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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책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 (1) - 책소개 >
오늘부터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당나라의 불교 성지를 돌아보고 기록한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대하여 몇가지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정사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신라방"이 1833년에서야 일본에서 소개된 이 책자를 근거로 한반도에서 신라가 중국으로 진출했다는 근거가 되어 교과서에
등재되어 교육을 하고 있는 현실이 되버렸다
중국에서 신라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나오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반도에서 진출하였다는 근거가 필요해 ○○놈들이 조작한 것은 아닌가 ?
아직도 ○○놈들의 잔재에 허우적되며 빠져나오질 못하는 한심한○○들의 분발을 촉구해본다
이책을 분석해 보노라면 원인의 "원본"은
물론 있었겠지만 18세기에 소개되면서 수많은 가필을 통하여 조작한 흔적이 한두군데가 아니라는
부분이 문제점이다
특히 이책의 기록은 중국 - 한반도 - 일본의
행적기록이 아니라 중국태행산맥 서쪽 - 산맥동쪽 - 대만으로의
행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왜 그러한지는 본 홈페이지 본문을 눈여겨본 네티즌들은 금방 인지 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본 내용을 읽기전에 AD670년 이전 "왜"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는 본문 내용을 "왜"라는 글자 검색을 통하여 읽어보시고 이내용을 보시길 권합니다
양자강 이남의 "왜"가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면서 ?겨난 고일본땅 "대만"의
역사를 밝힐수만 있다면 동양삼국의 고대사는 새로 작성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여간 원인의 "입당구보순례행기"는 18세기에 엄청난 가필을 거친 "소설책"인 것 같다
왜 그러한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많은 참고바랍니다
우선 책자 및 저자에 대한 소개를 먼저합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 >
☞ 출처
: 야후 백과사전
-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당나라의
불교 성지를 돌아보고 기록한 여행기.
- 발간연도 : 838∼847년
9세기 전반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기록한 정치사 문헌이자, 불교사의 한 측면을 전하는
귀중한 문헌이다.
838~847년까지의 기록을 모두 4권으로 엮었다.
- 1권은 838년 6월 13일부터 847년 4월 18일까지의 기록이며,
- 2권은 그 이후부터 840년 5월 16일까지,
- 3권은 843년 5월 25일까지,
- 4권은 847년 12월 14일까지의 기록이다.
1권에는 엔닌이 일행과 함께 장안으로 떠났다가 자신만 따로 떨어져 구법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적었고,
2권에는 적산법화원에 머물면서 천태산(오대산) 여행을
한 내용을 기록했다.
3권에는 천태산 성지를 순례하며 일본에 전해지지 않은 문서와 그림을 구하고, 장안에
머물며 문헌을 필사한 뒤 838년 귀국을 신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4권에는 중국의 사대법난 중 하나인 회창(會昌: 당
무종때의 연호)의 폐불 이야기가 나온다. 엔닌은 이
때 환속 명령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는 부분은 2권과 4권으로,
특히 2권에는 당시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원 소유의 논에서 생산되는 쌀은 1년에
500석이었고 겨울에는 《묘법연화경》을 , 여름에는 《금광명경》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승려는 모두 30명이었으며 그 중 일본인은 6명이라고
적혀 있다.
중국 대륙에 관한 여행기는 이 책 이후에도 여러 종 나왔으나 광범위한 지역을 돌아보며 9년간에
걸쳐 기록한 예는 없다.
불교사 연구뿐 아니라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치와 교통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 엔닌 圓仁(원인) [794~864] >
- 일본 헤이안시대의 승려.
- 호 : 시호 자각
- 국적 : 일본
- 활동분야 : 승려
- 주요저서 : 《입당구법순례행기》
당나라로 건너가 밀교를 받아들인 구법승으로 스승 사이초[最澄]가 입적한 후 수행과 후학 지도에 힘쓰다가 당나라로 건너갔다.
838년 양주에 도착하여 개원사 전아에게서 금강계대법을 받고, 용흥사 양원에게서
관지의 궤를 계승하였다.
이후 천태산을 순례하려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해 귀국하던 중 역풍을 만나 귀국하지 못하고 다시 10년간을 중국에서 생활하며 원정에게서 금강계전법을, 의진에게서
태
장 및 소실지전법을, 법전에게서 태장계전법을 받았으며 범어와 범음을 배웠다.
회창(會昌)의 폐불 때 당의 무종이 천태산
참배를 금지시키면서 승려들을 환속시키자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의 도움으로 846년 귀국길에
올랐다.
이 때 584부의 전적을 가져왔으며 그 중 300부가
밀교 계통이었다.
귀국후 일본의 귀족들을 대상으로 밀교의 비법을 전하였고 854년부터 10년간 천태좌주(天台座主)로
있다가 864년 입적하였다.
자각(慈覺) 대사라는 시호가 내려져, 일본 최초의 대사(大師)에
올랐다.
저서로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있다.
< 신라역어 新羅譯語 >
일본이
815년(헌덕왕 7)에 둔 신라어 통역관.
분명한 설치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는 데서 설치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으나 그보다는 당시
신라의 대외적인 역할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신라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장보고(張保皐)의
해상활동과 당나라의 신라방을 중심으로 막강한 외교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 견당사(遣唐使)의 구성원
중에는 빠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단순한 통역만이 아니라, 실무차원의
교섭과 주요안건에 대한 조언도 수행하였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면 이 관직에 신라인이 임명된 경우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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