『신라국기』를 편찬했으며,
고구려 장성 동쪽에서는 干에서 신라 국왕으로 변경한 뒤 최초로 거칠부가 남북한 강역의 역사인 『國史』를 남겼는데 위 사서와
「25사」동이전 등을 참고하여 1145년에 편찬하였으나
현존본은 1510년대의 복간본이다.
『삼국사기』『25사』동이전등 기본 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서를 부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유는 내용이 근세조선 강역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역을 남북한 지역으로 한정하지 않고 사서를 정리하고 정리된 상태에서 강역을 찾아보면 사서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나 근세조선
강역을 우리 민족 강역으로 먼저 설정하여 놓고 사서를 맞추니 남북한에 일치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부정하게 된 것이다.
歷史를 연구하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역사 기록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歷史 기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반복하여 수정 출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그대로 複寫해서 전하여진 것이 아니라
복간 시대의 국가사관에 맞게 수정하여 편찬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보는 것이 最初의 출판물이 아니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또한 본래 내용도 시대에 따라 그 시대에 맞게 수정함으로 본래의 뜻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우리는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재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삼국 시대 기록을 현대 국가강역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다 보니 근세조선 강역에 합치되지 않으면 부정하게 되고 남북한에 맞추어 수정하고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사서 중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기록들을 종합하여 검토하면서 정리해야지 현재 시각으로 현대에
맞추어 사서를 부정하고 취사선택하여서 어찌 그 당시의 역사를 복원 할 수 있겠는가
1) 『삼국사기』를 왜 부정하는 것일까 ?
「三國史記」를 부정적으로 보고 「삼국유사」를
더 좋게 평가하기도 한다.
「삼국유사」는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하였고 나타낸 원본이 『삼국지』위서 동이전이라고 하였고
그 이전은 환웅 환인이라 표현하였는데 조선 이전은 『사기』에서는 九黎가 있다고 하였으며 『三國史記』『삼국유사』에는 苗裔로 나타내었고
九黎와 苗관계는
「예기」에서 국호(구리) 및 백성(묘민은 구리의 백성)으로 밝혀준다.
삼국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은 기록이 있다.
史書에는 황해 동쪽에서 高麗시대 편찬한 『삼국사기』와 東夷傳을 인용한 『삼국유사』등이 있고,
황해 서쪽에서 9세기 이전 遼의 서쪽인 장안 낙양 중심으로 출판된 正史의 東夷관계
기록이 있다.
신채호의 「삼국사기」 및 「삼국지」비판은 근세조선 강역에 삼국이 있었다고 보는 조선 국가사관이 빚은 결과였을 뿐이다.
사관이 근세조선 국가사관이 아니고 朝鮮(고조선)을
기준으로 하는 민족사관이었다면 『삼국사기』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세조선 이후 삼국시대를 나타낸 『三國史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취사선택하고 있으며
19세기에 들어와 일본열도의 제국주의 학자들이 구체적으로 『三國史記』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는데 근세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였을 시기에는
일본제국의 학자들과 근세조선 국가사관을 가진 조선인들이 노골적으로 『三國史記』를 비판하는 논문들이 등장하였는데 『삼국사기』내용이 남북한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부정적인 視覺으로 보는 논문이었고 그 논문으로 등단한 학자들에 의해서 교육되었으며 光復 후에는 『삼국사기』를
비판한 학자들에 의해서 敎育된 학자들이 그 논문들을 재조명해 볼 여유도 없이 배운 대로 다시 敎育시키며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삼국사기』
내용이 남북한지역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敎育되어 왔다.
남북한 지역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三國史記』연구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三國史記』가 남북한 강역의 역사만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는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삼국의 강역은 『三國史記』에 나타난 그대로 연구되어야지 남북한 지역에 限定하고 일정한 틀에 맞추어 남북한역사로 규정하려
하였기 때문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高麗 이후 삼국시대를 연구하기 위하여 『三國史記』를 연구한 논문이 과연 원본과 일치하는가를 먼저 연구하고 『三國史記』가 나타내고
있는 강역을 바르게 찾은 후에야 삼국시대를 바르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한 이후에야 朝鮮을 기준으로 하던 그 이전 九黎를 기준으로
하던 우리민족사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기록이 많은 삼국시대 정립 없이는 우리역사를 정립할 수가 없을 것이다.
