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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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반도에서의 성씨사용이 언제부터인가 ? 에 대하여
알아보고져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이러할 가능성도 있다는 차원에서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 동신라(東新羅)의 진흥왕비(眞興王碑)에는
성씨(姓氏)의 사용이 없었다 >
진흥왕비는
-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와
- 568년에 세워진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비가
있는데
지명과 관직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姓氏)의 사용이 없었다는 것은 한반도에사
성씨 사용의 상한선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창녕진흥왕비에서 직책으로는
- 大等(대등),
- 軍主(군주),
- 幢主(당주, 唐주),
- 道使(도사),
- 村主(촌주),
- 上大等(상대등),
- 奈末(내말),
- 一伐干(일벌한),
- 一尺干(일척한),
- 述干(술간),
- 一吉干(일길한),
- 沙尺干(사척한),
- 及尺干(급척한),
- 大奈末(대내말),
- 郡使(군사)
등의 명칭이 있고
인명으로는
- 與古(여고),
- 武力(무력),
- 小里夫(소리부),
- 都記(도기),
- 忽利(홀리),
- 刀下(도하),
- 鳳安(봉안),
- 居七夫(거칠부),
- 子力(자력),
- 未得(미득),
- 智聰(지총),
- 竹夫(죽부),
- 福登(복등),
- 宿欣(숙혼),
- 汶叱(연알),
- 比戶(비호),
- 須兵夫(수병부),
- 德文元(덕문원),
- 멱薩(멱보),
- 牟聰(모총),
- 麻叱(마알)
등이 있고
북한산비에는
- 內夫(내부),
- 力(영력),
이 있고
이원비에는
- 彗忍(혜인),
- 居七夫(거칠부),
- 內夫(내부),
- 力(영력),
- 服冬(복동),
- 比知夫(비지부),
- 夫(진부),
- 知(영지),
- 非尸(비시),
- 舜知(순지),
- 忠知(충지),
- 吉之(길지)
등이 있으며
단양적성비에는
- 伊史夫(이사부),
- 西夫叱(서부질),
- 內札夫(내찰부),
- 比次夫(비차부),
- 武力(무력),
- 久設(구설),
- 支勿(지물),
- 助黑夫(조흑부)
등이 있는데 성씨로 보이는 것이 왜 보이질 않는가 ?
상대등 이하 지배층에서 성씨의 사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진흥왕비에도 단양적성비에도 성씨의 흔적이 없으니 한반도에서는 6세기까지도 성씨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옳지 않겠는가 ?
만약 6세기 이전 성씨가 사용되었다면 이 시대의 비석에 기록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도저히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신라에서 유리왕9년(32)에 6촌에 성씨를 하사하였다고 하는데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李氏, 崔氏, 孫氏, 鄭氏, 裵氏, 薛氏)였으니,
박씨, 김씨와 함께 최소한 8개의 성씨가
전하여졌을 것이 아닌가 ?
그럼에도 진흥왕비에서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원인은 무엇인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진흥왕은 干(한)이었던 智證麻立干(지증마립한)이 신라국왕으로 변경(獨立, 독립?)한
이후 3대왕이다.
干은 고구리의 지역지도자였는데 汗 또는 韓으로도 기록했다.
그렇다면 지증마립한이 변경(독립?)하기
전에 성씨를 사용한 신라의 위치는 어디인가 ? 하는 점이다.
삼국유사와 중국25사 동이에서는
九黎(구리)의 치우천자와 조선의 단군, 기자, 위만을 이은 동이 일부에 신라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치우천자의 능이 산동성 동평에 있고 기자 능이 안휘성 몽성에 있는데
신라의 지명인 항성, 석성, 덕안, 동명, 연주, 사지연수와
치우천자능과 기자능이 있는 남북에 있으며 西華 동쪽의 강회지역에 신라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中國25사와 삼국유사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한 서화 동쪽에 신라가 있음은 분명한데
역사기록을 숨기고 왜곡한다고 없어질 수 없는 진실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어떤가?
삼국사기는 중국25사, 삼국유사와 공통으로
석문, 석성, 서화,
항성, 주류성, 동성, 잠산, 덕안의 동쪽에 新羅(사로신라)가 있음을 밝히면서도 유일하게 비공통으로 또 하나의 新羅(동신라)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역사기록으로도 서화 항성의 동쪽인 강회지역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
당영호징 신라국기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某王이라 기록)이 있었고
반도 만주에 기록으로 거칠부 국사와 김부식의 干新羅의 기록이 있으며
김부식시대까지도 반도에는 소문도 기록도 없었던
을지문덕, 장보고의 기록이 있음은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500년 이전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광복한 新羅(대륙신라)이고
503년 이후 신라는 독립한 신라(동신라)임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결국 503년 이후에는 두개의 다른 新羅가 있었지만
500년 이전에는 서화 항성의 동쪽 사로新羅만 있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니
유리왕 9년(32)부터 성씨를 사용하였다고
했으니
이 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서화 동쪽 사로신라로 볼 수 있으니
동신라 진흥왕비에 성씨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 아닌가?
반도에선 성씨 시용은 동신라의 체제가 확립된 진흥왕 이후가 아닐까?
진흥왕비, 단양적성비에서 성씨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의문점을 밝혀주는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다.
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7세기 이후가 아닐까 ?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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