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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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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오재성 선생님이 네티즌 여러분들의 질의에 답변한 내용을 모아서
올려드립니다
대부분 중복된 질문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오고있습니다
왠 만한 질문들은 한번이상 답변이 된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일이 제때 답변을 드려야 하나 운영자 본인이 직장인임을 감안하시어
방문하시는 네티즌 여러분들이 검색을 활용하시어 먼저 의문사항을 찾아보신 다음에
질의를 하여주신다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물론 그냥질의 하셔도 무방함을 알려드립니다
질의 답변내용을 지속적으로 요약하여 올려드리겠습니다
(총 500여개의 답변을 연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운영자 송준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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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 선생님과 네티즌과의 답변모음 (4)
< 목 차 >
1. 교과서 왜곡을 바로 잡으려면 우리가 먼저 연구해야
2. 시대별 왜와 일본에 대한 연구를 합시다
3. '이'와 '철'
4. 백제의 최대영역은 연구해 보아야 할것입니다
5. 고려사에서 추허조
6. 우리역사 복원은 왕조사보다 구리후예 즉 민족이 하나되는 기술방법을 찾아봅시다
7. 신라에서 이두는 중국에서 백화문자 및 영문발음기호 사용과 같은 이유??
8. 사로신라와 분쟁한 왜는 황해 동쪽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임
9. 흑치상지의 흑치는 빈랑이라는 열매로 인한 특징--한반도나 일본열도의 산물은
아닐것
10.사마왕과 무령왕을 더 연구해보자
11. 사로신라 수도 금성인 경주와 동신라 수도 서라벌이던 경주를 비교 연구???
12. 고조선 이전에 국가는 구리가 정사에서 기록된 최초의 국가이다
13. 기준을 신라로 잡는다고 신라 이전이 지워질수 없다
14. 정통성 시비 보다는 민족 기준이후는 하나의 민족으로 역사정리
15. 동신라쪽에 있던 낙랑국과 사로신라 백제 위 한사군의 일부였던 낙랑군
16. 사로신라와 동신라에 대하여
17. 사마왕능과 무강왕은 백제사 전체에서 풀어야 할 숙제
18. 성왕때 신라와의 전쟁에 모순-두신라의 역사를 연구해서 밝혀야 할 사항
19. 삼국 대륙존재글은 사서의 기록을 소개하는 것
20. 기자가 조선땅에 살았다고 하니 그 땅까지가 조선이다
21. 장안중심국가에서 삼국왕에게 내려졌다는 작호도 2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22. 후삼국연구를 좀 해주세요
23. 역사스페셜은 현재의 국가사관으로 조사 방영되는 것으로 봄
24. 한반도민을 우리민족이라고 하면 그 기준은 언제로 해야 하는가 광복민족은 만들수 없다
25.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기준후예는 하나의 민족사로 정리해야 한다
26. 고구리 땅 영평은 고지도에서 현 북경유역으로 표기-패망때도 이곳에 있었다
27. 야사를 비판하기 보다는 비교연구가 바람직하다
28. 관산성전투에 대하여-여러 기록을 검토하여 연구하여 보시기 바람
29. 서신라와 동신라는 인문과 자연을 정리하여 공통부분의 서신라와 비공통의 동신라로 구분
30. 가야 또는 가라는 어디에 있는가 - 김유신과 백제 전투지명이 존재하는 지역 ?
< 질의 / 응답내용 >
1. 교과서 왜곡을 바로 잡으려면 우리가
먼저 연구해야
일본열도의 역사교과서 왜곡의 근본을 파해치기 위하여 임나일본설에 대한 연구자료를 부탁드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자료는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묻지 말고 우리가 연구한 것을 먼저 검토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일본열도인은 임나와 가라가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사강목을 제외한 어떤 기록에서도 같은 것으로 기록된 것은 없습니다
임나와 가라가 같지 않다면 당연히 임나의 위치를 연구해야 될것입니다
일본열도인들은 임나를 한반도남부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잇습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 일식관측지연구에서 보면 왜는 양자강 이남에서 존재해야 그러한 관측을 할수가 있습니다 또한 25사 동이전에서 배열도에 지명을 삽입하고 지도에서 왜 위치를 살피면 양자강 이남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나도 양자강 이남에서 찾아야 할것같습니다
송나라에서 발간한 고지도를 보면 중국 전도에서 현재의 대만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송나라때까지도 대만의 존재를 몰랐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대만의 존재를 몰랐던 송나라 그 이전 과연 대만보다 동쪽에 있는 일본열도에 대해서 알수 있었을까요
분명 기록들을 믿는다면 임나에 대해서 그 위치를 연구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님을 인식시켜야 할것입니다
임나에 대한 위치연구를 올려주시면 연구에 보탬이 될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임나위치에 대한 글을 올려 주시면 다른 곳에서 많은 토론과 연구가 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하는데 도움이 될것입니다
일본열도에서 우리역사를 연구하는 분은 무척 많습니다 그래서 책도 많이 발간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왜나 임나에 대한 연구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구된 임나위치를 올려주시기를 부탁 드리는 것입니다
