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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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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오재성 선생님이 네티즌 여러분들의 질의에 답변한 내용을 모아서
올려드립니다
대부분 중복된 질문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오고있습니다
왠 만한 질문들은 한번이상 답변이 된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일이 제때 답변을 드려야 하나 운영자 본인이 직장인임을 감안하시어
방문하시는 네티즌 여러분들이 검색을 활용하시어 먼저 의문사항을 찾아보신 다음에
질의를 하여주신다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물론 그냥질의 하셔도 무방함을 알려드립니다
질의 답변내용을 지속적으로 요약하여 올려드리겠습니다
(총 500여개의 답변을 연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운영자 송준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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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 선생님과 네티즌과의 답변모음 (3)
< 목 차 >
1. 후백제의왕 견훤의 이름.. '견'과 '진' 그중에서 진이 바람직
2. 고조선에서 한씨가 통치했다는 기록은 찾을수 없음
3. 백제와 위나라간의 전쟁은 규모가 상당한 전쟁
4. 서울에 있다는 백제 무덤이 진짜 백제무덤?
5. 한국인의 민족에 대한 교육의 재검토
6. 현도위치에 대하여
7. 제나라와 백제위치
8. 북위와 고구려의 경계에 대하여
9. '우리민족의 명칭, 그리고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10. 동이족이란 말과 한민족이란 말의 사용은?
11. 국사 숙제로 응신천황에 대해서 인물탐구를 하려고 하는데요.
12.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
13. 중국에 있던 삼국과 한반도 모두 구리를 기준으로 할때 하나다
14. 고려 인구에 대한 것은 송사에 210만구로 기록
15. 고려인구와 조선인구
16. 우리의 환웅 치우를 중국에서 중화삼조상에 포함하고 있었다
17. 고대식인 행동순서식과 강제식인 중화식 언어습관
18. 야사와 정사의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연구와 이것이 하나되는 연구가 필요
19. 인구로 본 우리역사
20.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김부식이전에 한반도에는 없었다
21. 고구려 백제가 남으로 오월 - 최치원 신라
- 북으로 유연제노
22. 강희 강남 월주 장주 천주의 위치에 대하여
23. 백제땅이 발해땅에 된 지역을 찾아야 발해사를 모다 폭넓게 볼수 있다
24. 한자가 우리고유의 글인가 ?
25. 역사연구에서 방법론 ?
26. 독립과 광복-8.15를 맞이하여 용어를 생각하자
< 질의 / 응답내용 >
1. 후백제의왕 견훤의 이름.. '견'과 '진' 그중에서 진이 바람직
후백제왕 견훤의 성에 대한 의문이 있으신것 같습니다
'견'자의 발음에 대하여 자전에서는 '진'과 '견' 2가지
발음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성씨를 발음할때 어떤 발음이 있었는지 상고할수는 없지만 견은 '개견'자와 발음이 같은니 성씨로 불렀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자전에서 진훤으로 발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진원왕의 본래 성씨는 '이씨'였는데 후에 변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분의 행적에 대한 것은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것입니다
2. 고조선에서 한씨가 통치했다는 기록은 찾을수 없음
우리역사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여러번 사용하다보니 국호앞에 성시를 붙이게 된것이 바로 삼국유사에서 유래하는 기자조선 위만조선입니다
기자조선을 한때 한씨조선으로 변경하여 가르친 역사서가 있었습니다
단군조선이니 하는 고조선
그리고 기후에 의해서 통치되던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에 의해서 통치되던 위만조선
그리고 현재의 북한
앞으로 역사를 배울대 혼돈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구별해야 되는지를 생각해 볼때 입니다
1조선 2조선 3조선 4조선이라고 할수도 없고 첫번째조선 두번째조선 세번째조선 네번째조선할수도 없으니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시다
일연도 고민하다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삼국유사에 기록했을 것입니다
국호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우리역사 전체로 볼때 흐름을 흩으리지 않고 첫번째의 고조선 두번째의 기자조선 세번째의 위만조선을
대채할 방법을 무엇이 좋겠다고 봅니까
고민해 봅시다
3. 백제와 위나라간의 전쟁은 규모가 상당한 전쟁
백제와 위나라 전쟁에 대해서 교과서에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위나라가 침입하였으나 물리쳤다고 하고 있으나 남제서 백제전에는 위나라 수십만 군사가 침범하였으나
백제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이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사에서 다루지 않는 것은 물리친 것이 창피해서인지 알수가 없네요
4. 서울에 있다는 백제 무덤이 진짜 백제무덤?
