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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및 25사동이전 참모습 ⑤ -『삼국사기』가 나타낸 특징들

2001-06-02 23:17:27


제목

제목: 삼국사기 및 25사동이전 참모습 ⑤ -『삼국사기』가 나타낸 특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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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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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02 23:17:27

   

6) 『삼국사기』가 나타낸 특징들


ⓛ『삼국사기』에는 다른 두 신라를 기록한 원전(原典) ()영호징신라국기 및 제왕년대력과 김부식 고려(高麗) 땅의 "국사"의 합본이고 다른 사서도 입증한다.

㉠ 국호 사용 년대에서 두 신라(新羅)
307
"복국호신라(復國號新羅)"라고 했던 신라와 503년 신라(新羅)라고 했던 신라

㉡ 처음부터 왕이라고 했던 신라(『제왕년대력』의 신라 : 최치원 저) 503년 간()에서 왕()으로 변경한 신라(고려인 김부식論)

㉢ 『삼국유사』에서는 자장법사가 신라에 왔을 때 선덕여왕 신라와 정신대왕 신라가 있다고 하였으니 두 신라를 나타냄

㉣ 『구당서』『당서』에서는 고구려 동쪽의 신라(고구려 장성동쪽 : 요사 <遼史>에서 해주 동쪽의 신라)와 백제 동쪽의 신라 (유연제노오월지간 사로신라 : 장보고 최치원 신라) (사로<泗盧> 지역과 해주 동쪽 : 요사)를 입증했다.
*
서화 항성(하남성)에서 경주(경상도)까지 하나의 민족사로 기록한 것이 『삼국사기』이다.

㉤ 낙랑국과 낙랑군을 분명히 기록하다.
*
유연제노와 오월사이에 있던 동이전과 일치되는 예()의 서쪽 낙랑군
*
예의 북쪽 고구려와 옥저(沃沮) 동쪽에 있던 낙랑국(樂浪國) (王 최리, 선조에 최숭)

㉥ 대방의 위치를 분명히 하였다.
김유신 전과 개로왕 전과 『25사』와 일치되는 대방은 산서성 요()의 동쪽에 있는 석문 근처로 되어 있다.


7) 삼국의 수도인 국내성 평양 한성 웅진 금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으므로 사서와 일치되는 首都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평안도 평양은 324월 고구려의 낙랑국 병합 이후 고구려 별도 한성으로 503년까지 고구려직할지로 보여지고(420년 이후 支那族(漢部族) 국가의 연호(年號) 유물이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
高句麗 수도 평양은 용도 신성 고대인성 가까이에 있었다.

② 서울 석촌동 고분은 만주 高句麗 고분과 비슷하다.
서울을 백제의 한성이라고 하지만 사서와 일치하는 백제 수도 한성은 하수 숭산 대방 아차성 사성 및 하수의 제방이 있는 가까이 있었다.

③ 공주의 백제 사마왕 능이 있으나 익산 미륵사를 창건한 과부의 아들이며 자칭왕인 무강왕 백제로 미루어 왕이라 칭한 百濟의 총독부가 아닐까 (『일본서기』에는 태어나고 왕자로 있을 때도 즉위할 때도 사망할 때도 武寧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시호는 죽은 이후에 )
백제 웅진은 평원 황산 대산 동명 백강 주류성 항성 동성 잠산 덕안(德安)이 있는 곳에 있었다.

④ 경상도 경주는 5세기 이전 간()의 무덤과 503년 이후의 왕()능이 같이 존재하는 지역
(
, , 汗은 고구려 지방지도자(地方指導者)로 기록하고 있다.)
*
금성은 8리의 성이 있어야 한다.


8) 동이(東夷)의 역사 기록을 수집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부분


㉠ 고려땅에서는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도 없었다. (김유신전)
㉡ 고려땅에서는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도 없었다.(김유신전)
""학자도 아는 선도산신(仙桃山神)의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을 몰랐다.(신라본기)
㉣ 거칠부의 『국사(國史)』와 당()영호징의 『신라국기(新羅國記)(신라본기)
㉤ 김부식의 신라왕칭(新羅王稱)과 최치원의『제왕연대력』에서 호칭(신라본기)


9)『삼국사기』 편찬자는 김부식 혼자가 아닌 11(삼국사기)

김부식의 사대사상은 『삼국사기』의 논, 찬에는 사대사상으로 보아질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대주의로만 몰아붙일 수 있는가 ?
지금 서양사상에 젖어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그들을 모두 사대주의자로 몰아붙이면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사대주의자라 할 수가 있는가.


10) 『삼국사기』 개요


9세기 이전을 기록한 유일한 정사이다

동이족(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사중에서 고려 이전 역사를 알수 있는 것은 오직 『삼국사기』 뿐이다

②『삼국사기』는 남북한만의 역사기록이 아니다.

『三國史記』를 모두 남북한 지역의 역사 기록으로 알고 있지만 남북한만의 기록이 아니다.
선비가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서울 한성과 연주 치청래주 항성( 州 淄靑萊州 項城)의 근처에 기자가 살던 땅과 진흥왕의 남북한 신라의 기록이 있으니 『三國史記』는 동이족의 동북아시아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③ 신라본기는 사로신라와 동신라 역사의 합본기(合本記)이다.

