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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shaman.co.kr/newspaper/07/doggebi.htm
- Segye Shaman biweekly Newspaper 2000년 7월 1일
- 글쓴이 : 세계무속신문 편집부 차장(시인)
< 도깨비의 단서와 치우천왕(蚩尤天王) >
우리나라의 역사 중에 신비한 베일에 쌓여져
알려져 있지 않은 시대는 누가 뭐라 해도 단군시대일 것이다.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많은 역사학자와
재야 사학자들이 규명작업을 하고 있지만 방대한 자료와 문헌은 거의 중국 식민사관(중화사상)에 의해 쓰여지다 보니 역사의 정체성이 부족하고 그 대표성이 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한족이라는 말도, 동이족이라는 말도 없었다. 신화논쟁으로 불거질지 모르지만 우리의 상고사에서 마고, 한인, 한웅, 단군시대 때에는 동이지역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는 종교와
문화가 출현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모두가 같은 민족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 한국 도깨비의 단서와
그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도깨비에 대해 알아보려면 벽사미술(酸邪美術)과 단군시대의 치우천왕(蚩尤天王)에 대해 이해하여야 한다.
벽사미술(酸邪美術)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미술형태 즉 조각, 그림, 판화, 부 적, 서예, 문양, 공예 등에 인간을 괴롭히는 천재지변, 병마, 액운, 맹수 등을 쫓기 위해 남긴 미술행위이다. 즉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마력을 가진 미술이다.
가령 예를 든다면 고양이에게 고양이 방울, 집 대문의 문배, 부엌의 해태그림, 요강단지의 석세 무늬, 시골 동네의 부락 입구에 있는 서낭당, 신당목, 200여 척의 높이로 세워져 있는 신라시대의 황룡사 구층 석탑, 팔만대장경
등이 벽사미술의 완성품들이다. 고구려 벽화의 사신상, 신라왕릉의
십이지호 석상, 고려왕조의 돌 호랑이, 석관의 사신, 조선시대의 묘호석, 다양한 석상 등은 그 시대를 대표한 미술품들이다. 이러한 벽사 미술 뒤에는 벽사 신앙이 자리잡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동양미술사에 있어 귀면(鬼面)이라 불리는
벽사수면상(酸邪獸面相)은 미술사에 있어 큰 관심거리다. 귀면의 정체는 여전히 수수께끼지만 단군 시대의 치우천왕의 기록에 대한 단서를 풀어보면 어쩌면 풀릴지
모른다는 속 좁은 논리를 밝혀본다.
<규원사화>(揆園史話) 태시기(太始記)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환웅천왕이 신시(神市) 나라를 다스릴 때 치우 장수로 하여금 나라를 지키게
하였는데 치우는 실로 만고의 뛰어난 강용지조(强勇之祖)이며, 하늘을 빙빙 돌면서 바람과 구름과 번개와 안개를 능히 부리고, 칼, 창, 활, 도끼, 장창 등을 처음으로 만들고, 모든 벌레나 잡귀들을 쳐부수고
나라를 지키는 장수(匠帥)가 되었다.'라고 전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벽사신을 이 대목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치우가
풍운우뢰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단기고사(檀寄古史)의
태고사 편에서 환웅천왕이 풍백, 우사, 운사, 뇌공의 사대 도깨비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치우를 환웅천왕과 같은 동일 시대의 인물로
보기보다 다른 시대의 인물로 추측한다면 장수(匠帥)로
보기보다 마땅히 천왕(天王)으로 보아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도깨비의 역사는 한국 상고사에서 풀어지지 않는 단군의 정체와 같다. 삼국유사의
동대신국(東大神國) 창세기에 보면 환웅천왕이 만물을
창조한 후에 풍백, 우사, 운사 뇌공 등 3천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풍운우뢰의 4대
도깨비는 우주 창조 시대 때부터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중.일 3국에서
다같이 숭배해온 4대 도깨비(풍운우뢰)의 연원을 찾아보면 신시(神市)나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오방신장의 중앙신을 황제로 삼았고, 한국에서는 치우를 천하대장군으로 모셨다. 명당경(明堂經)에서는
동방 태호복희씨, 서방 소호금천씨, 남방 염제신농씨, 북방 전욱고양씨, 중앙 황제헌원씨로 중국중심으로 민족화 되어
있고, 삼신오제본기(三 神五帝本紀)에서는 동방 청제대웅, 서방 백제치우, 중방 황제왕검으로서 한국의 오방신장을 정했다. 따라서 동양에는
중국중심의 헌원황제와 한국중심의 왕검황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이 오방신장에는
그 통일성이 희박하고 민족적 편견까지 개입되어 있다.

