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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사연구의 과제 (2)

2001-10-16 17:31:48


제목

제목: 우리민족사연구의 과제 (2)

등 록 자

송준희

날짜

2001-10-16 17:31:48

   


필수한자는 한글병기 생략하고 원문 그대로 올립니다 !


. 민족명과 사관이 바로 정립되어야한다.



1. 한민족 또는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짧은 역사성이 있을뿐이다


"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속담은 말한대로 되었을 때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명칭을 광복 이후에는 한민족이라 부르고
근세조선시대는 조선족으로 부른다.

이는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고 대한제국, 대한민국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국명이 바로 민족명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대한제국 이전에 한민족이라는 단어를 민족명으로 기록한 것이 없고 근세조선 이전에 조선족이라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국명을 기준으로 하여 민족명을 만든다면 새로운 민족을 만드는 것이니 우리 역사가 유구하다고 하는 것과 일치 될수가 없다.

한민족이나 조선족이라는 개념은 대한제국의 강역을 기준으로 한 국민을 민족으로 보았다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국외에 이주하여 살아도 근세조선 이후에 진출한 후예만이 우리민족에 포함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예를 들면 지리교과서에서는 만주에는 만주족이 살고 있다고 하여 한민족과 다르다고 하면서도, 역사교과서에서는 만주에서 건국한 고구려가 우리민족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교육과정에서는 우리가 만주족으로 불리울수도 있고, 만주족을 한민족으로도 불리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주족으로 불리운 때가 있는가 ?
분명히 역사적으로는 만주민과 내동민(內東民 : 황해동쪽민)을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를 따르자면 과거 역사를 재정립해야되고
과거를 따르자면 우리역사를 재정립하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는 이론과 실체가 유리된 것을 배울 수밖에 없다.

국명으로 민족명칭을 불러왔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시대의 우리명칭은
-
한민족으로 불리웠을까 ?
-
아니면 조선족으로 불리웠을까 ?
결코 한민족이나 조선족으로 불리웠다는 기록이 없다.

그때 우리민족은 "동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쪽에 사는 사람들" "동쪽에서 쇠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강역에 따라 한민족이나 조선족으로 부른다면 우리는 역사가 짧은 민족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와같은 민족명칭을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근세조선 밖에 없다면 모르지만 유구한 역사가 있었으니 결코 조선족이나 한민족으로 부른다면 우리역사를 바르게 정립 할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고조선을 기준으로하여 조선족으로 불리웠다고 할수도 있으나 '위서'에 의한 단군 기자 기록의 조선은 東夷민족의 국가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또 한민족을 고조선때의 한()이나 그 이전 한()을 나타낸다고 할수도 있지만 고조선 때의 한()은 지방분권지역을 나타내고 그 이후의 한은 동이국가의 일부이지 전체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국가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우리민족의 명칭을 찾아서 바로 사용해야 민족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 할수 있다고 본다.



2. 현재 우리는 국가사관을 민족史觀으로 보고 있다.


史觀이란 무엇인가 ?

국어사전에서 사관이란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여 해석하는 근본적인 견해 또는 역사적 현실을 전적으로 파악하여 이것을 해석하는 입장"등으로 풀이 하고 있어 역사를 파악하는 시각 또는 역사를 보는 시각이라 할수 있다.

1). 국가사관 과 민족사관의 차이

국가사관은 국가를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 민족사관은 민족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차이인데 그 차이는 국가와 민족의 차이 만큼의 차이이다.

-
고구려의 『유기』,
-
이문진이 쓴 『신집』,
-
百濟의 고흥이 쓴 『서기』,
-
신라의 거칠부가 쓴 『국사』,
-
당의 영호징이 쓴 『신라국기』,
-
조선의 정인지가 쓴 『고려사』등은 국사이며 국가사관으로 쓰여졌다.

또한 '진흥왕碑' ,'광개토경평안호태왕碑'도 국가사관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25사』동이전은 민족사관에 의하여 쓰여진것으로 볼수 있는 것은 여러국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국가사관은 자기국가를 중심으로 쓰여지지만
민족사관은 민족을 중심으로 하다보니 여러국가를 모두 포함하여 기록한다는 것이 다르다.

국가사관은 필자의 국가 이외는 모두 비아(非我)가 되는 것이 특징이고
민족사관은 국가는 다르다 하여도 과거 역사를 같이한 동포를 하나로 보는 사관이다.


2). 조선 이후 현재까지의 사관은 대한제국 국가사관이다.


근세조선 5백여년간 황해 동쪽에서는 어떤 사관으로 역사를 보았을까 ?

신채호는 대한제국 국민사관으로 우리역사를 기록하였다.
혹자는 신채호가 민족사학을 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중국 동북지역과 현 요하 서쪽까지 확대하였다고 논하고 있으나
이것으로 민족사학이 될수는 없다.

