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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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엔 시간내기가 여간 쉬운일이 아닌점 이해바랍니다
문의하시는 분이 많아 "설"에도
옮겨 놓습니다
주말에 자세한 부속자료를 다 올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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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 이면 객관적인 자료 확인이 가능한 자료로 연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록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의문을 가지고 같이 연구해 나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탁말씀 오재성 선생님은 컴세대가 아닌지라(독수리 타법) 답변 내용중 오타 등이발견되어도 넓은 이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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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17번"
"통계청 자료소개 - 조선초기 인구기록"를
다시 올립니다
참고바랍니다
< 통계청 자료소개 - 조선초기 인구기록 >
인구에 대해 한가지만 언급합니다
본 홈페이지 근거에 대해 신뢰를 못하시는 분들이 많은 가 봅니다
"시시비비"의 말썽을 줄이기 위해
- 원문(주로 정사, 정사에 기록되고
야사에 공통된 부분은 야사 일부 인용)
- 지도(중국고지도)
- 연구결과(천문, 기상 등)
등을 인용하여 역사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왜그런지는 모두 아실 것입니다
시시비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우리역사를 자신있게 말하자면 못할 말이
뭐 있겟습니까 마는
아직은 때가 아니니 자랑스럽게 우리역사를 마음놓고 논할 수 있을 때
우리민족의 정신에 대해서도 당연 토론해야지요
그때가 빨리 올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아래 자료를 하나 소개합니다
< 통계청 소장 "한국통계발전사"
중 "조선건국초기 호구통계"
>


전체인구는 제외하고 백제 / 신라의 강역만 보지요
만약에 전염병 등으로 인구가 급감하였다면 "기록"이 있어야 하나
그러한 기록이 없으니,
아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보다 700년전 일어난 삼국전쟁기록중 일부를 보면
<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
① 660년 3월
나당연합군 18만의 병력이 백제 침공(당군 13만, 신라군 5만)
소정방 의자왕과 왕족, 신하 등 93인과
백제인 1만 2천인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감
② 백제의 부흥운동
당군 40만 증파
당시 부흥군이 회복한 성 200여성
조선초기 충청, 전라 총인원이 20만이
않되는데 당군이 40만 증파(?)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비" 클릭 18번
- "인구로 본 우리역사 - 왜? 인구가
갈수록 줄어들었는 가 ? 그의문점을 해소한다 !" 참고
"설" 클릭 23번
- 김유신은 어디에 있었는 가 ?
< 참 고 >