석촌동에 백제무덤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백제능이라고 할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추증하고 있는것 뿐입니다
그러나 돌무덤은 만주의 것과 닮은꼴입니다
무덤에 백제를 붙이지 말고 역사서를 정리하고 이름을 붙여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5. 한국인의 민족에 대한 교육의 재검토
조선시대에는 조선인을 민족이라고 하였고 대한제국에서는 대한인을 민족이라고 하였고 대한민국에서는 한반도에서 살던 조선인의 후예를
민족이라고 하였다 삼국인의 후예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 현재 교육되어진 우리민족의 개념이였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인쇄술이 발달되었다고 가르치고 송나라 4대발명품중에 인쇄술이
포함되는 어쩌구니 없는 역사교육을 배웠다
민족개념을 좀더 바르게 배웠다면 그 사상은 좀더 넓어졌을 것이다
교과서와는 다르지만 사서는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우리는 고조선이 최초의 국가로 배우고 있으나 중국25사와 삼국사기와 야사를 종합하여
공통부분으로 고조선 이전에 구리(구려)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구리'라는 나라의 '구'는 자연수에서 최고의 수이고 리(려)는 시작을 나타내는 '동틀려 자'를 사용하고 있고 그 시대 백성은 묘라고 하여 뿌리내림을 나타내고 있다
바로 국호와 백성의 호칭이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그 이전에도 사람은 살았고 그 이후에도 사람은 존재했다 그러나 시작이라는 의미로
집단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민족이라는 역사적인 개념으로 묶기 시작했다고 할수 있다
즉 지금 어떤 단체를 시작했다는 것과 같은 이치로 받아들일수 있다
구리라는 나라의 후예들이 사방에서 내가 최고라고 하면서 서로 국가를 달리 독립하려고 하다보니 민족이 다른것처럼 나타내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아시아에서 구리 이후에 조선이 그리고 서쪽에서 주나라가 건국되고 진한이후에 동서가 대립하면서 다른민족인것처럼 교육되어지고 같은
뿌리의 후예들이 다르게 교육되어 졌다
이제라도 최초의 국가를 구심점으로 역사를 재교육하고 역사를 바르게 배운다면 우리민족에 대한 자긍심으로 살아갈수 있을것이다
호주나 뉴질란드의 원주민 마오족이 바로 구리 백성의 명칭인것을 안다면 결코 우리와 다르다고 말하지 못할것이며 그러한 민족개념으로
우리역사 기록을 바로 연구하고 후손에게 바르게 전수시킨다면 현재와 같은 회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를 바르게 잘못된것이나 잘된것이나 진실되게 가르친다면 우리의 후예들은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게 될것이다
그러나 바르다는 것의 가치기준을 역사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바른 역사가 그만치 중요한 것이다
새롭게 우리역사를 연구하고 자긍심을 같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6. 현도위치에 대하여
한나라의 군현에서
낙랑군은 에의 서쪽이라는 문장에서 위치를
요동군은 요동 요서를 나타낸 지명으로 연구할수 있고
대방은 요동군과 석문에 의하여 그 위치를 파악할수 있으나
현도에 대해서는 그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재 후한서에서 서기121년 전투 상황을 보면 유주자사 현도태수 요동태수의 기록이
있고 현도와 요동지역에서 전투를 하였고 지명으로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이 있고 고지도에서 유주와 광양 북평이 있으니 이로 미루어 짐작하여
보는 현도의 위치로 그렇게 그리게 된 것입니다
현도군도 49년 한과 고구려, 654년
당과 고구려전쟁지명이 있는 지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연구해 볼 일입니다
7. 제나라와 백제위치
맥제인 백제의 위치가 산동성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백제가 건국되기 이전에 제나라와 노나라땅이었다고 하는데 제나라와 노나라는 공국이지 왕국이 아닙니다만 제나라가 산동성을
있었다고 하여도 공국이므로 전체의 제국과는 별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고조선은 서기전11세기 주와 조선의 경계는 서화를 경계로 나타나고 연나라와 경계는
태행산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위만조선과는 하북성북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준은 위만에게 조선을 빼앗기고 기자가 살던 옛땅으로 복귀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연구를 하여 좋은 결과를 얻도록 노력 할것입니다