2. 시대별 왜와 일본에 대한 연구를 합시다
일본열도인을 왜인이라고 고리이후에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국호가 일본이지만 임진왜란이 있고 국호가 청이지만 병자호란이 있습니다
일본열도인을 삼국시대 왜의 후에로 보았기 때문에 왜인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열도에서 왜라는 국호는 1403년부터로 인식해야 될것이니다
일본열도인들은 한반도와 중국대륙 그리고 동남아에서 해류를 타고 이동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25사나 삼국사기 660년 이전에 등장하는 왜는 동이전 배열표에 지명을 삽입하고
고지도와 현지도에서 확인하여 보면 양자강 이남으로 보여지니다
이외는 진번(진파)의 동쪽에 있으므로
한의 여러 나라중에서 구로국과 비미국의 합병된 나라의 후예가 아닌가 생각해 볼수 잇습니다
즉 동이 한의 일부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와 왜는 같은 조상들의 나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일본열도에서 자기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일본서기등에서 일식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집중관측지를 연구한 결과 9세기 이전은 일식관측지가 양자강 이남으로 나타나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일본열도로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논문으로 있음)
이로보면 670년 왜라는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한 왜는 일본열도로 보기에는 어렵울것
같습니다
670년 이전 왜인 등 동이의 후예가 일본열도를 개척했다고 보아야 할것은 아닌지요
중국 동해안을 삼국부터 노략질을 한 왜구가 일본열도에서 진출했다는 것을 믿는다면 세계의 해양지배와 식민지 개척을 서양의 전유물인양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삼국사기에 주로 500년 이전에 등장하는 왜인과 동이전의 왜인 또는
왜국은 동이의 나라 또는 동이인으로서 일본열도에서 한반도와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시대별 왜인와 왜국에대한 연구를 해봅시다 그리고 일본열도와의 연관성도 연구해 봅시다
3. '이'와 '철'
동이의 이는 고문자류편에 의하면 갑골문에도 있습니다만 쇠철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보아서 이자를 먼저 사용하고 쇠철자로 사용된 것은 후에 사용된 듯 합니다
제가 철고이자야를 소개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일찌기 쇠붙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에 쇠를 붙여 철자로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치우천자가 '동두철액'이라는 문구를
남길 정도로 그 시대에도 쇠붙이를 사용하였음을 나타내고 있으니 우리조상들을 동이라고 불렀다고 보아서 소개한것입니다
동이라는 기록은 장자 이루편에 등장하고 있는데 25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는데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국가라는 뜻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하다보니 중국25사 동이전에 의하여 우리민족의 명칭을 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람니다
그러나 삼국 이전은 과연 어떻게 우리민족의 호칭을 불렀을까요
동이나 동철로 불렀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역으로 보면 코리아 고리 고구리 그 이전은 치우천자때 국호 구리까지 올라가서 생각해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라 나 변한의 기록으로 보면 묘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리와 묘는 어떤관계인가
구리는 치우천자때의 국호이고 구리때 백성을 묘라고 하였음을 '예기'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호는 하나이고 백성은 다수이므로 통일을 하려면 당연히 하나로 해야 하므로 국호 구리를 민족 명칭으로 함이 바람직할것입니다
이와 철에서 동이나 동철 어느것이 타당성 있는가는 무의미 하다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자로서도 철을 사용하였음을
나타내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지만 문자연구는 문자연구자에게 맏겨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나타난 기록중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역사연구를 하고자 합니다
더 연구해 보도록 하겟습니다
4. 백제의 최대영역은 연구해 보아야 할것입니다
백제의 최대 강역을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동성왕때 10년에 북위의 10만병의 침략을
물리쳤습니다
이때 요서에 있는 진평2군을 차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진평2군은 요의 서쪽 즉 태행산맥의 서쪽에 있는 진성과 고평으로 보여 짐니다
대방이 통치자가 책계왕의 장인이었으며 대방과 석문은 신라와 당나라가 대치했던 지명이다 그렇다면 대방은 석문으로 대치하면 요의
동쪽에 석문이 있다
신라와 당나라 교역항인 당나라를 향한 도시 항성이 석문 진성 고평 남쪽에 있다
김유신을 포함한 나당 군사와 전쟁후 패망때 지명인 평원 황산 동명 백마하 주류성 동성 잠산 덕안의 지명으로 보아서 요 중심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위의 지명을 연결하면 중국 동부에서 백제의 강역을 알아볼수 있습니다