이 자료들을 소개하는 것은 검증하지 않은
가공의 자료로 어찌 우리역사를
논할 수 있겠느냐 하는 차원에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신뢰의 문제 이겠지요
감사합니다
< 송준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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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18번"
- 인구로 본 우리역사 - 왜? 인구가
갈수록 줄어들었는 가 ? 그의문점을 해소한다 !
사서에 나오는 인구의 기록을 총망라한 내용입니다
이해하시는데 참고바랍니다
< 사서에 나오는 동이의 인구변화 >
< 요 약 >
# 시대가 흐를수록 인구는 증가하는게 자연현상인데
어찌하여 우리민족의 인구는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줄어들었는 지 이유를 알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인구의 증감이나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열해 본다
잘못기록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그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누가 증빙할 수 있으리오
단지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기술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 지 연구할 따름이다
1. 사서에 나오는 동이 인구의 변화
① 고구려 : 69만호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② 신라 : (수도) 178,936호 (삼국유사)
③ 백제 : 76만호(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④ 고려 : 210만명 (송사 : 백제멸망후 600여년후)
⑤ 조선 (통계청 발행 한국통계발전사)
- 태조6년 (1406년 : 백제패망 740년후) :
153,404호 (370,365명 : 한성제외)
- 중종14년 (1519년 : 백제패망 860년후) :
754,146호 (3,745,481명)
- 영조8년 (1732년 : 백제패망 1,100년후)
: 1,713,849호 (7,273,446명)
- 백제 패망후 730여년후 지방별 인구 (태조
및 태종실록)
* 경기, 충청, 전라도 : 56,003호
* 경상도 48,993호
2. 분석
- 백제 > 고려 > 조선초
- 백제 > 경기 + 충청 + 전라도 (700여년후)
- 신라수도 > 경상도 (700여년후)
3. 결론
-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만 존재하지 않고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 백제의 강역이 경기, 충청,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신라의 강역이 경상도로 국한되었다는 것은 오류이다
- 고려는 한반도보다 더 큰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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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서에 나오는 동이의 인구변화 >
1. 서두에
사람의 數 또는 家口의 數로 우리역사를 조명해 보겠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자료의 결핍으로 대단히 어렵다.
人口를 문자대로 풀이하면 "사람의 입"이라는
단어지만 "사람의 수"를 나타내고
있는데
현재의 인구에 대한 정의는 정신문화연구원 발행 백과사전에 의하면 "인구는
인간집단의 계수로써 정치적 경제적으로 구획된 일정한 지역내에 있는 주민의 총체를 말한다.
따라서,인구는 국민, 인종, 민족과 다르며,일정한 지역내에 있는 주민 전부를 포괄하는
말로써 그지역에 사는 외국인이나 이민족도 포함하게 되며,
반대로 국민이라 하여도 그 지역에 있지 아니하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국어사전에서도 "인구는 어떠한 지역에 사는 사람의 총수"라고 정의하였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통계청에서 근대적인 인구통계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일제는 총독부에서 하였다.
근세조선 이전의 인구통계는 근대적인 인구의 정의에 부합되는 조사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각 시대의 기록에 사람과 관계되는 "戶口" 나 "戶"
또는 "人"으로 기록된
단편적인 것을 참고하여 우리역사 전반에 걸쳐 인구의 흐름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구는 질병과 전쟁, 환경등 불규칙적인 변경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인구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수천년 동안 계속되어진 역사의 흐름과 함께 인간의 삶도 계속 이어져 왔으니 인구로 우리역사를 조명해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이미 신라와 백제가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천문학과 기상학적인 방법으로 앞에서 설명을 한바 있다.
여기에 인구에 의한 역사의 보완도 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점에 주안점을 두어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인구수의 변화를 추적해 보았다
2. 인구와 관련된 기록
1). 三國志
扶 餘 : 方可 二千里 戶七萬
高句麗 : 方可 二千里 戶三萬
東沃沮 : 可千里 戶五千
濊 : 戶二萬
韓 : 方可四千里 總十餘萬戶, 弁辰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 - 總四五萬戶
倭 : 百餘國.
- 對馬國有千餘戶,一大國有三千許家,末盧國有四千餘戶
- 伊都國有千餘戶,奴國有二萬戶,不彌國有千餘戶,
- 投馬國五萬餘戶,邪馬壹國七萬餘戶
2). 北史
倭國在百濟新羅東南---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太伯之後-戶可十萬
3). 舊唐書
高麗 :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城百七十六 戶六十九萬七千
百濟 : 城二百.戶七十六萬
新羅 : 西接百濟.東西千里 南北二千里.
渤海靺鞨 : 高麗全盛之時 强兵三十餘萬
4). 唐書
高麗 : 百七十六城.戶六十九萬
百濟 : 二百城. 戶七十六萬
5). 三國史記
高句麗 : 百七十六城. 六十九萬餘戶
百 濟 : 二百城. 七十六萬戶
崔致遠傳 : 高句麗百濟全盛時强兵百萬
7). 三國遺事
高句麗項目 : 高麗全盛之時 二十萬五百八戶 (다른사서와다름)
弁韓百濟項目 : 百濟全盛之時十五萬二千三百戶 (다른사서와다름)
辰韓項目 : 新羅全盛之時 京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太宗春秋公項目 : 百濟二百盛 七十六萬戶(변한항목과다름?)
南夫餘前百濟北夫餘項目 : 古典記 百濟二百盛 七十六萬戶
駕洛國 : 가락이전 千시대 領總百姓 凡一百戶七萬五千人
5). 宋史
高麗 : 南北千里 東西二千里.南女二百十萬口
8).桓檀古記 : 檀君世紀 14世檀君
고불
乙亥(BC.1662) 五十六年遣官四方査計戶口總一億八千萬口
9).조선시대 인구
한국통계발전사(통계청발행)에 왕조실록등을
참고하여 조선시대의 "戶"와 "口" 대해서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별지와
같다.
위와 같이 사람과 관련된 기록이 있으나 어떤곳에는 "戶"로만 되어 있고 또 "口"로만 되어 있으며 "人"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위의 기록들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3.
문제 제기
1). 中國 『25史』의 여러 史書에서 百濟가 76萬戶로 기록되었고 百濟가
敗亡한후 860년이 된 조선중종때(1519년)에 이르러 겨우 백제의 戶數와 같이 되었다.
2). 現歷史上 百濟 강역이라고 주장한 경기.충청.전라도의
호수가 百濟가 패망한지 700여년이 경과된 이후에도 7만호를
초과하지 못하고 있다.
3). 人口로 본다면 百濟의 人口를 623萬으로 『동아백과사전』 및 『정신문화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때의 戶當평균가족수를 고려할때 百濟의 인구를 최소 311만명으로 볼 수 있다.
거기에 비하여
- 高 麗 210만명
- 李朝太祖 30만명 (양계누락)
- 李朝太宗 37만명 (한성부누락)
- 李朝世宗 68만명 (한성, 개성누락)
- 李朝中宗 374만명
4). 新羅의 경우도 신라의 首都에 약 17만9천호였는데
신라가 패망한지 500여년이 지난후 이씨조선 때 경상도의 총호수가 10만에도 미달했다.
5). 전쟁시동원된 병력수에서
- 百濟敗亡時 唐軍 13만명이 동원되었고 百濟의 수도 웅진이 함락된 후에도 200성이 흑치상지에게 귀속되니 40만명의 唐軍이 증파되었다고
하니 그에 상응한 백제의 군대가 있었을 것이다.
(현재도 백제지역으로 추정하는 충청도 지역에서 이만한 군사에 대응되는 인원이 있는가 ?
조선 초기 경기, 충청, 전라 등 삼도
총인구가 102,426명인데 이보다 700년전에는
얼마나 되었을 까 ?
백제인구에 버금 가는 곳을 찾아야 한다)
- 高麗때 1010년 거란 성종이 40만군으로
침범했을때 강조가 30만명으로 대적하였다.
(1400년대 조선 인구가 약 37만명이었는데
?)
- 高麗때 1018년 거란 소배압이 침범했을때 姜邯瓚(강함찬)이 20만군으로
승리했다.
- 조선때 이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1593년 정월 임진란때 명나라에 통보한 의병 총수는 관군의 1/4인 2만2,600명이었다
⇒ 위 內容으로보아 人口와 戶數가 점차 減少된 이유가 무엇이며 百濟의 강한 군사력에 비하여 高麗를 거쳐 李朝에 이를 수록 병력수가
줄어든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설정 할수 있다.
첫째 : 人口 및 戶數와 比例한 領土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 : 큰 戰亂이나 傳染病등으로 인하여 인구의 激減이 있었을 것이다.
세째 : 위 두가지가 합해진 결과 등을 그 이유로 볼 수 있다.
4. 인구변화와 역사의 연결
(1). 『삼국지』『후한서』및 『구당서』『당서』에서
동이위치 배열도와 백제, 중국 『25사』동이전의 위치
배열도는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은 배열도에 의하여 지명이 있는 중국에서
현재의 인구를 살펴보자.
『明史』권 40권과 권41에서 얻어진
자료이다