8. 북위와 고구려의 경계에 대하여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만주에서 건국하여 한반도의 북부로 확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25사 동이전에서 동이 각국의 위치배열도와 동이전 지명을 삽입하면 동이각국의
남북축은 한반도의 남북이 아니라 중국 산서성 요중심의 남북이 남북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위치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중국25사동이전의 공통부분으로 연구를 하면 더욱 이상하게 됩니다
즉 49년 고구려와 한의 전쟁지명과 654년경의 고구려와
당의 전쟁지명이 태행산맥의 동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 두 시기에 나타난 지명이 요하의 동쪽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현재의 지도에서 나타난 고대지명으로 본 고구려의 위치는 상당히 다릅니다
백제도 25사와 삼국사기를 종합하여 보면 온조왕의 건국부터 의자왕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아닌 산동성 중심의 국가로 보여집니다 물론 사로신라도 그 이남으로 보야지고 있습니다
한편 한반도는 32년에 낙랑국이 고구려에 패망하면서 한반도북부는 고구려의 직할지가
되고 한반도남부는 고구려간(한)지로 있다가 503년에 신라가 독립하여 631년 이전에 광령 철령 길림
이남을 통치하는 국가로 성장하여 고구려와 고구려장성을 동서로 하여 대치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질의하신 조양과 해성에 대한 지역은 신라의 서북쪽지역이고 고구려로 보아서는 한반도까지 차지할때는 중앙지역이고 반도에서
물러난 시기에는 동쪽이 됩니다
북위와 고구려 국경을 명확하게 그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위와같은 내용을 가지고 우리삼국을 동이전과 공통부분으로 나타내다보니
그렇게 그려졌습니다
북위와 고구려위치는 고구려는 지금의 하북성 중심으로 보여지고 북위는 산서성의 북부지역이 중심지역으로 보여집니다만 중국25사에서 북위에 대한 자료와 고구려자료를 연구하면 수정되리라 믿습니다
다만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신라를 중심으로 그리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더 연구해서 좋은 결과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씨의 묘비만이 문제가 아니고 무구검비도 문제입니다만 우리와 중국역사지도에서는 고구려의 패망을 요하의 동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지명이 태항산맥의 동서에서 발견되게 25사가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연구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왜 그러한 유물이 그곳에 있는지도 연구를 해보아야 할것입니다
조양과 해성 근처는 지금까지 연구된 것으로 보면 고구려와 동신라의 국경지역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삼국의 위치변화를 나타내다 보니 그렇게 그려졌으므로 자세한 연구를 더 하여 바르게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유적이라는 것은 얼마나 진실을 말해 줄까하는 의문도 가져봄직한 사건은 현재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경계 지역에 구천동이
있고 그 입구에 나제통문이 있는데 이것이 신라와 백제의 경계라고 하고 있으나 그 굴은 일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통로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부여에는 백제 패망에 대한 당평백제비가 2개가 있습니다 왜 같은 시내에 2개가 필요합니까
유물과 유적에 대한 것은 사서에 의해서 정리된 상태에서 증명되는 것이지 결코 만능으로 채택하는 것은 신중히 연구해 볼 일입니다
더 연구하여 바르게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9. '우리민족의 명칭, 그리고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우리역사에 대해서 어떤 토론이 가치있는 결과를 얻을수 있을까요
맨 처음 생각해 보는 것은 이름입니다
우리민족의 명칭을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대한민국 시대에는 '한민족,
대한제국 시대에는 '조선족'
조선시대에는 '조선족'
고려시대에는 '고리족'
삼국시대에는 기록에는 '동이족으로 기록' 스스로의
기록에는 '묘의 후예 즉 구리나라백성의 후예'
분명히 우리민족의 명칭이 국가명칭에 의해서 변경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이름은 새롭게 지어져도 성은 변경되지 않는데 민족명칭이 달라질수는 없을 것이고 국호변경이 의해서도 달라진다는 것도 이상하구요
우리민족의 명칭에 대해서 가장 초보이고 기초이므로 토론해 보시는 것도 의미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가장 순수하고 가치있는 기회로
여겨집니다
10. 동이족이란 말과 한민족이란 말의 사용은?
