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2.net - 송준희 칼럼 모음 (2001-2002)

고구려장성과 만주의 신라땅 그리고 고구려패망에 대하여 ~

2002-06-01 10:12:48


제목

제목: 고구려장성과 만주의 신라땅 그리고 고구려패망에 대하여 ~

등 록 자

송준희

날짜

2002-06-01 10:12:48

   


문답란에 올렸던 오재성 선생님의 글입니다
참고바랍니다


< 고구려장성과 만주의 신라땅 그리고 고구려패망에 대하여 >


부분에서 머물지 말고 전체를 보고 연구하여 봅시다

고구려장성과 고구려 말기 수도 위치와 만주의 신라땅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아니 아시아에서 교육된 우리역사에 의하면 고구려는 말기에 평안도 평양에 수도를 정하였다가 패망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안시성 요동성이 만주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
한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
수당과 고구려 전쟁지명,
-
나당과 백제, 신라와 백제가 전쟁하던 지명이

아시아에서 한반도에는 없고 요하의 서쪽에는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삼국초기 고구려와 한의 전쟁지명인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은 요하의 서쪽지명이다.
삼국말기 당과 고구려의 전쟁지명인 은산 용도 고대인성 신성이 북평과 태원사이에 있다.
삼국초기와 말기의 전쟁지명이 요하의 서쪽에 있는데 안시성과 요동성이 만주에 있다.

과연 그러한가

고구려의 남쪽에 있던 백제의 패망지명이 한반도에는 없으나
북평 태원의 남쪽에는 무수히 많다.

김부식도 모른다고 한 지명이 북평 태원 동명 덕안의 동서에는 있으나 한반도에는 없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만주원류고에서는 심양의 서쪽 광령에서 길림까지 신라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만주원류고는 청나라에서 편찬한 것이다.
명청시대의 조선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기록이 아닌가 ?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상상할 수가 없는 기록이다.


< 식민사관의 침투를 「우리의 역사」란 책에서 >


불행히도 식민사관이 우리의 역사관 속에 침투하게 된 것은 일본제국의 조선 침략과 더불어 그들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 내지는 영속화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하고 나서 강력한 헌병 경찰제도를 도입하여 무자비한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나 1919 31일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식민통치자들은 이에 당황한 나머지 다시는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민족의 자주성과 단결력을 파괴하기 위하여 한국의 역사를 왜곡날조(歪曲捏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민족의 자주성을 말살하고 단결력을 와해시키려는 것이 식민사관의 저의요 본질인 것이다.

식민사관의 논점은 크게 타율성론과 정체성론(他律性論과 停滯性論)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들은 먼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자율성의 부재를 강조하기 위한 논거로 "반도성론"을 제시하였다.
즉 한민족의 역사 무대가 반도였기 때문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시달리는 수난의 역사를 반도가 갖는 불가피한 운명처럼 설명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는 미지나(三品彰英)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조선사 개설의 序說에서 "조선사의 타율성"이란 제목으로 이런 관점을 전개하고 있다.

즉 한국사의 성격이 타율성을 띠게 된 근거를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구하고 있으며,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한민족을 어찌할 수 없는 숙명적 타율의 굴레 속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이다.

중국처럼 거대한 대륙을 차지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일본과 같은 섬나라였던들 그렇게 거센 외세의 압력을 받지 않았을 것인데, 바로 반도에 자리잡은 한국이었기에 외침에 의한 타율적 역사 전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미지나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 학자들은 반도사관의 입장에서 우리의 역사를 보았기에 기원전 108년의 한사군(漢四郡) 설치 이래 930여 회에 이르는 크고 작은 외세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이러한 반도사의 운명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기 위해서 일본의 온정적이고 강력한 통치를 받아야 하며, 나아가 한국인은 망국(亡國)의 슬픔에 젖을 것이 아니라 통합의 환희에 젖어야 한다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미화(美化)시켰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복해야 할 대상을 열등화(劣等化) 시키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정복행위를 스스로 정당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한민족의 자주성을 억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시켜 한민족의 역사강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키고, 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에 의하여, 반도의 남쪽에는 임나일본부에 의해서 지배됨으로서 한국사는 처음부터 식민지사로 출발되었음을 강조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일본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일선동조론과 만선사관(日鮮同祖論과 滿鮮史觀)을 내세우기도 했다.