북사와 삼국사기에서 사로신라는 백제인들에 의해서 통치된 시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백제 강역은 공주 부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 일부로 보여집니다
일본열도에는 한반도에 있던 백제인들이 축출되면서 진출한 지역으로 보여지지만 자세히 알수는 없으니 연구를 더해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5. 고려사에서 추허조
고리사에서 추허조는 언제 등장하는가
태조 10년 정해 7월 무오일에 원보
재충 김락 등을 보내어 대량성을 격파하고 장군 추허조 등 30여명을 포로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대량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대야성으로 기록 되어 있다
7대 실록이 먼저 편찬되고 난뒤 삼국사기가 기록 되었는데 같은 사건에서 지명이 다른 이유는 알수가 없습니다
왕건이 왕위에 오른 뒤 10년후에 포로가 되었다고 했는데 포로 이후의 기록은 찾을수가
없습니다
6. 우리역사 복원은 왕조사보다 구리후예 즉 민족이 하나되는 기술방법을 찾아봅시다
현재의 우리역사 연구는 누가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하느냐를 상당히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신라를 계승한다고 생각하는 쪽과 고구리를 전통으로 하겠다는 쪽으로 대별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전통계승보다는 최초의 국가 구리의 백성 후예는 하나되는 그러한 방향으로 되어야 국가개념에 의한 민족분열을
방지할수가 있을 것이며
먼 훗날 구리의 백성 묘민의 후예가 하나의 민족으로 생각하고 돕고 사는 날이 오리라 믿으면서 민족이 하나되는 역사연구가 되는
것이 희망사항임
7. 신라에서 이두는 중국에서 백화문자 및 영문발음기호 사용과 같은 이유??
한자가 우리글이라면 왜 신라에서 이두를 말했을까
의문은 가질수 있습니다
한자를 중국 문자로 알고 있으며 수백년 아니 2천년 이상 사용하여 왔는데
중국인들은 백화문자를 만들었고 발음기호는 영문을 기록하고 있다
다행하게도 우리는 한자의 발음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만든 훈민정음 즉 한글로만 사용하는 바로 발음기호없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나
중국은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간단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간체자인 백화문자를 만들고 반절법 즉 절운법이 어려워 영문으로 발음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도 아시아에서 이두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주민도 바로 중국인이다
신라에서 이두를 만든 이유 그리고 그의미를 연구해 보아야 한다
8. 사로신라와 분쟁한 왜는 황해 동쪽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임
신라와 왜가 자주 접촉했다고 기록된 것은 500년 이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사로와 왜가 분쟁이 심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역사의 맥으로 보아서도
홍수의 기록으로 보아서도
조공품목으로 보아서도
일식집중관측지 연구에서도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동이위치에서도
왜는 양자강 이남 신라는 양자강 이북의 사로 즉 연해 지방에서 있었던 사실의 기록은 아닐까
연구를 해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서화 항성의 동쪽에 함산이 있고 그 동남쪽에 독산이 있다 그리고 그 남쪽에는 회계이주 담이가 있다
왜와 신라의 분쟁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의 사실로 보려고만 하지말고 사서에 그렇게 밖에 기록할수 없었던 지역을 찾아보아야 할것이다
9. 흑치상지의 흑치는 빈랑이라는 열매로 인한 특징--한반도나 일본열도의 산물은
아닐것
흑치는 빈랑이라는 열매를 습취한 결과로 인하여 성씨가 된 것은 아닐까요
빈랑이라는 과일의 특산물 산지를 찾아보면 의문점이 풀리지 않을까요
흑치상지 무덤이 있는 곳 주변에는 평원 황산 주류자 백마하 동명 항성 동성 잠산 독산 덕안이 있으나 정작 있다고 주장하여 온
한반도에는 실존한 지명은 없다
어디에 부흥군이 있었을까
연구해 봅시다
10.사마왕과 무령왕을 더 연구해보자
유적으로 사서를 입증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공주의 유적에 백제왕이라는 기록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유물에는 무령왕의 표기는 없고 사마왕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무령으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적은 살아 있을 당시에 조성된 것이 아니고 사망후 조성되는데 시호로 기록된 무령의 표현이 없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
신라나 백제의 왕계보를 분명히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직은 연구단계로서 두 나라의 계보를 확인될때까지 연구해 볼것입니다
다만 무령왕과 사마왕 그리고 무강왕에 대하여 비교하고 검토하여 도읍이 동서에 있었다는 기록과 비교하면 백제왕이 두곳에 있다고
하여 문제가 발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서와 일치되는 유적을 찾고 유적을 통해서 사서를 입증하는 자세로 연구할것입니다
어찌되었던 사후 조성된 유적에 이름으로 표기된 사마왕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 백제사 전체로 볼때 문제가 아닐까요
백제의 수도 한성과 웅진 그리고 사비를 사서와 일치되는 곳을 찾도록 노력해 보고 그래야 왕계보를 바로 할수가 있을 것입니다
11. 사로신라 수도 금성인 경주와 동신라 수도 서라벌이던 경주를 비교 연구???