原本에 맞게 정리된 이후에야 비로소 진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중국 遼중심 동쪽으로부터 남북한까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로 기록하고 있다.
즉 북평(부평) 태원 덕안이 있는 유연제노에서
오월까지 高句麗 百濟 新羅 강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김부식이 모송사상을 가졌을지 몰라도 11인이 쓴 『삼국사기』는 위대한 민족사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三國史記』 내용을 입증할 「삼국지」까지 수정하면서 인용하는 상황에 이르러고 있으나『25사』東夷傳도
황해 동쪽을 기록했다고 할 수는 없다.
『三國史記』연구에서는
- 지명의 존재지역,
- 특산물의 생산지역,
- 조공일정,
- 인구의 비교,
- 민속절의 存在지역,
- 계절풍에 의한 홍수시기,
- 바람의 방향,
- 천체의 관측지연구,
- 동식물의 이상현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유물 유적과 종합적인 檢討 하에서 비로소 삼국의 강역을 바르게 하고 삼국과 그 이전 역사를 정립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三國史記』는 과연 믿을 수 없는가 ?
(三國史記를 믿고 근세조선사관이 아닌 민족사관으로
재정리해야 한다)
삼국시대를 나타낸 사서에는 高麗 건국부터 7대실록이 없어져서 다시 쓰여진 후
112년만에 편찬한 『三國史記』와 그후 일연이 쓴『三國遺事』가 있고,
황해 서쪽에서 三國이 존재했던 당시부터 송나라 때까지 쓰여진 『18史』東夷 관계
기록이 있다.
19세기 이전 高麗나 근세조선에서는
황해 서쪽으로 진출한 신라방이 있었다고 기록한 우리 역사책이 없었으며
또한 百濟가 현 遼西 및 山東省 등 황해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근세조선 기록이 없다.
또 그 시대 발간된 역사책에 箕子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은 곳이 없음에도 현재 교과서에는 빠져 있다.
그렇다면 왜 없던 신라방이나 百濟 진출이 기록하게 되었는가
역사 기록에 없던 것을 창조해서 기록하게 되었을까
아니면 해석하지 못했던 것을 바로 해석하여서 교과서에 收錄하게 되었을까 ?
이와 같은 상황 변화는 분명히 역사 기록에 대한 해설상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正史인 『三國史記』가 편찬된 이후 근세조선 강역에 삼국 활동무대를 맞추려 하니 삼국 시대도 정립되지 못하고 전체 역사도
定立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사기』에 대하여 근세조선 시절에는 뚜렷한 이유를 밝히면서 종합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비판하더니 국호를 大韓이라고
한 이후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光復 후에는 신채호와 같은 사관인 근세조선 국가사관의 답습에 의하여 『삼국사기』를 비평하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한국에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근세조선 국가사관으로 보고 批判하였다.
국어사전에도 김부식은 "『三國史記』를 편찬하면서 중국 사서를 인용 특히
삼국 통일의 기사에는 『자치통감』을 그대로 옮긴데가 있고, 사대주의 사상 및 史實의 오류 등이
있어서 후세 史家 중에는 그를 비난하는 이도 있다."고 하였다.
정말로 『三國史記』는 사대사상으로 쓰여진 사서라고 하면서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는데 무엇을 事大하였다는 것인가 ?
批評하는 글을 살펴보고 우리는 세가지면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1) 사대사상(事大思想)이나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쓰여졌다고 비평하는 이유를 살폈다.
(2) 우리의 민족 시조와 기준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3) 『삼국사기』에 나타난 특징들
(1) 「삼국사기」를 事大思想이나 慕華思想으로 쓰여졌다고 비평하면서 부정적으로 본 기록들
① 『삼국사기』가 쓰여진 한 세기 뒤에 이규보(1168-1241)에 의한
"김부식이 國史를 다시 편찬할 때 동명왕의 사적을 매우 간략하게 다루었다. 그는
國史란 세상을 바로잡는 책이기 때문에 大異之事로서 후세에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간략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명왕편 서---
② 고려말조선초의 권근(1352-1409)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진삼국사전에서 " 김부식이 체제(범례)는 사마천의 『史記』의 法을 취했으나,
대의는 간혹 춘추와 다른 점이 있었고,
한 가지 사실이 여기 저기(3국의 각 본기)에
중첩되어 있다.