한민족이란말의 사용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사용한 이후로 보여지며 그 이전 사용된 예는 찾을수가 없습니다
우리민족 역사를 나타내는데 중국25사에서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를 나타내는데 동이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동이의 역사를 우리 선조의 역사로 배우고 가르쳐 왔습니다
고조선을 동이의 최초 국호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고조선 이전 구리라는 나라가 있고 리는 동이의 국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기이전의 기록으로 보여지는 장자 이루편에 서이와 동이의 기록이 보입니다
민족명칭도 성씨의 개념과 같이 최초의 시작을 찾고 최초를 기준으로 하는 역사를 바로 쓴다면 우리는 동이족 보다는 구리를 기준으로
하는 민족사를 정립해 보는 것이 어떨런지요
11. 국사 숙제로 응신천황에 대해서 인물탐구를 하려고 하는데요.
국사숙제에 응신천왕이라 정말 궁금합니다
국사는 일본국사인지 아니면 한국에서의 국사인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한국사에서의 국사에는 응신천황은 없습니다
응신천황이란 말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를 자기들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일본의 국사에서는 일본서기를 보고 대답하면
될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보면 홍수가 우리나라보다 많고 태풍이 우리나라보다 많고 지진이 우리나라보다 많은 일본열도에서 그러한 자연현상의
기록이 그의 없는 사서에 쓰여진 응신천황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일본서기의 일식집중관측지가 일본열도가 아닌 양자강 이남으로 나오는데 그래도 일본열도의 기록으로 보면서 일본서기의 응신 기록을
믿어야 되는지
아무튼 한국사에서 응신이 없는데 국사숙제라니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12.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
한국인에게 역사는 없는가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에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말을 하느냐에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만을 고집한다면 대한민국 건국이후를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이전에는 조선족역사로 그 이전은 고리족 그리고 그 이전에는 동이족 역사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성씨의 시조 이전에도 인간은 있습니다 그러나 시조를 기준으로 성씨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사가 아닌 성씨를 기준으로
역사를 씨족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준을 고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서에서는 그이전 구리라는 나라가 있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한국이 아닌 고조선이나 구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기록된 역사와 배운역사는 많은 차이를 드러낼것입니다