신라를 사로신라 즉 광복신라와 동신라 즉 독립신라로 양분된 것으로 소개하니 신라 수도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동신라 수도로 공인된 경상도 경주의 신라 유적은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서에서 말하는 금성으로서의 위치에는 미흡하다고 봅니다
금성은 성으로 된 도읍이며 둘레가 8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경상도 경주에 과연 8리의 성유적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그리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수도인구가 17만8천9백3십육호라고 되어 있습니다
호수를 인구로 환산할때 호당 5인으로 추정하면
90만 의 대도시로 현재의 특별시를 참고할때 과연 경주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치우 천자 능이 있고 기자총이 있고 소호금천씨능이 있는 곳에도 김유신때 전쟁 지명이 있다
북쪽의 평원 황산 동명 백마하와 남쪽의 동성 잠산 독산 덕안 사이에 경주가 있었다고 고지도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 경주가 신라의
금성이라면 8리의 유적과 17만8천호의 흔적을 찾아 보고 사서와 일치되는 금성과 서라벌을 규명하도록 다같이 연구를 해 봅시다
12. 고조선 이전에 국가는 구리가 정사에서 기록된 최초의 국가이다
고조선이전에 어떤 국가가 있었는가
우리민족사가 정립된것이 없으니 우리사서로는 밝혀낼수가 없다
그러나 중국25사에 의하면 중국 즉 지나족의 시조로 기록된 헌원이 제후의 아들이고
구리임금에 치우가 있고 치우는 예날 천자라고 기록 되었으니 아시아 기록에서 고조선 이전의 국가는 '구리'만이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천자라고 하였으니 당연한 것이다
정사에서 구리 이전은 확인 할수가 없었다
구리를 야사에서는 청구 또는 배달이라고 하는데 청구나 배달이 다시 사용된 흔적이 없고 구리는 고구리 고리로 계승된 것으로 보아서
청구나 배달은 이칭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13. 기준을 신라로 잡는다고 신라 이전이 지워질수 없다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도량형에서도 기준을 정하고 기준에 의해서 계측하고 있습니다
해외입양을 해서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하지 못하고 오래전에 이주해서 우리말 우리글은 물론 우리풍습과도 많이 다르다 하여 그들을
우리민족이 아니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국조를 단군으로 하고 고조선을 기준으로 우리역사를 기술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정사에서 고조선 이전 환웅시대를 역사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고 기준으로 하고 있는 환웅시대 즉 구리시대의 국호와 백성호칭에서
보듯 민족의 기준으로 하려고 그렇게 이름한 것은 아닐까요
자연현상에서 나타낸 처음을 표시하는 '동틀-려'나 '싹-묘'는 시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연현상을 바라보며 기준을 정한것 처럼보여지므로 고구리가 다물정신으로 기준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구리를 기준으로 하면
어떨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신라를 기준으로 할수도 있고 고리나 조선을 기준으로 할수도 있습니다
물론 고구리나 고조선을 기준으로 할수도 있습니다
근세조선으로 기준을 한다고 그 이전 역사 기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기록으로 나타난 그 시대까지는 연구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종대왕을 기준으로 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기록이 있기에 기록이 있는 최초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역사와 민족명칭을 찾아 보자는 것입니다
족보에서도 무슨파 무슨파로 나뉘어지지만 중시조보다는 시조를 기준으로 성과 본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록이 있는 한 기록 최초의 국가를 기준으로 역사를 정립해야 할것입니다
14. 정통성 시비 보다는 민족 기준이후는 하나의 민족으로 역사정리
우리는 사회나 역사속에서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통성을로 정리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그 이전 국가 즉 기준 국가 구리의 백성을 하나로 보는 역사를 정립해야지
그 후예 국가인 삼국의 하나를 정통성을 부여 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준 국가 구민의 후예는 하나로 보는 역사를 정릴해보자는 것이다
15. 동신라쪽에 있던 낙랑국과 사로신라 백제 위 한사군의 일부였던 낙랑군
우리는 보통 낙랑국과 군을 같은 것으로 혼용하고 있다
그러나 낙랑에는 나라와 군이 분명히 다름을 기록을 통해서 알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최씨의 낙랑국과 한의 낙랑군이 같이 기록 되었다
그러나 25사에는 낙랑군만이 기록 되어 있을 뿐이다
더욱이 낙랑국이 있을때 한나라 낙랑군에서는 태수가 3번이나 교체되는 기록이 있음은