방언과 이어가 서로 섞어서 선정과 가모는 전한 것이 드물며 나라별로 글을 만들어 참고하기가 어렵다.
--동문선 권44 표전--
③ "김부식이 『삼국사』를 만드는데 사마천의 『史記』를 모방하여 나라별로
?㎞?본기. 열전. 지. 표도 있어 50권이나 된다.
같은 해를 본기에 나누어 한가지 일이 중복되어 방언과 이어를 없애지 못하였고, 범례가
적당치 못하고 책이 크고 번잡하여 보는 사람이 참고하기에 퍽 어려움을 갖는다. -삼국사략서 --동문선권91 서--
④ 윤준(1380-1436)도 그의 의청간행동국사략전에서
" 근래 김부식의 편찬을 본다면 부피가 많고 용장하여 읽으려면 잠이 오고 황당하며 광탄하기 때문에 입에 오르면 불경할뿐이다."
--동문선권41--
⑤ 이극돈(1435-1503)의 『동국통감』서문에도 "우리나라(東方)는
단군 기자 이래 3한에 이르기까지 그 기록이 근거가 없으며,
3국에 이르러서는 근근히 있는 것조차 조략이 심하고 더구나 터무니없는 불경지설을 첨가시켜 후세의 史家에게 이것을 계승 찬술케
하였다."라 하였다.
⑥ 안정복(1712-1791)도 『삼국사기』가 중국 기록의 보충이라는 측면은 인정
할 수 있으나
"그 책이 소략하고 잘못된 곳이 많아 김부식은 사가로서의 규모는 거의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왕명을 받들어 역사를 편찬함에 보다 널리 문적을 두루 살피고 헌서지로를 열어 주었다면 지나치게 간단하여 식자들에게 한은
주지 않았을 것이다."
--순암선생문집 권10 동사문답서--
⑦ 정약용의 경우도 "김부식이 우리나라 고사가 갖는 황탄비리함을 들어 탄식할
뿐" 구체적으로 큰 비난을 하지 않았다.
--『다산전집』권1 시문집(제강역고)--
⑧ 신채호는
㉠ 신채호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소루함이 사료의 부족이 아니라고 지적한 뒤에,
"선학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할 사료가
부족하므로 그의 편찬한 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기실은 역사의 병화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한 것이다." --『조선상고사』-일천년래제일사건--
㉡ "조선의 강토를 바싹 줄이어 대동강 혹은 한강을 국경으로 정하는 한편
사대적 유교적인 입장의 사료를 부연찬탄 개작하고 그의 불합한 사료는 논폄도개 혹은 산제하였다."
--- 『조선상고사』-일천년래제일사건--
㉢ "이종을 초하여 동종을 멸함은 구적을 위하여 형제를 살함과 무이한 자니
차의가 심명하여 비록 삼척동자라고 가히 지득할 바이어늘(중략)
황차동국통일한 공으로 기죄를 엄하려오 (중략) 연칙
김춘추 일생에는 죄만 유하고 공은 무하거늘 (하략) 이종으로
하여금 동족을 멸한 김춘추여, 차등주의를 고취하여 오국을 삭약케 한 역사가여."
--독사신론--
㉣ "한자를 가져다가 이두문을 만들 때 그 초창하던 처음에는 한자의 자음을
취한 것도 있고 혹 자의를 취한 곳도 있다."
--조선상고사 41--
㉤ "김부식은 김춘추 최치원 이래에 모화주의의 결정이니 그 저한 [삼국사기]에 고주몽은 고신씨의 후예라, 김수로는 금천씨의 후예라, 진한은 진인의 동래자라 하며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가지도 같은데가 없는 지나족을 동종으로 보아 말살에 쇠 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벽견을 갈파한 자가
없었다." --조선상고사 48--
㉥ "조선 상고에 글이 있었?募?사람이 있으나 그러나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에 한자를 ?㎱?것은 사실이다.