고조선이나 구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아시아에서는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닌 기준시대 명칭으로 말하여 역사를 정리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것입니다
기준시대 구리 또는 고조선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여도 아시아의 주인이며 한반도만을 나타내는 한국사에서 머물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형문자의 제작, 나침반, 인쇄술 등
아시아의 문명 그리고 문화발달사는 우리선조들의 업적입니다
13. 중국에 있던 삼국과 한반도 모두 구리를 기준으로 할때 하나다
당나라에도 왜도 없었다는 아시아 유일의 신라명절인 한가위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내고 건강하게 다시 만나게 되길 빕니다
중국에 삼국이 있었다고 하니 한반도와는 관계가 없을 것이 아닌가 아니면 언제 한반도로 왔는가 하는 의문이 많을수 있습니다
황제 헌원이 소전이라는 제후의 아들이었을때 구리에는 치우천자가 있었다
구리시대를 나라 이름을 기준으로 또는 구리의 백성 묘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역사는 전승되어 왔습니다
구리시대가 끝날무렵 한무리는 조선이라는 국호로 뭉치고 다른 무리는 하라는 국호로 뭉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란 나라로 뭉쳤던 그들이 북부여 낙랑국 2번째조선으로 분열할때 하나는 나라로
뭉친 무리들은 다시 주라는 나라로 뭉쳤다가 진과 한으로 뭉쳤습니다
북부여는 고구리로 전승되고
낙랑국으로 뭉쳤던 나라는 고구려에 병합되면서 고구리일부가 된 한반도
2번째 조선은 위만조선이란 3번째 조선과 예와 한과 왜로 요 중심의 동쪽에서 주
진 한 무리들과 대치헤 되었습니다
고구리는 북부여 및 2번째 조선지역 그리고 낙랑국지역을 통합하여 구리시대를 재현하게
되었고 구리의 나라이름을 계승하여 고구리로 한것으로 보여집니다
2,3번째 조선지역에 있던 사로신라와 백제, 고구리연방속에서 동행한 백제신하가 광복한
백제군을 데리고 고구리별도지역에 있던 공주 부여지역으로 침투하였다가 별도지역의 아랫부분이 독립한 신라가 되고 한반도와 만주까지 확보함으로서
물러나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시아인은 구리시대를 기준으로 한 백성의 후예들이 각지역에서 분리하여 살아왔을뿐인데 후인들이 국가중심사관으로 정립하다보니 다른민족처럼보이게
된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기준을 어디로 하는가에 따라 사관이 다르게 되며 생각도 깊게 됨니다
환웅시대 즉 구리시대와 그 시대 백성 묘를 기준으로 우리역사를 복원해 봅시다
14. 고려 인구에 대한 것은 송사에 210만구로 기록
고려인구에 대한 것은 정확하게 밝혀진것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송사에 의하면 210만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인구도 조선 초기에 비하면 3배 이상입니다
15. 고려인구와 조선인구
고려와 조선인구에 대해서는 다음을 소개합니다
고려인구는 송사에 210만구로 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사료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선인구는 조선왕조실록과 총독부 조사를 망라한 인구조사표가 있습니다
(한국통계발전사)-통계청에서 발간
그런데 이곳에는
1393 태조2년 301,300구 양계누락
1406 태종6년 370,365구 한성부누락
1440 세종22년 692,475구
1654 효종5년 2,047,261구
이때와서야 고려인구와 비슷하였는가?