바로 낙랑국과 낙랑군이 다르게 표현한 삼국사기 기록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25사에서 낙랑군은 고구려 예의 서쪽에 있엇던 것으로 표현 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에의 동쪽에 있던 옥저와 함께 있던 낙랑국은 낙랑군과의 사이에 고구려 예라는 나라가 있으니 구별이 분명해 질수
있다
낙랑군은 기준과 위만의 땅에 설치된 군인데 한나라가 후한이 위나라가 그리고 사로신라와 백제의 일부로 기록되고 있다
낙랑국의 위치에서 신라가 있고 낙랑군의 위치에서 사로신라가 각각 있는 것으로 보여지므로 연구를 게속하여야 할것이다
16. 사로신라와 동신라에 대하여
사로는 신라의 초기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 및 25사에 기록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상도 경주에 사로국이 있었고 그것이 훗날 신라가 되었다고 배워 왔다
그런데 사로가 기록된 삼국지 동이전의 동이 각국의 위치는 요 중심의 동쪽이지 한반도 기록으로 볼수 없다는 점이다
500년 이전 삼국사기가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도 기록의 재현이 한반도 상황으로 볼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와 25사 동이전의 공통부분으로 살펴 본 결과 사로국은 기자가 살던 서화의
동쪽이며 항성의 동쪽에 있었던 신라의 구 명칭으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요 동명 항성 잠산 동성 덕안 동쪽에 안휘성의 남부를 령이라는 지명이 많고 강소성의 북쪽 지명에 해가 있으니 영해라면 이곳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그리고 이지역에는 '사'라는 지명과 '로'를 닮은 '려'가 있으니 이곳이 사로국이 아닐까
회원이라는 지명으로 근처에 형산이 있고 구룡강이 있고 주변에는 김유신때 신라와 백제의 전투 지명이 있고 김유신의 선조 김수로왕과
소호금천씨관계 지명이 있다는 것은 사로국의 신라위치를 재조명하여야 할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동신라는 503년 고구려간에서 독립하여
631년에 만주의 광령 철령 길림의 동쪽까지 강역으로 확보하였음을 만주원류고와 요사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25사와 삼국사기에서 공통부분의 사로신라와 한반도쪽의 각각의 신라를 사서를
정리하고 재구성하여 당시의 상황에 맞는 신라사를 정리하여야 할것이다
삼국유사도 선덕왕의 신라와 정신대와의 신라로 기록된 2 신라
삼국사기에도 왕으로 기록된 사로신라와 간에서 왕으로 변경된 신라
고구려 동쪽 신라와 백제 동쪽 신라로 기록
우리는 사서를 부정하지 말고 재정리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재현 하도록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17. 사마왕능과 무강왕은 백제사 전체에서 풀어야 할 숙제
공주에 백제 사마왕릉이 발견되었고 익산에는 무강왕의 미륵사지가 있다
사마왕릉이 무령왕능인지 무강왕이 무왕인지 이것이 풀어야 할 숙제
25사 동이전과 공통부분의 삼국사기 내용은 한반도로 옮겨 올수는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 상황으로 풍리 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백제가 진출했었다는 근거는 충분하다 그러나 백제의 수도 한성과 웅진과 사비는 한반도에서 재현이 불가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전체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밝혀야 할 문제이기에 제시하는 것이다
사마왕릉과 무강왕에 대한 의문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과 웅진 그리고 사비성을 사서로 재현하여 유사한 곳을 찾아야 풀릴것이다
그래서 백제사는 수도의 위치를 사서에 일치되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서에 기록된 곳을 재현하고 찾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18. 성왕때 신라와의 전쟁에 모순-두신라의 역사를 연구해서 밝혀야 할 사항
성왕때 백제와 신라의 전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우리도 궁금하다
왜냐하면 신라와 백제는 혼인으로 인한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다 그런데 전쟁을 하였다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아마도 이것은 영해이며 사로지역에 있던 사로신라와 동신라의 기록의 혼합에서 오는 기록으로 본다면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공통부분의 신라와 동신라의 역사를 연구하며 해결해야 될 사항인 것이다
19. 삼국 대륙존재글은 사서의 기록을 소개하는 것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의 현 중국 동부에 존재했다고 알리고 있는데 이 것은 설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와 중국25사 동이전의 공통부분의 위치를 찾아 본 것입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은폐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25사 동이전의 국가들을 한반도