한자가 하시에 수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토지가 지나와 연접하여 양민족이 기록 이전부터 교통이 있었을 것이며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이 명백하다.
왕검의 子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를 보고 금간옥첩의 문자를 가르쳐 주었은 즉 이 문자가 곧 한자일지니 조선의 한자들 독습함이
기구함을 볼 것이니라.
그 뒤에 한자의 음 혹 의를 빌어 이두문을 만드니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 국서 혹 향서 가명이라 칭하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칭하였다."
--조선상고사 80--
신채호가 인용한 사서도 황해 서쪽 기록이 많다.

⑨ 최남선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 그런대로 체례가 정제하고 문사가 화미하지만 이러한 외관이 도리어 이 책의 단점이요. (중략)
후인과 타인의 안목에 번지르하게 보이게 된 것이 실은 지나사상과 한문적 기습으로서 국고의 원형을 왜뉴하고 개환한 결과이다.
유교적으로 보아 괴란한 것은 말살하기를 꺼리지 않았고 한학상으로 비야한 것은 변개하기를 서슴지 않고 자구의 편을 위해선 신축과
산첨, 취사와 전재를 예사로 하였다."
--최남선의 삼국유사해제--
⑩ 일본열도의 사학자
㉠ "진전좌우길이 여, 제의
본기는 물론 신라본기의 상대부분은 전혀 믿을 수 없는 허구라고 주장"
--진전좌우길의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대하여'
㉡ 말송보화도 역시 " 중국사료의 기계적인 삽입, 유교적 입장제일주의, 고려왕실과 신라왕실과의 관계의 명시"
㉢ 반도충부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66회의 일식기사를 중국 문헌의 전재라고 하면서
" 일식기사는 『삼국사기』의 찬술 당시 나중에 속임수가 폭로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중국의 사서 기록를 그대로 옮겨
수공적으로 첨가하였다."
--『삼국사기』의 일식 기사에 대하여
⑪ 김철준은 김부식의 사관이 고대적 성격과 전통적인 체질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많은 주요 사료들이 김부식의 사관으로 말미암아
소멸된 것인가를 지적한 후,
"전통적인 문화체질과 거리가 먼 모방적이고도 사대적인 유교 사관에 입각할 때 결과는 자기 전통 문화의 빈곤화, 축소화이며 외교관계기사의 풍부함도 사대주의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김철준 논문
⑫ 홍이섭은 『조선과학사』에서
"중국 문헌과 꼭 일치되는 것은 김부식이가 「삼국사기」찬술 시에 후대에 그 허구가 폭로될 줄 모르고 「한서」의 기록을
그대로 가상한 신라년대다 수공적으로 첨가했다고 보겠다.
물론 신라가 독자적으로 관측을 했고 자기네의 역사 기록이 있었으니 만치 관측 기록을 작성했다 하드라도 전설적인 건국 초대 국왕
때부터 이렇게 명료하게 세계 천문학 사상 일즉이 그 진보적인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었던 중국 측의 관측에 사소한 상위도 없이 부합한다는 것은
의심할바다.
신라보다 선진 사회인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아직 그때에는 문화 단계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었다."
고 기록하고 뒤이어 반도논문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참고 여기서 한서는 한나라 역사를 기록한 한서인지 아니면 지나족(한부족) 사서를 의미하는지 분명치 못하다.)
『삼국사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삼국사기』내용이 남북한 지역에 있었던 활동의 기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백제는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까지 지역에 있었다고 하였음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후기 >
이러니 삼국사기 초기기록들을 믿을 리가 만무하지요
한일 합작품 ?
서울대 박교수가 중국것을 베낀게 아니라 독자적인 천체관측 기록이라 밝혀 보아야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데야 ?
참으로 대단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모두 반성해야합니다
"민족혼을 팔아먹는 짓은 매국보다 더한 짓입니다"
< 다음시간에는 "『三國史記』를 부정적으로 보면 믿을 사서가 없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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