그의 아()와 비아(非我)에서 여진, 선비(女眞 鮮卑)등이 아()에서 분리되어 비아(非我)라 하였고 이성계 조선강역 백성을 조선민족이라고 하였다.

근세조선 국가로 보면 압록강, 두만강 이남이 근세조선의 영역이므로 아()이고 그 이외는 비아(非我)가 분명하다.

이것은 신채호시대를 기준으로 我와 非我를 구분한 것이며
이 역사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600년 이전 조선건국이 기준이 된것이다.
만약 만주가 우리역사의 현장이었다.
고구려, 발해의 후예를 비아(非我)로 보아서는 민족사가 될 수 없음을 모르고 있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만주등 중()국을 모두 통치하였다고 연구된다 하여도 그들이 非我가 되는 한 국가사관이지 민족사관으로 본 것은 아니다.

신채호, 정약용, 안정복 등 조선시대의 모든 학자들은 모두 조선 국가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보고 국사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들은 족보를 보고 가승(家乘)을 만들듯 역사를 썼다.

지나족들은 적어도 東夷에서 파보를 만들듯 기록하고 있는데
근세조선 이후의 학자들은 가승과 같은 국가사관에 머물러 있으니 丹濟의 후학들이 국민사관에서 벗어 날수가 있었겠는가 ?

현재의 대다수 역사연구가들도 국민사관에 머물러 단군을 국조로 하면서도 그 후예를 다른민족으로 보는 대한제국 국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 뿐만 아니라 일연의 『삼국유사』도 고려국가사관에서 벗어 났다고 볼 수 없다.

『삼국사기』는 국가사관으로 쓰려고 노력하였지만 국사가 아닌 민족사로 볼수 있다.
왜냐하면 기자가 살던 서화 에서 경주까지 하나의 민족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지나의 『동이전』도 수용하고
-
거칠부의 『국사』도,
-
唐영호징의 『신라국기』도 수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국가사관으로 쓰여졌음에도 민족사로 볼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의 민족 강역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주, 덕안, 항성, 서화, 동명, 석문, 태원, 은산(汀州, 德安, 項城, 西華, 東明, 石門, 太原, 銀山) 동쪽에서 경주까지 하나의 민족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세조선시대부터 광복이후 지금까지 국민사관으로 민족사를 복원하려 하면서 현재에 이러렀다.

국가사관과 민족사관을 분명히 가름 할수 있는 사관을 가져야 올바른 민족사를 정립 할 수 있는 것이다.


3). 역사기준은 고조선이라고 하면서 실지로 언행에서는 근세조선을 민족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 기준은 고조선으로 하면서도 고조선 백성의 후예를 선비족, 여진족, 조선족 등으로 분리하여 왔다는 것은 기준을 고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기준으로 하여 민족을 정립했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지금 배운바와 같은 민족사관으로 민족사를 만들려고 해도 기록이 존재하는 전체 우리역사 속에서는 부족사에 머물수 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4) 고조선 이전의 기록이 있어도 부정하고 한반도만을 고집하는 점

고조선 이전 기록이 있음에도 현재 민족 기준을 고조선으로 하고 있다.
이는 고조선 이전이 없어서가 아니고 대한제국 강역을 민족 강역으로 보고 우리역사를 보기 때문이다.

사서에서 내용을 취사선택하고 자기의 뜻과 맞지않은 나머지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않다.

-
조선강역을 먼저 설정하고 사서를 부정한다.

『삼국사기』 『25사』동이전등 기본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서를 부정하는 버릇이 들어 있다.
이유는 내용이 근세조선 강역에서는 이루어 질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강역을 반도로 한정하지 않고 사서를 정리하고 정리된 상태에서 강역을 찾아보면 사서를 부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
조선강역을 먼저 우리민족 강역으로 설정한 다음 사서를 맞추고 있으니 반도에 일치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하여 역사를 부정하게 된 것이다.


-
史書를 부정하고 수정하며서도 취사선택하고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역사 기록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반복하여 수정 출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그대로 복사해서 전하여진 것이 아니라 그시대에 맞게 수정되어 편찬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보는 사서가 최초의 출판물이 아니라는 점이 바로 사서를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다.

또한 기록내용도 시대에 따라 그 시대에 맞게 수정됨으로 본래의 뜻과는 상당한 차이를 둘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볼수도 없고 체험 할 수도 없는 우리는 남아있는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재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기록자체를 현대 국가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역사의 내용이 현재와 다를 수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연구는 현재 있는 사서를 연구하고자 하는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기록들을 종합하여 검토하면서 정리해야지 현재의 시각으로 사서를 부정하고 취사선택한다면 어찌 당시의 역사를 복원 할 수 있겠는가

위와같이 우리가 역사를 현실과 일치되도록 취사선택한다 하여도 사서가 있는 한 한반도만을 한민족으로 볼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25사』동이전에 기록된 역사는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반도민족으로 남고 싶고 중국이 동이(東夷)가 동화되었다고 하여도 기록이 있는 한 東夷는 영원한 東夷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삼국사기』에서 『25사』와의 공통부분은 영원히 남아있다
『삼국사기』를 부정하고 수정하고 취사선택한다하여도 『25사』동이전과 『고지도』와 현 『지도』가 일치되는 그 역사 기록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거나 폐기할 수 없다.