국가로 인식하게 한 것의 시작은 한반도 역대 왕조들입니다
25사 동이전에서 각각 국가의 배열도를 만들고 각국가의 해당지명을 삽입하고 중국의 고지도와 현대지도에 대입하면 동이각국의 위치는
요 중심의 동쪽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중국의 역대왕조들이 은폐한것으로 볼수는 없습니다
삼국사기에서도 25사와 공통부분은 한반도 역사로 볼수가 없습니다
바로 치우,소호,고신-단군-기자-을지문덕
김유신 장보고 최치원의 인물의 역사의 맥
1개월 이내의 조공 거리
특산품생산지-자석과 바늘을 보낸 신라, 조선때
시작하는 양잠기술의 결정품 비단
신라가 고구려에 준 목화, 당나라보다 발달된 쇠뇌기술
인구로 본 삼국
6월 이전의 홍수
일식집중관측지
동풍이 부는 신라
겨울에 유행병이 돌았다는 신라 등 열러가지가 한반도 상황으로는 풀수 없는 점
삼국지명이 한반도에는 현존하지 않으나 중국 동부에는 있는 점 등
25사와 삼국사기 공통부분은 도저히 한반도 기록으로 볼수가 없다는 것 그 위치가 중국임을
25사 동이전은 밝히고 있다고 소개하는 것이다
물론 사서를 한반도에 맞지않는다고 부정하면서 한반도에 맞추려고 노력했던 선인들의 말을 빌린다면 사서를 잘못 기록했다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서를 통해서 그 시대를 재현함으로서 역사를 조명하는 것이지 그 당시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이 사서를 부정하면서
취사선택하여 만들어서야 진정한 역사를 알수 있겠는가
대륙 삼국존재 기록의 소개의 변을 이야기 했는데 그러므로 연구를 계속하여야 할것이다
20. 기자가 조선땅에 살았다고 하니 그 땅까지가 조선이다
기자를 주 무왕이 봉하였던 아니던 상관없이 기자가 조선에 살았던 것만은 사실이기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기자가 조선에 이미 살았다' 등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기자가 살던땅은 하남성 서화이고 묻힌곳은 안휘성 몽성으로 볼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서쪽에 있는 서화까지 조선땅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기자가 살던땅에는 삼국이 있었다고 했으니 역사흐름의 전체적으로 살펴야 할것입니다
김유신 조상 소호금천씨가 살고 치우 천자가 살던땅이 서화의 동쪽에서의 남북이다
기자의 기록을 부정한다면 그와 연관된 모든 기록을 부정해야 되는 상황이 된다
기자가 살았던 그 땅까지 연구가 되어야 장보고나 최치원에 대한 대답도 분명하게 찾아 질수 있는 것이다
모든 기록을 인정하고 바로 하기 위해서는 기자에 대한 기록도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될것이다
21. 장안중심국가에서 삼국왕에게 내려졌다는 작호도 2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백제와 고구려에 장안 낙양 중심국가에서 작호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작호는 왕이 신하에게 줄수도 있고 내 관할지역의 지방관에도 줄수 있지만 내관할지역이 아니므로 명목상 주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직접통치하지는 못하지만 작호를 주므로 주는자가 상위에 있게 되는 형식이므로 작호를 주지 않았을까
작호에는 그가 관장하는 지명이나 지역호칭이 들어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작호가 없었다면 어떻게 고구려나 백제의 위치를 밝힐수 있겠는가
고구려의 작호에 영평2주가 들어가니 고구려가 지금의 하북성지역에 있었음이 발견되지
않는가
조공이라는 것도 그 용어는 불쾌할 수 있으나 조공품이 있었기에 그 지역을 찾을수 있는 것이다
조공이라는 문구가 많은 것은 대외와 교섭이 활발했다고 보는 것는 좋을 것이다
우리가 조공이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표현이 당시에 있었는가도 연구해 보아야 한다
22. 후삼국연구를 좀 해주세요
후삼국연구를 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방영되고 있는 왕건 그 자체가 후삼국인가는 연구해 보아야 할것입니다
조선시대 100만명이 안되는 인구인데 반하여 고려는 210만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고려 초기 7대 실록이 분실되어서 1033년에
황주량에 의하여 재편집되고 그 이후에 삼국사기가 편찬되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말기부분은 고려사와 중복되는 부분인데 7대 실록이 재 편집된 것이고
그것을 인용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했다면 어떤 것을 보고 후삼국을 연구해야 할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후삼국의 분쟁지역과 초기 삼국의 분쟁지역이 같을 것인데 삼국사기 초기와 말기 분쟁지명이 같은것이 거의 없으니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우리가 후삼국을 연구할수 있는 자료를 얻고자 노력하는 것도 이 때문인데 삼국사기와 고려사 초기 기록을 제외한 후삼국 연구 자료가
있으면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구당서에서는 신라말이 장보고시대까지 밖에 없다.
그 이후는 불분명하다
지금 드라마 왕건이 방영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지 모르겠다.