"신비에 쌓여있는 상고시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벽사 미술의 제반을
형태로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도깨비 특히 치우천왕의 도깨비에 대한 단서가 풀려야 한다"
치우천왕은 중국의 황제와 73회 싸워 다 이겼으나,
74회 탁록전쟁 때 탁록에서 전사했다. 치우천왕은 도깨비 부대를 이끌었고, 황제는 귀신부대를 이끌었다. 치우천왕을 도깨비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황제는 싸움에서 이기자 치우천 왕의 시신을 다섯 토막 내어 다섯 방위에 각각
묻었다. 무속에서 굿을 할 때 군웅거리에서 청제, 흑제, 황제, 백제, 흑제의 5제를 청배하는 것은 5방위에 흩어져 있는 치우천왕의 신명을
불러모으는 것이다. 치우천왕은 군웅신이다. 무속의
병굿에서 오방신은 바로 치우천왕이고, 치우천왕이 백마신장인 증여곤에게 명하여 귀신을 잡아들이는데
귀신은 바로 그의 적인 황제의 별신이 된다.
치우상(蚩尤像)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지만
중국중심의 문헌을 토대로 논술해보면 치우는 흉폭한 반란자였다. 또한 난리를 잘 일으키고, 강력한 무력의 보유자이며 벽사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주(冀州)지방에서는 치우희(蚩尤戱)라는 가면극이 유행했고, 장안(長安)에 치우사(蚩尤祠)를 모셨고, 무기고(武器庫)에서도 치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편찬할 때 기록을 무시하고 치우를 흉폭한 반란자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치우천왕은 한육조(漢六朝)시대
민간신앙에서는 가장 유력한 신이었다.
황제가 치우상을 그려서 천하를 위협하고 벽사신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동양의 벽사 미술이 치우상으로부터 시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된 것이다. 중국 고대 주은 시대의 도철문( 紋)의 정체가 치우상이란 점, 진(秦).한(漢)시대부터 치우의 형상 을 그려서 부적으로 사용하는 민간풍습이 유행했다는 사실, 반란자로서 사기(史記) 에
낙인이 찍힌 치우가 민간에 있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장수'로서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치우제를 지내왔다는 것은 치우천왕의 위용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동양인들은 귀면상을 그들의 이상적인 벽사신상으로 모셔오면서 4, 5천년에 달하는
벽사 미술사를 이룩하였다. 동양 벽사상의 표준인 장수 도깨비 상은 치우천왕의 가면에서 유래되었고, 황제는 그것을 치우상이라하여 장수 벽사 미술을 창안했다. 사기(史記)가 나타나면서 민족적 편견에 의해 치우신앙이 사라지고
치우를 중국사에서 반란자로 몰아 붙였다. 한나라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도깨비 상이 지옥의 나졸(羅卒)로 전락되고
심지어 사천왕에게 짓밟히는 사귀(邪鬼)의 비참한 꼴로
격하되기도 했다.
치우가 처음으로 투구와 갑옷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알지 못해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말은 치우 상의 귀면이 치우의 가면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장수 도깨비는 치우천왕의 가면, 호랑이는 단군 산신 사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때 비밀의 열쇠로 채워져 있는 단군 문화와 우리나라의 역사는 바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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