1519 중종14년 3,745,481구
1669 현종10년 5,018,744구
1735 영조11년 6,882,042구
1910 융희4년 13,313,017구로
조사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진일본란이전에 10만양병을 하지 못한 것은 왜일까요
고려는 전쟁을 했다하면 20-30만병을 동원하였는데 말이니다
인구변화에 대한 추측보다는 사료를 검토하시기 바람니다
16. 우리의 환웅 치우를 중국에서 중화삼조상에 포함하고 있었다
치우학회에서 치우유적탐사를 했는데 탁록에 가니 이미 염제 황제 치우를 사당에 모시고 중화삼조당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삼조상을 형상화하여 도시의 한복판에 만들었다
중화민족으로 다듬고 있는 것이다
치우는 우리역사기록에서 14대 환웅이라고 한다
우리는 역사적 기록을 바로하여 전통을 바로세워야 할텐데
아직도 단군에서 머뭇거리고만 있으니 어찌할꼬
능이 있고 고구려가 국호를 계승하듯 신라가 그백성을 기준으로 하였듯이 우리는 바르게 정리해 전수해야 할것이다
17. 고대식인 행동순서식과 강제식인 중화식 언어습관
우리언어 사용방식은 고대에서나 있음직한 방식이다
행동의 순서 시차의 순서이다 그러나 중국어는 현재 영어식이다
그런데 중국25사를 보면 현재 중국언어 사용방식보다는 고대언어 사용방식으로 풀이하면
더 많은 부분이 쉽게 풀이가 된다
그렇다면 언제 그렇게 중국언어가 고대식에서 현대식으로 변경되었을까
당서까지는 고대의 방식이 통한다 그렇다면 꼭 한나라때 변경된 것으로 보기는 쉽지 않다
다만 추측해보건데 중국언어방식은 통제식이라고 볼수는 없을까
하지마라 무엇 무엇을---
먹어라 무엇 무엇을 ----
동사를 목적어보다 먼저 인것은 통제의 수단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이로보면 진시황 이후 시작하여 당나라때에 성행하고 송나라때 완성된 것은 아닐까
현대의 중국언어 활용방식은 자연적인 고대방식에서 중앙집권시대 방법이 정착된것은 아닐까
아무턴 중국 고대문헌이 현재 중국어를 배워도 풀기가 어렵다는데는 이의가 없으니 두고두고 연구해볼 문제인 것이다
18. 야사와 정사의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연구와 이것이 하나되는 연구가 필요
역사를 연구하는데 사서를 보는 방법에도 여러가지 시각이 있다
우리같이 삼국사기도 취사선택하는가 하면 야사는 무조건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정사면 무조건 믿는 사람도 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여러가지 시각에서 방향을 돌려보자
즉 정사와 야사 및 유적을 모두 인정하고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으로 정리하고 전체가 우리역사이므로 하나되는 역사를 정리해 보는
것이다
소위 재야에서는 보는 한단고기 규원사화를 소위 강단에서 배척하고 또 강단에서 인정하는 정사를 재야에서 취사선택한다면 정리하는
자세가 아닐것이다
어떤 것이던 그 시대를 나타내려고 했을 것이므로 모두 인정하는 바탕에서 연구를 하였으면 보다 좋은 결실이 맺어지리라 확신하면서
권하고 방법이다
19. 인구로 본 우리역사
인구로 본 우리역사연구는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조선의 인구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일제시대 근대적 인구조사를 모두 조사하면 합리성이 있다고 할것입니다만
조선 초기인구가 백만이 안되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고려때 인구가 2백10만이라고 하였으니
더욱 이상할 것입니다
물론 삼국시대 인구연구도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인구로 보면 전혀 이해가 가질 않을 것입니다
1491년 명나라 초기 산동성인구가 77,555호에 6,759,675명인데 1998년 산동성인구가 8872만명이라고 합니다
조선초기 인구가 백만이 안되는데 현재 6000만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숫자가 잘못됐다고 하지만 인정하고 보면 그에 일치되는 지역을 찾아보아야 할것입니다
인구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종합적으로 그 시대를 다시 살피고자 하는 것이니 다른 사항과 연계하여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20.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김부식이전에 한반도에는 없었다
장보고가 청해진대사를 하였을때 정연은 사지연수에 있었다
사지연수가 신라땅인가 아니면 당나라땅인가
삼국이 중국에 있었다고 하는데는 신라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신라방이 있었다고 배우고 있으나 치우천자와 기자가 살땅에 세웠던 사로신라의 위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로신라는 663년 당나라의 계림도독부가 되었으니 현대적 해석으로 하면
당나라의 지방 자치국으로 보여지는 신라 지역으로 보여집니다