셋째.『삼국유사』에서『25사』와 일치되는 영원히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서 동이전과 공통부분은 그것을 인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한 영원히 『우적도』의 범위를 벗어 날수가 없다.

넷째.25사』동이전,『삼국사기』,『삼국유사』를 부정해도 "호태왕비"가 입증한다.

위의 사서들이 후대의 국가사관에 의해서 수정되고 취사선택되고 부정한다하여도 "호태왕비"가 존재하는 한 전체를 흐리게 만들수는 없다.

왜냐하면 광개토대왕시대에 신라, 백제, 가라, 倭의 위치가 사서의 기록과 일치되고 한반도는 고구려 였다고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호태왕비에서 한반도는 호태왕 이전에 高句麗땅이라고 진흥왕비가 입증한다.

우리는 『삼국사기』나 『25사』동이전에서 동이국가들의 위치가 황해의 서쪽이라면 반도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하여 사서를 부정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남아 있고 "호태왕비" "진흥왕비"가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가 반도를 통치하기 이전은 최씨의 낙랑국이고 고구려의 간()시대를 지나 高句麗에서 독립한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호태왕비" "진흥왕비"가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기록이 존재하는 한 동이족(東夷族)을 한족(漢族)으로변경 할 수는 없다.
한족(漢族)들이 우리 동이(東夷)역사를 가져다 자기들의 역사로 할수는 없다.
왜냐하면 동이(東夷)가 한족(漢族)으로 바꿔질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은 변할 수 있어도 민족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속일수는 있으나 기록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밝혀질수 밖에 없다.

일곱째: 한반도만을 우리민족이라고 고집한다면 장차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될수 있다.

1).
중국의 사서는 『사기(史記)』에서 『당서(唐書)』까지는 동이족(東夷族)으로 『송사(宋史)』이후는 외국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안(長安)중심의 한족들은 『사기』에서 『당서』까지 遼()중심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東夷라고 기록했고 신라 이후 『고려사(高麗史)』부터는 외국(外國)으로 분류하여 기록했다는 이야기다. 왜 갑자기 동이전이 외국전으로 분류되었을까 ?

동이의 대부분은 한족화 되었다는 생각과 동이의 역사를 반도로 밀어 내므로서 황해 서쪽을 하나의 외국민족으로 보면서 하나의 통치권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생각이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것이다.

인디언이 영어를 배운다고 유럽인종이나 유럽인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형성한 이후 東夷가 동화 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결코 중국민족으로 바뀔수는 없다.
민족은 영원히 동이로 머물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조선족 이라 한다면 동이족에서 분리되고 말것이다.
그렇다면 동이족의 방계역사는 우리역사라 할 수 없고
가승과 같은 조선족의 직계 이외는 우리역사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조선족 또는 한민족이라하여 동이족에서 분리한 신생민족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역사를 찾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동이족의 역사를 복원 할 것인지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
한민족이라고 주장하면 1945년 독립민족이 되고 그 이전은 漢族의 일부로 볼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2).
고려(高麗) 이전 삼국시대의 기록중 『사기』에서 『당서』까지 대부분의 동이전 역사를 중국에게 주어야 한다. (고조선, 사로신라, 백제, 가라, 기록은 중국에 주어야 한다.)

우리가 압록강, 두만강, 이남에 있는 조선국민의 후예만을 민족으로 본다면 조선강역보다 광대한 강역을 가졌던 삼국 기록중 한반도를 제외한 동이전의 기록은 우리조상들의 역사라고 주장할수 없고 인용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만약 중국이 동이전의 기록을 모두 그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모두 다 돌려 주어야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반도 기록이 아님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시대를 조명한 모든 기록을 토대로 강역을 찾아서 정리하던지
아니면 역사를 반도에서 조선족으로 부르기 시작한 이후 독립민족으로 남든지해야 하므로
심사숙고하여 사서를 보고 삼국시대를 정립해야 한다

"
우리 스스로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말보다 동이(東夷)라는 민족명칭을 사용하여야 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민족사(民族史)를 연구할수 있게 젊은이들에게 많은 지원을 하여야 하며 홍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 가승 (家乘) : 한 집안의 역사적 사실을 적은 책. 족보나 문집 등.


다음시간에 계속 ~

<
송준희 드림 >


※ (참고) 본 사이트가 송준희님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한퓨쳐 / coo2.net 송준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