일선동조론은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민족이라는 이론으로서 일본의 조선 병탄은 망국이 아니라 중국의 시달림을 받아 잠시 헤어졌던 형제가 다시 만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만선사관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나아가 만주 대륙까지 집어 삼키려고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괴뢰 정권을 수립한 후 만주와 조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적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여 일본의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는데 기여한 이론이다.

조선을 침략할 때는 일선동조론을, 만주를 침략할 때는 만선사관을 내세움으로써 결국 이 두 이론은 일본의 조선병탄과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단계적인 노력에 불과한 것이다.

또 그들은 한국사의 숙명적인 타율성을 강조하면서 의타성은 한국인의 일상 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소위 사대주의(事大主義)라고 하는 고질적인 성격이 한국인에게 체질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사대주의가 단순히 대외정책적인 사대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의 의식 구조 및 행동 양식까지 지배해 왔으며, 심지어는 한국인의 골수에 밴 민족성으로까지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당파성(黨派性)이 민족성으로 고착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조선조의 사화(士禍)와 당쟁을 침소봉대(針小棒大) 시켰다.
그들은 파당을 일삼는 이러한 민족성도 반도적 성격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고칠 수 없는 선천적인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국이 사화와 당쟁의 악순환으로 뒤덮인 역사를 전개 해 온 것도 바로 이 당파성 때문이며 ,따라서 이토록 단결심이 없는 민족에게는 일본의 강력한 통치가 불가피하다고 역설했다.

위에서 살펴본 타율성론과 함께 식민사관의 또 하나의 지주(支柱)가 되는 것은 정체성론(停滯性論)이다.

이것은 한국이 왕조의 교체 등 빈번한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 경제적 구조적면에서 아무런 발전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 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 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전근대적인 단계에 정체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일본의 후꾸다(福田德三)로서 그는 "한국의 경제 조직과 경제 단위"라는 논문을 통하여 근대 사회의 성립을 위해서는 봉건 제도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는 전제 하에서 한국이 근대화에 늦어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것도 봉건제(封建制)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구로다(黑田岩) 같은 자는 한국은 도저히 자력으로 근대화 할 수 없는 역사의 낙오자이기 때문에 한국이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지배가 불가피하다는 폭론(暴論)을 폈다.

그 후 모리따니(森谷克己) "동양적 생활권"이란 논문을 통하여, 또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시까다(四方博) "구래의 조선 시회의 역사적 성격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하여 역시 조선 사회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특히 시까다는 이조 5백 년의 역사는 발전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낙후와 정체의 연속이었다고 규정하고, 한국을 근대화 시키기 위한 일제의 역활과 사명을 강조했고 드디어는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또 스즈끼(鈴木武雄)는 그의 저서 『조선의 경제』 에서 다음과 같이 악의에 찬 서술을 서슴지 않았다.

"
구래(舊來)의 조선은 마치 쓰러져 가는 고목(枯木)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이를 넘어뜨릴 수도 없으니 구사회(舊社會)를 쓰러뜨리고 근대 사회를 건설하는 힘은 오로지 외부의 힘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한국 사회가 정체의 심연(深淵)을 맴돌고 있을 뿐 자체의 힘으로 여기를 빠져나올 수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근대화를 위해서는 외부의 힘, 즉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가 필요하다는 억지 주장이다.

결국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인을 위한 근대화의 추진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인은 식민 통치에 대하여 저항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는 주장이며, 불행히도 이러한 관점은 아직까지도 일본인의 뇌리(腦裡)에 뿌리 깊이 잔존해 있다.
이러한 식민사관의 관점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과감하게 맞붙어 싸웠던 역사관이 바로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이 내세운 민족사관이었다.



< 민족사관을 「우리의 역사」란 책에서 >


식민사관이 남긴 피해로 실은 큰 것이었다. 우리민족의 자주성과 단결력을 피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패배주의와 끝없는 자기 비하 의식을 심어 주었다.

"
엽전이 별 수 있느냐"

"
조선놈이 별 수 있느냐"하는 열등 의식과 자기체념의 늪지대에서 민족의 자주 독립은 고사하고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식마저 상실함으로서 민족의 활력소와 자주성의 싹이 시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분개하여 식민사관과 강력히 투쟁하면서 민족의 자주성을 고취시키고 거족적인 단결을 이룩하기 위하여 지난날 한민족의 위대했던 역사를 부각시켜 민족의 저력과 긍지를 강조한 역사관이 바로 일제하의 민족사관이다.