정연과 장보고시대에서 김부식까지는 이순신과 현재까지의 기간과 비슷합니다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 한반도에는 하나도 없고 일본열도의 기록을 인용한다 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부식은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들어보지 못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보고와 정연의 기록은 중국에 있는 문헌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아울러 장보고와 정연의 위치는 치우와 기자가 활동하던
지역에 있었으니 사지연수도 기자가 살던땅에 세워진 신라의 기록으로 보아야 할것이니다
단지 사지연수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당나라 지명으로 보여질수도 있으나 역사전반적으로 검토해보면 배워온 지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치우와 기자가 활동했던 지역에 사지연수가 있으니 전체적인 바탕위에서 재검토하여 주시기 바람니다
21. 고구려 백제가 남으로 오월 - 최치원 신라
- 북으로 유연제노
백제 신라 가라 왜가 중국에 있었다고 할때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대에
강병 백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들다'라는 것을 많이 인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고 가장 분명한 지역을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연제노오월 지역에는 삼국시대 지명이 있고, 그 시대 조공일정이 한달이고, 신라의 고유풍습이 남아있고, 조공특산물의 생산지역이고, 삼국일식집중관측지가 그곳에 있습니다
삼국시대 인구에 의해서 합당한 지역을 찾다보니 위 지명 지역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역사의 맥입니다
백제인이 신라인이 중국으로 진출해서 있었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자도 조선에 살았다고 했는데 살다가 묻힌곳도 그 곳이고 환웅인 치우의 무덤도 그곳에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위지명이 있는 곳에는 동이열전에서 위치배열도에 각국 지명을 삽입하여 맞추면 일치됩니다
그렇다면 치우나 기자나 백제 신라 가라 왜를 기록한 동이전과 일치되므로 공통부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중국25사 그리고 삼국유사의 일치되는 것을 소개하고 있으니 흑과 백을
논하시지말고 재고 재삼 사색을 해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긴것으로 볼수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삼국사기는 1500년대의
기록을 보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더 연구를 하여 합리적인 방안을 강구해 봅시다
22. 강희 강남 월주 장주 천주의 위치에 대하여
연나라는 태항산맥 서쪽 즉 선서성 북쪽에는 연나라 남쪽으로 진나라가 있었다
월주는 잘강성 지역을
강남은 강수로 불리던 양자강 이남을
천주 장주는 복건성의 지명이며
강회는 하수로 불리던 황하 이남이며 강수로 불리던 양자강 북쪽에 회수지역을 말한다
23. 백제땅이 발해땅에 된 지역을 찾아야 발해사를 모다 폭넓게 볼수 있다
우리는 지금도 사서 내용을 취사선택하려고 합니다
분명히 당서 구당서 삼국사기에서 백제가 패망하고 그 땅을 신라와 발해말갈이 차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거짓의 기록으로 치부해서야 어떻게 역사연구를 하겠다는 것일까
분명한 기록이 있는한 어떻게 그런 기록을 할수 있을까 필자의 위치로 되돌아가보는 연구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남제서에서 백제는 현재의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에 태수를 임명하고 다스렸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다 물론 삼국사기는 더 있지만 믿으려
하지 않으니 남제서 백제땅은 밝혀 볼 필요가 있다
백제가 그곳에 땅을 차지 하고 있었다면 그 땅을 발해가 차지한 것으로 보면 백제땅이 발해 땅이 되었다는 의문은 풀리지 않겠는가
한반도 서남부 충청도와 전라도만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풀수 없는 것을 위와같이 생각해보고 그 답을 찾도록 노력하면 될것이 아닌가
요사 지리지를 살펴보면 하북성 지역의 요나라땅이 발해 땅이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니 요사와 남제서를 함께 풀어보면 답을 나올것이
아닌가
당서에서 천친교를 지나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당서에서 발해가 등주를 평정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등주는 청하 성양과 가깝다
발해땅이된 백제땅을 찾아보면 발해사연구에 도움이 될것이다
감사합니다
24. 한자가 우리고유의 글인가 ?
