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 우리민족사연구의 과제 >
一. 서
론
현재까지 『삼국사기』『삼국유사』『중국25사』 동이관계 기록을 종합비교하여 보면 아래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바,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1. 전쟁의 기록과 활동지명이 중국대륙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쟁의 지명은 국가간의 경계를 찾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위의 사서에 등장하는 지명을 찾을수만 있다면 그 국가의 위치를 분명히 알수 있다.
그러나 위 사서에 등장하는 지명이 오랜세월을 거치는 동안 변화될 수도 있으니 현재는 찾지못할 수도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삼국의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으나 중국에는 있다.
특히 백제패망시의 관계지명, 高句麗와 漢, 당과의
전쟁지명등이 중국에만 존재하고 한반도에는 없다.
2. 人口증가율에 합당한 三國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인구와 조선과 명나라초기 인구비교를 해보았다.
우리가 현재까지 백제땅으로 강조하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조선 초기 태조, 태종, 세종때 인구가 각각
- 경기도 20,729戶,
- 충청도 19,560戶,
- 전라도 15,714호로
합 56,003戶이고 ,
통일신라땅으로 알고있는
- 경상도는 48,993戶,
- 강원도 15,879戶
합64,872戶이고,
高句麗땅으로 강조하는
- 평안도 27,788戶,
- 황해도 11,311戶,
- 함경도 14,170戶
합53,068호라고 하였는데
조선초기보다 700년 이전인 高句麗, 百濟, 신라시대 인구가 각각
- 高句麗 69만호,
- 백제 76만호,
- 신라수도 17만8천호라고 하였으니
10%도 되지 않게 인구가 감소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숫자가 잘못 기재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백제 신라 고구려 지명이 현존하는 요(遼)의 동쪽에는 어떤가 ?
명나라초기때 백제지명이 존재하는 곳의 인구가 77만호로 되어 있다.
군사면에서도
- 고구려, 백제전성시 100만군사,
- 고려의 강조가 동원한 30만군사,
- 강감찬의 20만군사 등의 대군(大軍)에 비하면
조선시대에 이루어지지 못한 이율곡의 10만양병 주장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음은 인구감소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삼국의 인구가 조선초기보다 월등히 많다고 하였으니 인구면에서 일치하는 지역에서 삼국을 찾아야 한다.
3. 외교적인면에서 양국의 방문거리(訪問距離)가 1개월 이내에 도착될수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조선시대 명나라 또는 청나라와의 조공일정이
신의주에서 45일 이상 소요되었으니 한성(漢城)에서는 더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대륙국가의 수도인 장안(長安) 및 낙양(洛陽)까지
출발에서 도착까지 같은 달로 기록되어 있으니 출발과 도착이 같은 달로 기록될수 있는 지역을 찾아야 할 것이다.
4. 경제적인면에서 조공품 즉 특산물의 생산지를 찾아야 한다.
지명은 국가의 의도에 의해서 변경 될 수
있다.
지명을 변경한다 하여도 지역이 변하지 않는 것이 특산물의 생산지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 나전칠기,
- 비단,
- 나침반의 재료인 자석(磁石)과 침(針),
- 목화,
- 쇠뇌,
- 유황 등을
수출하였으니 그 생산지를 찾으면 국가의 위치를 밝혀 낼수 있다.
- 나전칠기는 무령, 덕안(武寧 德安)동쪽의 흡( )에서,
- 비단은 서화, 항성(西華 項城) 동북쪽의 저(雎)에서,
- 나침반은 진성 고평(晋城 高平)과
동명(東明) 사이의 자(磁)에서 생산되었다.
이 지역은 모두 중국(中國)의 산동성, 하북성, 강소성, 안휘성에
위치해 있다.
5. 자연현상에서 일식, 홍수, 대풍, 행성운동을 통해서 관측국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삼국의 일식에 대한 기록은 우리 기록에만
있는 낮에 금성을 관측한 사실로 미루어 일식도 독자관측으로 보이며 삼국의 일식관측지는 요의 동쪽인 중국대륙으로 규명되었고 신라 후기의 기록은
한반도로 나타나고 있다.
대우(大雨) 즉 홍수에 대한 기록도
- 5세기 이전에는 5월 이전에 많고
- 6세기부터는 6월 이후에 많다.
한반도는 6월 이후에 홍수가 집중되어 있고 5월
이전에는 한반도는 없으나 양자강 유역은 있어왔다.
대풍(大風)도 6월 이전에 많다.
이와같은 자연현상이 일어 날수 있는 지역을 찾아야 한다.
자연현상과 일치하는 삼국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6. 풍속 및 문화면에서 삼국의 위치를 조명해 볼 수 있다.
민속절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어떤 유례에 의하여
시작되어 오랜 세월 같은 날을 정하여 행사를 해왔을 것이다.
- 8월 15일은 신라때부터 있어왔는데 『삼국사기』에는 가배(嘉俳)로 기록되어 있고
- 9월 9일도 민속절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 8월 15일은 당과 일본에는 없는 신라 고유의 민속절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한국 중국에서 위 민속절이 지켜지고 있으나 한국보다는 중국이 더 잘 지켜지고 있다.
당나라 이후에 8월 15일 및 9월 9일을 민속절로 한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유습(遺習)이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었을 의미하는가 ?
한자(漢字)사용에서도 이두법을 한국보다는
중국이 더 강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이두법의 사용지역과 신라지역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화랑도의 습관이 고려(高麗) 이후 한반도에는
없었으나 중국에는 지금도 있다.
