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 소설책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 - 이상한 부분>
1. "신라방(新羅坊)" 인용근거『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이상이 있다
1883년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한 '신라방'은 황해 동쪽에 있던 신라에서 황해 서쪽을 전부 통일한
당(唐)의 땅으로 신라인이 가서 살던 집단거주지를
이르는 말이라고 전하여 왔다.
그런데 1883년 이전에 기록된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 구당서』등 어느 기록에도 반도에서 황해 서쪽으로 진출한 신라방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1883년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신라방'이라는 것이 새롭게 부각되었고 광복 이후는 우리역사
교과서에서 더욱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는 황해 서쪽이 전부 지나족(한족)의
당(唐)나라만이 존재하고 황해 동쪽에는 신라가 존재했다는
전제하에 연구되어 왔던 것으로 사서에 충실하게 연구되었다 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1883년 이전의 정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기록이 어떻게 갑자기
생기게 되었는지에 촛점을 두고 이제 새롭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앞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신라방'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로써 제시하는 것이 "입당구법순례행기"이다.
원인(圓仁)의 여행기로 되어 있는 이
책을 랴이샤워(EdwinoReischauer)는 '극동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기행문'이라고 찬사를 했다고 하는데
1600개의 주석을 붙여 번역하였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세계 3대 여행기중의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13세기 이후 사서와 일치하지 않는 동양 각 국가사관에 의해서 맞추어온
현대의 역사인식에 의해서 해석했을 뿐이지 동양역사를 밝히고 그에 의해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번역했던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사 어느 곳에도 '신라방'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구(字句)의 해석은 됐을지 모르지만
전체 동양 역사 즉 우리역사에 걸맞게 해석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방'이 있었다는 곳의 황해 서쪽에는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斯盧新羅), 왜(倭) 등
동이족과 한, 수, 당 등 한족과의 전쟁 관계 지명이
있고 지명이 일치하는 고지도와 현지도에 존재하고,
삼국의 일식관측, 인구변동, 특산물생산지, 큰물(홍수), 무역일정
등으로 동이의 존재가 밝혀지고 있음에도 황해 서쪽이 모두 지나(한족)족 당이 있었다고 믿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우적도(禹迹圖)』와 『송본역대지리지장도』와
『25사』동이관계 기록과 『삼국사기』『삼국유사』『호태왕비(碑)』 및 현 아시아 지도가 있는 한 '신라방'에 대한 진실은 밝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라방' 근거로 인용되는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새롭게 분석하여 보았다.
1) 1883년에 발견된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마지막 필순에 문제가 있다
어느 문장이든지 끝까지 보고 감상문을 첨가한다든지
복간을 할때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년대가 기록되는 것은 상식이고 당연한 것으로 본다.
즉 필자 이외는 최초 완성이후 먼저 쓴 사람이 앞 시대 사람이고 앞 시대 사람이 먼저 손을 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는 저자 이외의 필순이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 명덕2년(1391)10월 일
모두 네 두루마리를 읽었다. 참으로 기쁘고 기쁘다.
법인권대승 현보 59세
▒ 정응 4년(1291) 10년 26일
장락사의 방에서 노안으로 이 글을 모두 베꼈다.
원문을 보고 베낀 것이지만 후세 사람들이 증본을 가지고 교열을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법인대화상이 편조금강 겸인72세 베낀 것을 교열하였으며 의심나는 것은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이위승정관원의 필사본이다.
▒ 문화 2년(1805) 2월 13일
비예산반실곡송성원에 있는 어본과 비교하여 필사를 마치다.
혜인산율 김교사 주지 법인대승도 장해씀
위와 같이 1391년 - 1291년 - 1805년 순으로 뒤에 기록하는 사람들의 필순이 시대순으로 기록되지 않고 뒤바뀌어 있다.
(1) 필자이외의 첨가 기록에서 세월의 흐름을 역행하는 필순이 있다는 것은 본『순례행기』가 언제
작성되었는가 하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본 여행기는 838-847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뒤 첨가가 되었다면 당연히 1391년 보다 1291년이 먼저 기록되어야 하고 다시 필사를
한다 하여도 나중에 기록된 년대가 먼저 기록되게 필사를 하겠는가 ?
1291년보다 1391년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은 제일 마지막으로 기록된 1805년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진짜 여행기인지 아니면 어떤 여행기를 토대로 재구성된 작품인지 의심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2)『신, 구당서』『삼국사기』에도 없는 '신라방'이 본 여행기에 있었다는 것은 마지막 필순이 다르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와 당시대에 가장 가까운 기록인 『신, 구당서』와 『삼국사기』에 '신라방'이 있다는 기록이 없고 『삼국유사』에도 없는데 본 여행기에만 있었다는 것은 사료적 가
치를 판단하는데 본 여행기에서 필순의 역행은 의심을 할 수밖에 없고 정사(正史)를 완전하게 번복하는 것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3) 현재의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공식적으로 쓴 것은
1403년 이후라고 중촌영효(中村榮孝)가
쓴 『조선통신사』에서도 밝히고 있는데
당과 신라시대 일본인의 여행기로 되어 있어
귀중하다면 발견 당시 공표할 것이지 1805년 가필하여 두었던 것을 1833년에 발견하고 80년후에 공표되고 있는 것과 필순이
역행하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일본서기』에서 국호를 일본 전체 지역을 지칭했다는 기록이 없고 부분으로써 등장하고 있으며 『당서』와 『삼국사기』에서 왜(倭)가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한 고대일본(670년)의 위치가 양자강 이남으로 보여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4) 필순이 바뀔 수 있는 것은 여행기가 아닌 회상적 소설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닌지, 또한
초서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역사를 정립한 이후에 새롭게 풀이해 보아야 될 것 같다.
< 다음시간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