한자가 우리고유의 글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먼저 우리의 정의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인만을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조선의 후예 모두를 우리라고 하는지가 먼저 정해져야 하니다
현재 한국인의 우리는 근세조선 백성의 후예만을 우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으로 정명되는고 하니 고구려 발해는 우리역사라고
하며 그들의 후예중에 만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여진족 또는 만족이라고 하니 현재의 우리는 세종대왕때 백성후예가 우리라는 말로 되고 있으니
이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당연히 한자는 우리글이 될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만들었다고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갑골문이 만들어 졌을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고조선 고구려 기씨조선 위만조선 예 한 백제 가라 신라를 우리역사라고 하고 장안중심에서 위 각국을 동이의 나라로 기록하고 있고
순임금도 동이이고 헌원은 순의 7대조이니 아시아에 동이밖에 없는 것으로 되니 당연히 한자는 우리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라는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우리고유의 문자인가를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갑골문이 발견된 곳은
치우천자가 활동하던 지역이고
고구려 백제의 유연와 오월사이에 있고
신라의 독산성 석성 석문과 동성 잠산 도산 사이에 있고
백제의 석문 평원 황산 백마하 주류성 동성 잠산 덕안과 진성고 평 사이에 있으니 치우때부터 백제말까지 같은 동이의 지역이니
여러분은 어?F게 정의 할것인가
생각을 해봅시다
25. 역사연구에서 방법론 ?
역사연구에서 사료의 선택은 매우 신충하지 않으면 안됨니다 그렇다고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취사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장쉽고 재미있게 연구하는 방법은 모든 사료를 다인정하고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으로 정리해보는 방법입니다
일정한 용어를 연구해도 좋고 일정한 사건을 연구해도 좋고 무엇이던 모든 사료를 종합적으로 보기 위하여 연구하는 목적에 대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으로 정리해보면
같은 용어인데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사용된 것도 발견될수 있고 같은 사건인데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나 여러가지
이상한 부분이 발견될수 있습니다
한단고기를 위서다 아니다 논란에 휘말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사와 비교하여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으로 연구하면 될것입니다
삼국사기와 중국25사와 한단고기와 삼국유사에서 공통부분으로 연구해도 단군이전 치우
환웅때까지이니 치우때부터 삼국시대까지 공통부분과 비공통부분으로 정리해보고 공통부분에 대하여 다시 연구해보면 한단고기가 어떻게 평가가 되는지
느끼실 것이며 왜 우리역사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고 하는지 짐작할수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연구는 내가 판정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자료를 정리한다고 생각하고 연구를 해보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재야사학자라는 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용어가 아닐까요
학교 강단에 계신분들 이외는 재야라고 하니까요
역사연구에는 강단과 재야의 구별이 있을수 없는 것이 아닌지요
26. 독립과 광복-8.15를 맞이하여 용어를 생각하자
며칠있으면 8.15를 맞이하게 됨니다
일본열도인의 침략으로 인하여 자주권의 상실로부터 벗어난지 50년여년이 지나도 아직도
정립하지 못하는 단어가 독립과 광복이다
일제시대에는 독립과 광복을 혼돈하여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복을 하고 유구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도 독립과 광복을 혼돈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 할수가 없다
독립이란 단어는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서 독립이란 단어의 사용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독립이전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보통 서양의 여러나라에서 사용되었던 말이다 그리고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그들은 유구한 역사가 없기
때문에 독립이란 단어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일본열도인의 침략시대는 아주 미미한 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일제시대 이전의 우리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광복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로 조선과 고려 삼국 그리고 조선 구리 시대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8.15이후에 독립이란 단어를 사용된다면 우리는 스스로 역사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과연 역사가 짧아서 독립이란 단어 밖에 모르는 서양식으로 사용할것인가 아니면 유구한 역사를 계승하는 우리민족에 알맞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지 한번쯤 생각하고 사용되었으면 한다
한국방송공사를 비롯한 방송 사용어에서 지금도 독립이란 단어가 거침없이 사용되는 현실에서 유구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것인지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보고 사용되어야 할 단어이다
그 시대만을 사용할때는 광복(독립)운동이라고
할수도 있으나 우리가 그 시대를 나타낼때는 광복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것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는 독립과 광복이란 단어를 무의식으로 혼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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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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