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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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십시오
1989년엔가 제가 좋아하였던 문구가 있습니다
"살아알지 못하고 죽어 영혼이 되어도 통곡할 우리의 역사"
지금 그기운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이 방문하시고 질문을 하실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우리의 진실된 역사의식이
발전되고 있음을 가슴벅차게 느끼고 있습니다
내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남의것을 가져다 나의 역사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
제발 있는 것만이라도 소중히 느끼고
비판보다 사료적 분석을 통한 그 가치를 재평가 하여
올바른 우리역사가 정립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3) 『三國史記』를 부정적으로 보면 믿을 사서가 없다.
유연제노와 오월에서 한반도까지 하나로 보는
역사로 나타낸『삼국사기』를 역사연구자들은 남북한 상황과 일치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내용이 기록될 수 있는 지역을
찾아야 할 것이다.
① 『삼국사기』내용에서 『25사』동이전과 같은 공통부분이 있다.
* 고구려 백제 신라 왜는 동이국이고 소호씨
고신씨는 동이인이다.
* 고구려 백제 패망 기록은 같다.
*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 기록이 같다.
* 구리(苗民) - 조선의 기자 위만 - 삼국으로 이어짐이 같다.
* 장보고 최치원의 활동무대가 같다.
* 두 곳에 신라가 있다는 기록이 같다.
『삼국사기』『삼국유사』『25사』동이전에서 고구려 백제의 패망기록이 같고
고구려 신라 백제 초기의 기록이 같고 구리(묘)<九黎(苗)-> 조선의 기자
- 삼국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같다.
구리, 묘, 삼국이 모두 동이국이며 "고신, 소호, 순"이 모두 동이인이니
남북한만을 민족강역으로 본 현재의 근세조선 국가사관이 아닌
『삼국사기』편집자들이 삼국을 보는 사관은 아무른 문제가 없으니 사서를 믿고 정리할 뿐
취사선택의 자료가 되어서는 안된다.
② 공통부분 위치는 유연제노와 오월 즉
요(遼)의 동쪽이며 일부 요의 서쪽도 있다.
『삼국사기』 내용이 남북한만을 나타낸다면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기록들이 있다.
평양 공주 경주를 삼국의 수도라고 말하면서
『삼국사기』 내용을 남북한 지역에 맞추려 하고 있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의 위치를 나타내는 내용은 지명이 있으나
『25사』동이전은 위치 배열과 각 각 지명이 있으니 그 위치를 분명히 할수 있는데
공통부분의 지명이 현 중화국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 49년에 고구려가 한의 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평정하였는데 북평 태원이 중화국에
있다.(고구려본기와 후한서에 있다.)
㉡ 「삼국사기」최치원전에서 "고구려 백제는 강병백만을 보유하고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여 중부 국가에 큰해가 되었다."
이들 명칭은 분명히 남북한에는 없으며 현 중화국에는 있는 지명인데
고구려 백제 땅이라고 기록했다는 자체가 사대주의자라면 용납될 수 없는 부분이다.
③ 유연제노와 오월 사이에는 『삼국사기』및『중국25사』동이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지금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무대를 다시 연구해야 할 것이다.
☞ 지명에 대하여는 수없이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력한다
※ "비"자 클릭 24번 - "우적도
+ 중국군사지도" 비교로 본 동이지명 추적 참고

4) 『삼국사기』를 입증하는 영락열제비 (永樂列帝碑 : 광개토호태왕비)
① 영락열제때 신라 백제 가라 왜는 유연제노와
오월지역에 있었다.
② 남북한은 영락열제이전부터 고구려땅이다 (干과 진흥왕비에서 비리성)
* 역성 임성 대산에서 碑利城(力城 林城 大山에서 碑利城)까지 고구려 통치지역 (고구려연방국?)
5) 삼국 역사를 나타낸 기록에는 『삼국사기』를 능가할 사서는 없다.
① 朝鮮(고조선) 이전이 기록되어 있다.
㉠ 삼국과 고신씨 소호김천씨는 동이로서 같은 동이국과 동이인이다.
㉡ 묘(苗)와 삼국은 苗는 九黎의 백성을
말하고 삼국은 九黎의 후예국가(苗裔)이므로 같다.
㉢ 묘와 구리(九黎)관계는 『예기권55』에
- "묘구리지후", "구리위묘민선조"("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라고 하였으니
九黎는 조선과 하 이전의 동이국 국호이고 삼국은 그 후예이므로 조선 이전을 기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삼국유사』는 최초의 국호를 조선으로 하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조선 이전 九黎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즉 『삼국유사』보다 오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②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중 2인과 묘예(苗裔)를
기록하고 있다.
소호김천씨나 고신씨나 기자 위만을 기록했다고 모화사상가(慕華思想家)로 볼 수는 없다.
현재 남북한에서 살고 한글만을 사용하고 한국인만을 民族으로 본다면 慕華思想家라 할 수 있으나
동이국 고구려 백제 신라를 우리민족 국가로 인정하는 한 동이인인 소호나 고신은 삼국의 조상으로 나타낸 『삼국사기』는 慕華思想家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라 말 할 수는 없다.
더욱이 『중국25사』에서도 동이로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史記에서 支那族(漢部族)은 東夷헌원이
九黎에서 독립하였음을 기록. 舜은 東夷人, 헌원은
舜의 선조, 헌원은 제후의 아들)
소호 김천씨나 고신씨는 지나족(支那族 : 漢部族)의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과 삼국민이 다르다면 분명히 『삼국사기』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있다.
물론 少昊나 高辛을 직접 東夷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舜이 東夷人으로 기록되어 있고 舜의 조상이 高辛과 少昊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少昊, 高辛은 東夷이고,
東夷가 東夷를 자기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모화가 될 수 있는가 ?
김부식이 慕華思想으로 高辛씨나 金天씨를 동족으로 보아 말이 안된다고 한 것은
『중국25史』동이관계 기록에서 고신과 소호와 삼국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았어야 하는데 東夷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근세조선을 기준으로 조선족이라 밝히려 한 때문이다.
또한 모든 기록이 남북한만의 歷史인가를 먼저 살펴보았어야 하는데 근세조선 국가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25史』동이의 위치와 삼국과 두 분이 활동했던 지역이 남북한만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25史} 동이전과의 공통부분이
있는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내용도 결코 남북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후대에 慕華思想으로 본 것은 근세조선 국가사관으로 근세조선 領域에서 우리 역사를 풀려고 하였기에
발생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으로
『삼국사기』는 『25史』동이전과 일치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강역은 幽燕齊魯와 吳越사이에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가라 倭가 있음을 밝히고 있고 남북한 신라만을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모화나 사대사상으로 기록되어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은 남북한만을
민족강역으로 보고 『삼국사기』를 비평했다 할 것이다.
조선족으로 보지 말고 기록대로 공통부분의 東夷族으로 풀었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
다음시간에는
"『삼국사기』가 나타낸 특징들 "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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