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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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질의 하신분이 있어 고구려 평양성에 관한 오재성 선생님의 글을 참고로 올립니다
참고 지도는 저녁에 보완합니다
감사합니다
< 高句麗 평양성의 충분조건에 일치하는 지역은 중화국 >
高句麗 패망 시대의 기록은 『隋書,唐書,舊唐書(수서, 당서, 구당서』를 많이 인용하였는데 이를 두고 탓 할 수는
없다.
패망시킨 신라가 기록한 것이 존재하지 못하고 패망시킨 당나라 기록이 있을 뿐이니 이를 인용하지 아니하면 무엇으로 기록할 수
있겠는가 ?
지금까지 평안도 평양을 高句麗 평양이라고 가르치며 장수왕때 평양에 천도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곳이 과연 史書(사서)와 일치되는 高句麗
평양인가 ?
(1) 『三國史記』에서 평양성 위치는
① 동천왕(東川王) 21년(247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기었다.
44년 後漢이 새로 설치한 낙랑군과 건안시(建安時
: 196-200) 설치한 대방군이 300년에 신라에 항복하였고 高句麗가 314년 315년에 정벌하였으니 이때에 낙랑 대방(군)의 지역에는 평양 지역이 될 수 없다.
② 고국원왕(故國原王) - 교열제(釗烈帝) 13년(343년) 7월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③ 394년(광개토태왕3년)평양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았다.
④ 장수왕(長壽王) 15년 도읍을 평양에
옮겼다.
高句麗 평양성은 247년 종묘사직을 옮기고 평양 동황성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장수왕
때도 도읍을 옮긴 곳이고 패망한 곳이다.
평양성은 247∼586년사이의 高句麗의 수도였으니
340년간의 수도이었다.
⑤ 고국원왕 5년 서울(평양) 북쪽에 新城(신성)을
쌓았다.
⑥ 광개토태왕 2년 평양에 불사(佛寺)를 아홉 창건하였다.
분명히 평양은 위의 낙랑 대방이 건재하던 시기에 축성된 성이다.
⑦ 평원왕28년(586)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겼고 장안성은 高句麗長城(631축성)의 서남쪽에
있다.
보장왕시대 지명인 용도 은산 고대인성 신성이 있는 근처에서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高句麗 평양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⑧ 보장왕때 살수(薩水)와 평양성은 가까이
있다.
⑨ 高句麗 평양은 百濟 한성과 같은 지역 남북에 있다.
한성이 遼(요)의 동쪽으로 밝혀지면 평양성도
밝혀질 수 있다.
⑩ 국내성에서 평양까지는 17개 역을 거친다.
(2) 『25사』에서
①『唐書』
평양성은 漢의 낙랑군으로 산 형세를 따라 구부러지고 돌아서 성이 되었고 남녁가로 패수가 있다.
(平壤城漢樂浪郡也隨山屈 爲 南涯浿水) (淸河卽貝州 史記69)
(평양성한락랑군야수산굴료위부남애패수) (청하즉패주 사기69)
②『遼史』권 38에 의하면
'암연현의 동쪽은 신라이며 옛 평양성은 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동북 120리 지점에
海州가 있다.
海州는 高句麗장성 위에 있으며 현 금주(錦州) 북쪽에
있다.
(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암연현동계신라고평양성재현서남동북지해주일백이십리)
위 평양성 기록과 일치되어야 高句麗때 수도로 볼 수 있는데 현재의 평양은 일치되지 않으므로 高句麗 首都평양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遼史』 만큼 정확하게 高句麗 평양 위치를 나타낸 말이 없다.
이는 高句麗 長城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유적에 의한 평양은 어디 ?
① 평안남도청에 보관되어 있는 '평양성벽각자'에
[병술12월중한성하후사 소형문달절 자차서북행섭지(丙戌十二月中
漢城 下後四小兄文達節自北西北行涉之)]기록이 있다.
이것은 현재의 평양이 한성이라는 것이 아닌가 ?
위의 기록을 검토하여 보면 요의 동쪽이고 은신 신성 용도가 있으며 해주의 서남쪽에서 찾아야 되는데 지금의 하북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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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올렸던 글입니다 !
< 과연 고구려 "평양성"인가 ? >
관심있는 분은 주의깊게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오재성 선생님이 고구려 평양성 관련 글을 올리시어 다시 소개해봅니다
고구려 평양이 아닌 고구려 별도(別都)인 "한성"이 맞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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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재성 선생님 글 >
평양성 축성을 기록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 21년
즉 서기247년에 평양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또 고국원왕4년
즉 서기334년에 증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위 기록을 말하지 않는다
왜일까
사로신라의
기림이사금3년(300)에 낙랑 대방이
신라에 항복하였다는 기록을 감추고
고구려의
미천왕 14년(313) 낙랑군을 침범하고 15년(314)에 대방군을 침범했다는 기록을
멸했다고 가르치면서 부터이다
이것은
고구려 평양성을
현재의 평안도 평양으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취사선택하지 말고
낙랑 대방의 위치를 바로 찾고
고구려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 아닐수 있음을 인식해야
평양성 축성도 바르게 전수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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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내용 >
1. 동천왕(東川王) 21년 (247년) - 평양성 축성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기었다
2. 미천왕(美川王) 14년 (313년) - 낙랑군 침범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멸한게 아니다)
3. 미천왕(美川王) 15년 (314년) - 대방군 침범
봄 정월, 왕자 사유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으로 대방군을 침범하였다 (멸한게 아니다)
4. 고국원왕 4년 (334년) - 평양성 증축
가을 8월,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겨울 12월, 눈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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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모방송사 고구려 평양성에 관련된 방송내용이다
< 고구려 평양성 >
- 427년 평양천도 (고구려본기 내용 : 장수왕
15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 552년에 평양성 축조 시작 (고구려본기 내용
: 양원왕 8년 장안성을 쌓았다)
- 공사기간 42년
- 총길이 23키로
< 문제점 >
1. 사서의 내용과 다르다
평양성은 552년에 축성된것이 아니라,
이미 274년에 축성이 시작되었으며,
334년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552년 쌓은성은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평양성이 아니라 장안성이다
2. 그런데 왜 552년에 쌓았다고 할까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274년에 이미 평양성을 축성하였다고 하면
- 300년에 신라에 항복한 낙랑, 대방을 설명할 수 없으며
- 313 ~ 4년에 멸한게 아닌 침범한 낙랑군, 대방군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해석하고 있는지 모를일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하는가 ?