백제의 일식관측지 (서울대 박창범 교수)

백제의 패망시 지명이 있는 지역은 현재 산동성
및 하북성남부 그리고 안휘성 서부이다.
백제 패망시기의 지명인 평원 황산 대산 백마강 제성 주유성 항성 등과 성양 청하가 있는 지역인 山東의 호구가 77만으로 나와 있음도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1491년은 현대와 같은 산업사회도 아니고 백제때와도 비슷한 산업구조시대로 볼수 있는 시대의 것이다.
인구 및 호수면에서 백제는 중국대륙에 있었으며 한반도에는 그 일부가 존재했다고 하는 사서의 내용과 천문 및 기상학적 입증이
모두 일치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2) 고려의 동북쪽 경계는 함경남도가 아니라 두만강 북쪽 700리 밖이다.
지금까지는 고려 동북 경계는 함경남도 정도로 배워 왔으나 고려사와 고지도는 두만강 북쪽
700리 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사 권46에 의하면 서북쪽은 압록강,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춘령에 대하여는 중앙도서관 소장 한 61-77(고지도) 및 규장각 소장 고 4709-89-2(고지도)에 의하면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서북쪽 압록강을 현재의 압록강으로 볼수 있지만
만주원류고 신라항목과 고려사 137권 철령위 및 고려사 42권에
동령부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요하가 압록강으로 불리웠음을 밝히고 있다
(3) 만주의 長城을 축조한 국가의 추정 (고구려 천리장성 항목 참조)
만주의 장성의 축조는 서(북경)쪽 국가가
아니라 동(백두산)쪽 국가에서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高麗人口가 조선초기 인구보다 많은 이유를 밝혀줄 사료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
장성의 좌우에 산맥과 강이 있는데 어느 쪽에서 무엇을 등지고 장성을 구축하겠는가 ?


宋史에 의하면 조선, 高句麗, 高麗가 모두 禹의 夏나라때의 冀州에 있었다고 하였고
우적도에서 기주는 한수(황하)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현재는 하북성에 있다.
고려 210萬口와 조선초기 32만구의
차이를 밝혀줄 내용이 아닌지 연구를해야할 것이다.
고려의 강역이 현 한반도보다 북과 서쪽으로 더 확장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입증자료가 요구되고 있다.
5. 결 론
우리 조상들의 살던 때와 장소를 가려내기
위한 여러가지 연구 가운데 중국의 『25史』가 밝힌 기원전
2700여년의 九黎天子(구리王) 蚩尤와
중국의 始祖 黃帝(황제)의 戰爭, 高句麗, 新羅, 百濟때
中國大陸에서의 활동은 이를 立證하는 일식, 홍수기록, 오늘
소개한 인구 등에서 더욱 확실하게 된것 같다.
여기에 대하여 高麗의 강역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내의 좁은 지역이 아니고 최소한 압록강 두만강 밖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더욱 많은 연구를 해야 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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