7. 역사의 맥이 같은 지역을 찾아야 한다.
지명과 특산물이 같은 지역에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데
요(遼 : 좌권)의 동쪽에는
- 한웅(桓雄)시대 치우천자(蚩尤天子)관계 지명인 동평(東平)과 거야(鉅野)가
있고,
- 고조선시대 기자관계 지명인 서화와 몽성이 있고,
- 신라시대 김유신과 계백관계 지명인 평원, 황산,
백마강, 동명, 항성, 동성, 잠산, 독산, 덕안 등이 있고,
- 장보고때의 지명인 서주, 무령, 사, 연수, 완도가 있고,
- 최치원관계 지명인 대산, 율수, 유연제노(幽 燕 薺 魯)와 오월(吳
越) 등이
중국대륙에는 있으나 반도에는 없다.
특산물도 비단, 목화, 노(弩) 역시 요의 동쪽 대륙에서 반도 고려(高麗)보다 오랫동안 계승 발전하고 있다.
8. 東夷(우리) 삼국의 위치를 분명히 하는 것은 『25사』동이전이다.
동이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왜의
위치는 요(遼)의 동쪽인 중국대륙에 있었음이 송나라때
만든 우적도에 동이지명이 있어 확인되고 있으며
현재의 중국 지도에도 동이의 고구려, 예(濊), 한(韓), 백제, 신라 왜(倭)의
지명이 있으니 '중국25사' 동이 각국은 대륙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도 동이전과 동일한 내용은 한반도 내용으로 인용하여
둔갑 시킬수 없는 것이다.
위와같은 여러 가지면에서 그 위치가 일치되고 있으므로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가라가 중국땅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9. 한반도에 있는 삼국의 명문이 적힌 유물은 사서의 일부를 입증 할수는 있으나
역사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명문이 있는 유적이 있으니 한반도에 삼국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즉,
- 광개토대왕의 연호가 세겨진 유물이 발견되고
- 백제가 새겨진 사마왕(斯麻王)의 지석이
있고
- 진흥왕이 세겨진 비가 있어
한반도에 당연히 삼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 백제는 자칭왕(自稱王)이며 과부의
아들인 무강왕과 사마왕(斯摩王)의 대칭된 왕계보가
있다는 것과
- 똑같은 내용의 당평백제비가 부여에만 두 개가 있다는 것,
- 고구려는 한족(漢族)국가의 연호가
세겨진 유물이 한국에서 BC84년부터 AD410년사이의
것만 출토되고 있어며
- 고구려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진 이후에는 조공 기록은 많으나 대륙연호의 유물이 반도에는 없다.
- 고구려 호태왕 이전부터 고구려땅이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뀐 내용이 신라 진흥왕비에 기록되어 있다.
유물만으로 보면 분명히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에도 삼국이 있고 해동(한국)에도
삼국이 있었던 것으로 볼수 있으나 사서에서 공통부분의 위치를 밝히고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본 결과 한반도는 백제의 일시 진출과 고구려에서
독립한 신라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10.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서 광복한
신라와 독립한 신라가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307년에 복국호한 신라와
- 503년에 새로 생긴 신라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자장법사가 신라에 왔을 때 신라왕이 선덕여왕과 정신대왕으로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고
-『신,구당서』에는 고구려 동쪽 신라와 고구려 남쪽 백제의 동쪽 신라로 각각 기록되고
있다.
-『25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왜가 중국에 있다고 하였으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같은 내용은 중국의 것이니 취할수 없다고 한다면 한반도만을 나타내는 기록은 얼마나 있는가 ?
다행스럽게도 광개토대왕비가 있으니 대륙과 한반도는 하나의 민족으로 귀결된다.
☆ 광개토대왕碑는
-『삼국지』가 편찬된지 100년후이고,
- 碑가 세워진 30년후에 『후한서』가 편찬되었으니
-『삼국지』『후한서』동이전에서 高句麗, 濊, 韓, 倭의 위치가 요의 동쪽인 중국에 있었다고 하였고
- 한반도에는 호태왕의 연호인 영락이 세겨진 유물이 있으며
- 광개토대왕 이전부터 高句麗땅이 간(干)에서
왕으로 되었다는 것이 신라碑에 있으니
한반도는 高句麗로부터 독립한 신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百濟는 斯麻王이나 昌王의 기록이 발견되고 있으니
百濟의 수도는 『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공통적으로 웅진으로 되어 있으므로 지명과 인명이 일치하는 곳을 찾아야
한다.
또한 백제의 한성은 개로왕의 토목공사 현장을 찾으면 된다.
웅진과 한성의 조건에 일치하는 곳은 지명, 일식 등에 의해서 중국에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백제는 무엇인가 ?
이는 앞으로 계속해서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지만 다음과 같은 몇가지 가설을 세울수 있을 것 같다.
백제가 고구려에 병합되었을 때 백제의 신하가 한반도에 와서 일부지역에 백제를 세웠거나, 광복한
백제가 일시 진출하였다가 한반도지역의 신라 독립으로 축출된 것으로 볼수도 있다.
또한 삼국 이전에도 고조선이 있었고 고조선 이전에는 구리(九黎)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밝혔었다.
이와같은 내용이 지금까지 연구되어 왔으나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재검토하여야 한다.
다음시간에 계속 ~
< 송준희 드림 >
지명위치는 저녁에 보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