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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4년 당나라가 침입한 고구려지역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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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654년 당나라의 고구려 침입한 지역은 어디이고 그 당시 유성은 어디였을까?
이 의문을 알고져 합니다
四年, 帝至定州 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4년, 제지정주 제발정주, 친패궁시, 수결우의어안후. 이세적군발류성, 다장형세, 약출회원진자, 이잠사북취용도, 출아불의)
4년(645) 당(唐)나라 임금이 정주를 떠나면서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자기 손으로 매달았다.
이 세적의 군사는 유성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을 향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 용도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가 현토·횡산·개모·마미·요동·백암·비사·협곡·은산·후황 등 10개
성을 빼앗겼다.
요주·개주·암주 3개 주에서 7만 명이
당으로 들어 왔다.
장안중심의 국가에서 고구려는 요동에 있고 영.평2주(營.平2州)의 주인임을 인정하여 왔으며
송나라때 제작한 고지도에서 영.평은 현 요하의 서쪽에 있으며 청나라때 영평부라 이르는
곳이다.
그런데 당태종은 요동이 자기의 땅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654년 당의 침입때 고구려가 당에 빼앗긴
10성중에서 현존하는 지명이 은산이다.
은산의 남쪽에 용도와 신성이 있다.
이세적이 유성을 떠나 회원진으로 진군하는 것처럼 하다가 용도로 침입했다고 하였다.
용도는 대청일 통지에 조선성으로 기록된 안정문 밖 용도로 볼수 있는 것은 그 북쪽에 은산과 남쪽으로 신성 고대인성이 있다.
이세적이 떠난 유성은 어디인가
유성은 신성 은산 용도에서 어느쪽이었을까?
은산의 서쪽에는 '회'자가 들어가는 지명으로
은산 서쪽의 회래 회안(懷來 懷安) 회인이 있는데
어느곳이 회원진으로 보이는 지는 알수가 없다
여기서 유성을 살펴보자 분명히 고구려가 요동에 있으니 요동에 있지 않으면 요서에 있을 지명이다
그런데 당서에서는 요서에 1현이 유성이다.
이 유성이 어디인가 지금까지 모든 연구에서 보면 조양으로 나타내고 있다.
조양은 어디인가
은산 용도 신성 고대인성에서 동쪽으로 멀리 있고 요하에 있는 지명이다
물론 송나라때 제작된 고지도의 요수로 보이는 강의 지역이다
고지도에서 영.평은 요수의 서쪽에 있다
만약 조양이 유성이었다면 다음 사항은 어떻게 해석이 될까?
유성은 영주(營州)의 서북쪽에 있고 해(奚)라는 나라와 접하여 있다 그리고 북쪽은 글안이 있다고 했다.
조양은 고지도에서 영평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다
그리고 고지도에서 영평으로 표시된 지역은 49년 고구려가 평정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이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654년의 전쟁 지역이 같은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유성은 어디일까가 관심사이다
그런데 사기에서 요동 요서를 기록한 것이 있으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현재 태산을 주변으로 하는 지명을 나타내면서 요서와 요동이 등장하고 있으니 과연 요동 요서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사기 권2 하우(夏虞)항목에서
해대유청주(海岱維靑州)
집해 정현이 말하기를 동쪽은 해가 있고 서쪽으로 가면 대(垈)가 있다.
동악(東嶽)왈 대산(垈山)이라 하였고
정의에는
순분청주위영주 요서급요동(舜分靑州爲營州 遼西及遼東)
해대급회수유서주(海岱及淮水維徐州)
집해 공안국왈
동지해 북지대 남급회(東至海 北至垈 南及淮)
여기에 등장하는 지명 대는 태산이고 동남쪽에 동해라는 지명이 있고 남쪽에는 서주가 있고 회수가 있고 태산의 동북쪽에 있는 익도라는
지명이 청주라고 한다
결국 산동성 남쪽을 나타낸 지명들인데 요서와 요동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알수 없는 일이다
현재의 요서와 고대의 요서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된 기록이 아닐까?
아무튼 654년 당과 고구려 전쟁지역은 어디였을까?
현재 어느곳일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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