이러한 민족사관은 일제 식민사관의 정신적 침략에 과감하게 저항함으로서 민족의 자주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고취시키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특히 민족사관은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거부하였고, 타성론의 근거가 되었던 반도성론을 부정하기 위하여 대륙사관을 주장하였다.

즉 우리민족이 5천년 동안에 한반도에서만 살아 온 것은 불과 중세 이후 1천여년 밖에 되지 않으며, 그 이전에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이 산동반도에서 흑룡강 남단, 그리고 연해주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동북 아시아를 석권함으로서 우리민족은 오랜 기간 동안 대륙의 주인공이었는데, 이를 망각하고 1천여년의 역사만을 가지고 반도성을 논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동북아시아를 주름잡았던 위대한 한민족의 후예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강조하였다.



< 이렇게 식민사관에 대항한 민족사관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만주의 신라땅 기록은 우연한 기록이 아니다 >


삼국사기 삼국유사 수서 신당서 구당서의 공통부분의 고구려 백제 패망지역은 한반도의 북부가 아니다.

만주에서 지금은 고구려 어떤 어떤성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 그리 오래지 않아서 중국 학자들도 연구되고 있는 부분이다

만주원류고의 만주 신라 기록을 역으로 입증하는 것이 요사이며 요사 이전에 입증할수 있는 것이 바로 삼국사기 신, 구당서이다.

만주에서 고구려가 망했다고 분명하게 하려면 고구려 백제의 패망기록과 지명을 완전히 삭제하였다면 밝혀지지 않고 가르켜준 바대로 우리역사를 배우고 말 것이다

고구려 발해역사는 우리역사인데 그 후예는 여진족이고 한반도인은 조선족 또는 한민족이라 하는 것에도 아무런 느낌도 없이 녹음만 하는 백성이 되었을 것이나 나는 고구려 발해가 우리역사라면 그들의 후손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어야 한다고 본다

아닌가?

우리말 우리글을 사용해야 우리민족이라면 해외교포나 해외입양아중 우리말 우리글을 못하면 우리민족이 아니다

과연 그러한가 ?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반도사관이 아니고 단군을 국조로 한 우리역사를 복원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평양을 고구려 별도 한성이 아닌 고구려 평양으로 본다면 25사 동이전과 삼국사기는 우리역사책이 아니다.

의심하면서 왜 취하여야 하는가

중국은 고구려를 자기들의 역사로 정리하고 있다.

만주원류고에서의 만주가 신라땅이라는 것을 밝히고,

「삼국사기」의 최치원전에서

"
고구려 백제가 전성시기에 강병 백만을 보유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와 남으로 오월(吳越)을 점거하여 중국(한족漢族의 수도 궁궐)에 큰 해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유연제노를 살펴보면 삼국지명이

"
"의 주변에 용도 신성 광양 밀운 북평 고대인성 등,

"
"의 주변에 대() 광령 건안 하곡 등,

"
제노"의 주변지명에 석문 무안 평원 청하 동명 황산 치청 백마하 장성 제성 대산 주류성 항성 해 연수 독산 동성 잠산 덕안 곡성 강릉 악양 도림 함령 성양 등이 있고,

"
오월"의 주변지명에 진해 기린도 임해 영안 정주 천주 만년 임천 회창 대량 광주 남해 동해 등이

중국 낙양중심의 동쪽에 존재하고 있으니 한반도 사관으로 밝힐 수 있을까?


"
"은 아무리 지적하여도 ""이다.
그것으로 지적될 사항이 없다.
그러나 ""으로 되면 다르다.
그리고 ""이나 "입방"이 되면 그 위치를 나타내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야 된다

누구던 지적하기는 쉽다.
만주에 있는 장성이나 성의 유적이 당시의 기록이 있어도 왜곡이니 조작이니 변별이 어려운데 논쟁을 위한 것은 필요가 없다.

만주에 안시성이 그리고 북한에 고구려 평양이 있다면 왜 고구려 백제 패망때의 지명이 하북성과 그 남쪽에 있는가 ?
그리고 왜 만주원류고에서 만주가 신라땅이라고 하였을까?
이것을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일제하의 식민사관이나 일제하의 민족사관도 광복후에 국사관도 한반도중심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사로 신라 가라를 우리역사 기록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시조중심사관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평생 후회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연구하여야 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참고) 본 사이트가 송준희님의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한퓨쳐 / coo2.net 송준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