추허조는 태조10년(927년)7월에 고려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언제 죽었는가
후삼국 연구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3. 역사스페셜은 현재의 국가사관으로 조사 방영되는 것으로 봄
본인도 자주 역사스폐셜을 봅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으나 삼국시대 자료를 방영하는데는 현재의 조선국가사관에 의하여 편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국사교과서의 사관으로 조사되고 편집되므로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는 부분이 조금은 방영되는지 잘 모르겠으나 반도사관에
의한 분석이므로 우리들은 시조중심주의에 의한 재평가를 하여야 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도사관에 의한 조사이고 보니 한반도에서 진출했다는 것을 부각하게 되고 있습니다
우리역사가 부족하고 잘못된 역사라도 엄연한 사실일때는 그대로 가르치며 반복하지 않게 교훈으로 삼도록 해야 할것입니다
고려중기 이후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반도사관에 의한 역사정리로 보고 시조중심사관으로 새롭게 보도록 연구할것입니다
24. 한반도민을 우리민족이라고 하면 그 기준은 언제로 해야 하는가 광복민족은 만들수 없다
한반도민을 우리민족이라고 본다면 어느시대 한반도민을 기준으로 할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민족으로 할것인가
아니면 대한제국 국민을 기준으로 할것인가
아니면 근세조선 백성을 기준으로 할것인가
한반도민을 민족으로 본다면 고구려 발해는 우리민족이 아니란 말이고 한반도외 조선후에들도 우리민족이 아니란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슬프고 슬픈일이다
가족은 되어도 민족이 될수 없고 역사는 가져오고 싶고 그 백성의 후예는 다른민족으로 말들어야 속 시원하시겠는가
대한민국 한반도민을 민족으로 본다면 다른민족도 외국인도 없다 다 한반도민이 아닌가
김유신은 소호금천씨 후예인데 소호금천씨의 후예중에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조상이 같아도 다른민족으로 보아야 할것인가
만주에는 조선인 후예가 살고 있는데 그들도 한반도민이 아니므로 우리민족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우리는 누가 무어러 해도 기록이 존재하는 한 국호 구리와 그 백성 묘민의 후에로 정리 할수 밖에 없다
50년의 광복민족은 만들고 싶지 않다
25.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기준후예는 하나의 민족사로 정리해야 한다
우리민족의 기준을 어디로 할것인가
근세조선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반도민을 민족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동신라를 기준으로 한다면 만주의 여진족과 반도의 조선족을 나눌수가 없다.
물론 삼국이나 고조선을 기준으로 한다면 몽고족 여진족 조선족을 나눌수 없다
또한 고조선을 기준으로 하여도 몽고족 여진족 조선족 한족을 나눌수가 없다
지금 우리는 영토를 한반도로 확정하고 역사 기록을 한반도에 맞추면서 한반도민만을 민족으로 보고 있다. 현재 중국에 있는 조선족은 17세기 이후에 이주한 한반도의
후예를 말하고 있으니 근세조선의 후예들만을 우리민족으로 보는 것이 국사관이다
여기서는 우리역사를 나타낸 최초의 국가를 기준으로 하여 그 시대의 후예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민족사를 복원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가 유럽으로부터 독립한 역사를 미국사로 하고 있다 아메리카에 있던 인디언의 오랜 역사를 인정하면 침략사가 될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독립이후의 역사로 미국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인디언에 대한 잘못된 역사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랜경험에서 얻어지는 가치관이 없고 힘의 논리에 의한 역사만을 가르치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며 미국인은 있어도 미국민족은
없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를 지울수 없는 기록에 의하여 전승되어 왔다
현재 한반도에서 역사를 찾으려 하여도 우리 조상들의 역사속에서 활동무대는 한반도만을 나타내고 있지 않으니 진실을 밝혀보자는
것이다
말로만 기준을 고조선하고 있지 실제로는 근세조선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준 국가의 후예를 하나의 민족으로보는 민족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26. 고구리 땅 영평은 고지도에서 현 북경유역으로 표기-패망때도 이곳에 있었다
현재까지 국사에서는 고구려가 요하를 건너 북경쪽에 진출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25사 동이전에서는 영주와 평주가 고구려 강역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주와 평주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추증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기록에서 찾아보면 송나라때 편찬된 송본지리지장도의 여러지도에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영평은 현
북경근처에 있음을 확인할수 있다
고구려는 패망할때에도 이지역에 있었음을 알수 있다
지도는 '설'에 소개된 것을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27. 야사를 비판하기 보다는 비교연구가 바람직하다