동양 3국의 사서중 제일 정확히 기록된 사서라는 것은 본문에 여러번 강조를 해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유일하게 남겨진 우리의 정사이다
사서를 부정하기에 앞서 있는 그대로 보고 교육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하여야 한다
취사선택과 근거없는 비정은 곤란한 것 아니겠는 가 ?
아래의 것은 고구려성벽각자입니다
분명 "평양"이 아닌 "한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별도인 "한성" 이라는
것이 아닌지 ~
명문의 유물이 있음에도 "평양"이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
모를 일입니다
< 평안도 소재 고구려 성벽각자 >
- 고구려 별도 "한성" : 지금의 평양은 고구려 별도 "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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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야후 백과사전 >
① 대방 帶方
- 황해도 지방에 있던 옛 지명.
최초의 대방은 BC 108∼BC 107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진번군(眞番郡) 15 속현(屬縣)의
대방현으로, 그 위치는 황해도 사리원(沙里院) 및 봉산군(鳳山郡) 문정면(文井面) 지방이었다.
대방현은 BC 82년 진번군의 7현과
함께 낙랑군(樂浪郡)의 속현이 되었고, BC 75년경 7현이 모두 낙랑남부도위(樂浪南部都尉)의 관할에 들어가 후한(後漢)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이 지방은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
탁(公孫度)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204년 공손 탁을 이은 공손 경(公孫慶)은 강성해진 한(韓) 및
예(濊)를 견제하고자 대방현을 중심으로 낙랑남부도위
관할의 7현을 대방군(帶方郡)으로 개편하였는데 그 영역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북부에서 황해도 황주(黃州) 자비령(慈悲嶺) 이남지역이다.
그 당시의 군(郡)은 지금의 도(道)와 같은 규모로서, 대방군을
이루었던 7현은 대방 ·소명(昭明:信川) ·열구(列口:殷栗) ·장잠(長岑:長淵?) ·함자(含資:瑞興?) ·해명(海冥:?) ·제혜(提奚:?)이다.
대방군은 238년 위(魏)에 예속되고, 얼마 뒤 다시 진(晉)에 속하였다가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에 함락된 직후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4세기여 만에 한족(漢族)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진서(晋書)》에는 290년경의 대방군을 <통현(統縣)> 7, 호(戶) 4,900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적】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속칭 ‘당토성(唐土城)’은 대방군 치소(治所)의
유지(遺址)로 추정한다. 이 토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문정면 등에는 크고 작은 고분군(古墳群)이 있는데, 여기에는 작은 덧널무덤[木室墳]이 있는가 하면 크고 작은 돌방무덤[石室墳] 및 벽돌무덤[塼室墳]이 있다. 1911년과
1912년의 두 차례의 조사로 문정면 구룡리(九龍里)의 한 전실분에서 ‘사군대방태수 장무이전(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이라는 명(銘)이 있는 묘전(墓塼)을 발견하여 당토성이 대방군 치소(治所)였음을 뒷받침하였다.
② 낙랑 樂浪
- 한사군(漢四郡) 때 하나의 군이름.
-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BC 108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해 낙랑 ·진번(眞番) ·임둔(臨屯)의 3군을
두고, BC 107년 예(濊)의 땅에 현도군(玄娠郡)을
두어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사군 설치는 전한의 동방지배의 전진기지로 새 기원을 수립한 것이며, 북방 흉노족(匈奴族)에 대한 견제책이기도 하였다. 한사군은 한나라 직할영토로서 모두 유주(幽州) 관하(管下)에
편입되었다. 각 군에는 한의 군현제(郡縣制)에 따라 여러 속현(屬縣)이
설치되고, 태수(太守) ·영(令) 등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한(漢)나라에서 파견되었다. 한사군 설치 후 한인의 억압착취 정치에
대한 토착민의 반항으로 4차례에 걸친 한 군현(漢郡縣)의 변천이 있었다.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古朝鮮) 땅에 위치한 낙랑군에서도 후한(後漢) 때 낙랑의 토호인 왕조(王調)의 반항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의 군현이 그들의 식민통치를 수행한 중심지는 낙랑군이었다. 낙랑군에는 군태수(郡太守) 이하의 관리와 상인 등 많은 한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의 식민정치는 정치적 압박보다 경제적 착취가 우선한 것 같다. 낙랑군에서는 1,500명을 동원하여 각지의 목재를 베어오게 하였으며, 소금이나
철에 관심이 컸고 변한의 철이 낙랑과 대방군(帶方郡)에
공급되었다. 낙랑군은 한사군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중국 왕조가 바뀌면서 지배체제가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토착민의 지속적이고도 거센 반항과 백제
·고구려의 협공으로, 313년(고구려
미천왕 14) 마침내 고구려에 병합되어 완전히 소멸하였다.
- 상기 본문내용과 비교하여 읽어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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