『三國史記』만이 두 신라가 동이족이었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支那族(漢部族)의 기록에 의하여 사로신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으며 진흥왕碑文에 의하여 동신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만이 두 신라의 건국연대를 밝힐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
김부식의 두 신라 기록의 합본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천년 동안 支那族(漢部族)의 기록을 모두 삭제하였을 지도 모른다.
다행하게도 합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흔적을 지금에 와서 되찾을 수가 있었다.
이는 기자가 살았던 그 시대 동이족(東夷族)이 하나 였음을 밝히는 자료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민족인 것이다.

503년 이전은 하나의 사로신라였으나 이후에는 두개의 신라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와 『북사』가 아니었다면 두개의 신라의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을 것이나
신라본기의 기록은 2개의 신라가 시작됨을 각각 기록하고 있었다.
아무리 합본을 하였어도 일식 홍수 지명 특산물 조공일정 민속절 등 여러 상황에서 두개의 신라가 서로 다르게 시작됨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두개의 신라의 시작을
- 307
년부터 신라라고 하는 사로신라와
-
고구려로부터 독립하는 503년으로 구분되어지게 되어 있음은 신라본기의 귀중함이었다.


⑤ 사서와 일치하는 百濟 수도 위치는 요의 동쪽에서 찾을수 있었다.

지금까지 百濟는 한국 서남쪽에 있었던 나라로 알고 있으나,
황해를 내해로 두 곳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百濟의 결정적인 자료는 百濟 수도 漢城과 웅진에 대한 충분한 기록이 있으니 유적을 찾을 수 있는 기록이며 모던 사서에서 공통부분이고 민족역사의 연속성도 함께 아주 명확하게 기록(記錄)을 하고 있다.

우리역사에서 수도에 대하여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오직 百濟 수도 뿐이며 그 기록은 우리 역사를 풀어 가는 최고의 열쇠인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역사는 영원(永遠)히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두 곳에 있어도 수도 한성과 웅진은 황해 서쪽에서 찾을 수 있게 기록하고 있다.

⑥ 『삼국사기』는 낙랑왕국(樂浪王國)과 낙랑군(樂浪郡)을 분명히 구별하여 주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모든 학자들이 하나의 낙랑으로 봄으로서 해서 우리역사는 흔들리게 되었었다.
분명히 동이족의 樂浪王國과 한의 낙랑군이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支那族(漢部族)의 기록에서 남북한 지역이 공백이 생길까 두려워했던 역사가 남북한 지역과 만주에 대한 해답이 바로 낙랑왕국이었고 高句麗의 남북한 진출 그리고 제3조선 영역이던 漢의 낙랑군 지역을 계승한 사로신라와 東夷族의 낙랑왕국을 계승한 東新羅 때문에 혼돈이 있었으나 이를 『삼국사기』는 분명히 구분하여 주고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⑦ 高句麗 百濟 사로신라의 시원지가 남북한 쪽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삼국사기』는 요()의 동쪽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支那族(漢部族)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⑧ 高句麗가 高句麗本紀는 705년의 역사라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으나 내용 중 668년에 高句麗 900년 역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북부여 역사가 그대로 高句麗歷史임을 밝혀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라는 사로(사로; 사로; 사로; 계림<駟盧; 斯盧; 泗盧; 鷄林>)역사를 포함시켜 신라 역사로 기록하면서도 高句麗歷史를 줄인 것으로 보이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다행하게도 9백년의 기록은 북부여(北夫餘)가 고구려력사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북부여 해모수 기록이 있으니 우리는 9백년의 고구려력사를 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⑨ 『삼국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백제와 고구려 패망 지역이 남북한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의 기록이다

어느 곳에도 남북한에서 패망한 기록이 없다.
오직 기자(箕子)가 살던 지역의 사로신라에서 였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패망 기록을 수서 구당서 당서(隋書 舊唐書 唐書)를 인용한 것은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로신라에서 기록된 것이 없고 스스로 기록하지 못한 마당에 장안 중심의 기록을 인용(引用)해도 내용이 같으니 그 위치를 분명히 찾으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⑩ 사로신라 존재가 지명뿐 아니라 문화유산(文化遺産)의 기록도 있다는 점이다.

나침반(羅針盤), 나전칠기(羅鈿漆器) 쇠뇌() () 비단() 등이 기록은 사로신라의 존재를 더욱 분명하게 하여 주고 있다.

⑩ 『삼국사기』는 동북 아세아가 동이족(東夷族)의 무대임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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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요의 동쪽 사로신라와 당과의 경계 지명은 석문 석성 항성(項城) 덕안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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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백제의 경계는 동명 덕안 서쪽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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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고구려의 경계 지역은 요()의 동쪽 태행산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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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동 신라와 경계선은 高句麗長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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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신라의 중심 강은 회수(淮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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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중심 강은 하수(河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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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중심 강은 백하(白河 : 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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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신라의 중심 강은 낙동강이었다.


11) 『삼국사기』의 시대별 구분

① 서기전(西紀前) -- 북부여(고리 : 高句麗), 낙랑국, 2조선, 삼한,
31년까지 -- 낙랑왕국,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왜
502년까지 --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 가라
668년까지 -- 고구려, 백제, 진출백제, 사로신라 동신라,
669년 이후 -- 사로신라, 동신라, 발해, 일본
9세기 -- 사로신라, 동신라, 후고구려, 후백제

이것이 『삼국사기』의 내용에서 우리민족(東夷族)의 국가이다

사로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기록은 『당서』이전의 지나족(한부족)의 기록에서 입증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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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퓨쳐 / coo2.net 송준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