우리는 한단고기나 규원사화 또 단기고사를 믿을수 있느냐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야사를 믿을수 없다면 정사와의 공통부분은 믿을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야사와 정사의 공통부분도 믿을수 없다면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기록을 믿지 못하는데 역사연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록들을 미는 것을 전제로 하고 야사와 정사의 공통부분까지는 정리를 해야 할것입니다
야사에서 환웅으로 불리는 치우 정사에서는 구리의 천자라고 하였으니 이 시대까지는 믿는 자세로 기록을 풀어야 할것입니다
하기는 현재에도 기록을 믿을수 없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나 어쩜니까 그 기록이 유일하다고 보아야 할것이니 말입니다
정사 사기와 삼국사기 야사인 한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삼국유사 등을 우리역사의 일부라도 기록했을 것으로 인정하고 민족사의
기준을 최초로 기록된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으니 믿고 연구를 하여야 할것입니다
28. 관산성전투에 대하여-여러 기록을 검토하여 연구하여 보시기 바람
관산성 전투에 대하여 대륙 백제의 성왕이 한반도로 건너와 전투를 했는가라는 의문에 대하여
우선 관산성은 옥천 근처으로 가정, 삼년산군은 보은근처로 가정, 김유신 조부가 한반도에서 활동했다는 전제, 가락국이 경상남도에
있다는 전제, 성왕의 사비성이 부여에 있다는 전제로 해석하면 국사와 같은 해답이 있다
여기서 관산성이나 산년산군의 명문유적으로 발견된 것이 없고 김유신과 조부 무력이 한반도에서 활동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백제 수도 웅진과 사비가 한반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군사에 대한 것도 다 다르다
신라본기에는 좌평4명과 29600명
김유신저에는 장수4명과 만여명병사
백제본기에는 보기병5청명으로 물론 전승국의 과장과 패전국의 축소가 있다고 해도 김유신전에
만여명과는 왜 차이가 있을까
가락국이 망하였는데 어떻게 군사가 있었을까
성왕이 대륙 백제에서 한반도로 건너와 전투를 하였을까하는 의문에 대하여
관산성이 한반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찾아야 할 이유는
김유신의 전쟁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으나 동명과 덕안의 동쪽에는 잇으며
김유신의 조상 소호 금천씨가 살던 청양이 동명과 덕안의 동쪽에는 있고
김유신의 조상 김수로왕과 관게된 것으로 보이는 지명이 청양 근처에 황산 허촌 묘수 구자산 등이 덕안 동쪽의 궤지 동쪽에는 있으나
김해지역에는 불분명하는 등
김유신전에 기록된 족보상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요중심의 동쪽으로 나타타고
백제의 수도 웅진과 사비도 25사 동언의 위치배열도에 지명을 삽입하여 위치를 고지도와
현지도에서 찾으면 중국 요중심의 동쪽으로 나타나므로 성왕시대 수도위치를 찾아야 하고
백제땅으로 추정하는 충청도 전라도의 조선초기 인구 기록을 검토하면
충청도 19560호에 44476구(명)
전라도 15714호에 39167구(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보다 900여년전에 충청 전라도의 인구가 얼마나 되어서 기록과 같은 백제병사를 모집하였을까 하는 의문이며
이러한 여러가지 의문을 가지고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의하여 확인해야 될것임
자연과 인문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기록에 충실한 해답을 얻도록 노력합시다
29. 서신라와 동신라는 인문과 자연을 정리하여 공통부분의 서신라와 비공통의 동신라로 구분
중국25사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공통부분의 신라는 동이전의 위치배열도에 지명을 대입하여보니 중국 요 중심의 동쪽에 있었고 더욱이 자연현상에 의한 연구에서도
확인 되므로 황해 서쪽이니 서신라 또는 사로신라로 부르고
비공통부분이며 631년에 만주까지 다스린 신라는 황해 동쪽이니 동신라 또는 신라로
구분하는 것임
서신라는 사로국이 고구려와 백제의 연방에 속하였다가 광복된 것으로 보여지므로 광복신라로 부르기도 하며 동신라는 고구리간시대를
지나 독립하였으므로 독립신라로 부르기도 하였다
서쪽이나 동쪽을 붙이는 것은 위치에 의한 것이고 광복이나 독립은 그 역사의 흐름에 의한 것이므로 서신라를 사로신라로 동신라를
신라로 부르는 것도 무방할것 같다
자세한 명칭 확정은 연구를 더 하여야 할것이다
30. 가야 또는 가라는 어디에 있는가 - 김유신과 백제 전투지명이 존재하는 지역 ?
가야와 가라가 같은 것으로 보면서 대답해보면
가라의 위치를 경상남도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동이국 위치배열도에 지명을 삽입하면 가라는 중국의 요중심에서 찾아야 한다
김유신과 그 선조 소호금천씨에 의하면 같다
김유신과 백제 당과의 전쟁지명으로 보아도 중국의 요중심의 동쪽이다
즉 백제 패망시기에 전쟁을 한 지명 평원 동명 황산 백강 항성 주류성 독산 동성 잠산 덕안이 요중심의 동쪽에는 있는데 한반도에는
없다
그런데 독산 동성 잠산 독산 서성의 동쪽에는 소호금천씨가 살았던 청양이 있고 그 주위에는 구자산 황산 허촌 묘수가 있다
그리고 그 서쪽이면 동성 잠산의 동쪽에는 궤지(지주)가 있는데 궤는 상자이고 금관도 상자이니 이곳이 금관국의 위치가 아닐까
이 지역에는 쌍어문의 집단이 있었다고 하니 더욱 가능성이 있고 황제내경에서 이 이남에서 파사석을 구할수 있다고 했으니 연구하는데
참고가 될것이다
기록에서 인문과 자연을 모두 망라하여 진실된 역사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결론해서 가라 위는 한반도의 남부가 아니라 요 중심의 동쪽이면 독산 서성 동성 잠산 덕안의 동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
연구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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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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