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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책 입당구법순례행기 (4) - 이상한 부분(2)

2002-06-22 10:18:54


제목

제목: 일본소설책 입당구법순례행기 (4) - 이상한 부분(2)

등 록 자

송준희

날짜

2002-06-22 10:18:54

   

2) 일기 또는 여행기로서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일기는 시간 속에 살면서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상식이고 여행기 역시 날짜의 연속성이 일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연속해서 기록될 수밖에 없고 회상할 때는 내용에 있어서 몇 일전 또는 그제 어제 등을 명시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날짜가 바뀌고 중복되고 월만 있고 날짜가 없는 것 등 일기로써 기본이 빠져 있다는 것은 일기나 여행기가 아닐 수 있다는 강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1)
날짜의 순서가 바뀐 것

(??)
개성3(838) 7 2일 뒤에 7 1일의 일기가 있다.

일기에서 뒤의 날짜가 먼저 기록되는 ""는 회상할때 뿐이고 일기에서 항목으로 될때는 전날의 일기가 뒤에 추록식으로 기록될 수는 없다.

(??)
초하루 이전에 그 달의 날짜 없는 일기가 있다.

회창5(845) 4 1일 이전에 4월 항목의 일기가 있다.

4
1일 이전에 일기가 쓰여졌다면 3월의 마지막에 쓴 날짜가 기록되는 것이 상식임에도 이곳에서는 41일 이전에 4월의 일기가 항목으로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일기도 여행기도 회상기도 이렇게 쓰일 수는 없다.
다만 소설 작품일 때 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2)
월만 기록되고 날짜가 빠진 것.

-
회창4(844) 2, 3, 4, 7, 8, 9, 10, 11
-
회창5(845) 4, 9
-
회창7(847)정월 2

일기를 쓴 날짜가 없으니 일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 달에 한번을 쓰더라도 그날의 날짜를 쓰는 것이 상식인데 날짜가 없는 일기가 있다는 것은 회상기나 소설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닌가 ?

일기의 형식을 빌어서 소설이 쓰여진다 하여도 한 달에 한번 쓰면서 쓰는 그 날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내용이 비슷한 것 또는 같은 날짜의 일기가 중복하여 기록되어 있다.

개성5(840) 4 28일이 두번, 4 29일이 두번,5 1일이 두 번, 5 2일 이 두번, 5 5일이 두번, 5 14일이 두번, 5 16일이 두 번, 회창4(844) 7 15일이 두 번

위는 같은 내용의 일기가 당일 두번씩 중복되는 예가 있다면 순례행기뿐이라 할 것이다.
내용이 전혀 다르다면 중복되게 추가로 기록 할 수도 있을 것이나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내용의 일기가 중복되어 기록되었다는 것은 일기로서나 여행기로써 있을 수 없는 것이다.

(4)
이틀이 하나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
개성4(839) 5 17 18 , 7 10 11 ,
-
회창7(847) 9 67 (9 6일의 일기가 따로 있다.)

어제 일기를 못쓰고 오늘 쓴다면 오늘 일기 항목에 어제의 일을 기록하면 그만인데 두 날짜를 하나의 항목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와 같이 일기로서나 여행기로써 최소한의 여건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 이것은 어떤 기본 되는 작품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도 있고 『삼국
지연의』와 같은 작품을 만들 때도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의도하는 대로 황해 서쪽을 당나라가 모두 통합하고 황해 동쪽 신라에서 황해 서쪽으로 장보고가 진출했다는 것이 사서에서 일치된다면 이해될 수도 있으나 『25사』동이전이나 『삼국사기』 또는 고지도에서 9세기 이전 사로신라 백제 왜는 황해 서쪽에 있음이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위와 같이 일기로써 갖추지 못한 것은 변형된(?)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은 당과 같은 시대에 있던 일본은 『삼국지』동이전에서 『남사』까지의 왜가 670년에 국호를 변경하였는데

이 왜는 진번<珍播(眞番)>의 동쪽인 남월(南越 :담이:?) 주애(朱崖), 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 이주(夷洲), 단주(?)사이인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음에도 이 기록을 현재의 일본역사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구성하려 해도 거짓일 때는 허점이 있고 발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참고지도 : 후한서 삼국지 배열도 >





3) ()때 사용되지 않은 도()명칭이 있다.


(1)
당나라 행정구역을 10도로 나누고 있는데 『신,구당서』에는 다음과 같다.

-
일왈 관내도(關內道), 이왈 하남도(河南道), 삼왈 하동도(河東道), 사왈 하북도(河北道),
-
오왈 산남도(山南道), 육왈 농우도(籠右道), 칠왈 회남도(淮南道), 팔왈 강남도(江南道),
-
구왈 검남도(劒南道), 십왈 영남도(嶺南道)

위와 같이 10도로 나누어 있으나 무주 복주(撫州 福州) 지역에 있는 복건성 정주(汀州)를 신라(新羅)가 다스렸다 하였고 당과 고구려 백제 신라와의 경계는 은산 고대인성 신성 평원 동명 항성 덕안 정주이고 서쪽은 당이 동쪽은 동이 강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 여행기에는 관내도 하동도 하북도 산남도 농우도 회남도 검남도 영남도 강남서도의 기록이 있으나 정사에는 10도에 강남서도의 기록이 아니고 강남도이다.


(2)
『신 구당서』에 없는 절서도 절동도(浙西道 浙東道)가 있다.

개성4(839) 정월 15일에 절서도와 절동도의 기록이 있다.

당나라의 도 명칭에 없는 절서도 절동도는 송() 이후의 도()명칭에는 있다.
그렇다면 宋 이후의 작품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3)
지명이 속하는 도()가 『구당서』와 다른 것이 있다.

하동도는 개성5 7 13일 일기에 등장되었는데 태원(太原)부가 이에 속한다.
태원은 태행산맥의 서쪽에 있다. (태원의 동남쪽에 노성(鹵城)이 있다.)
그렇다면 하동은 태행산맥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하북도는 개성 8 9 13일 일기에 있는데 노부(潞部)가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노성(潞城)은 태행산맥의 서쪽으로 되어 있고 『구당서』에서 노성은 하동도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하북성과 하남성 일부가 태행산맥 동쪽을 의미하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태행산맥 서쪽에 하북도와 하동도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개성 3 9 13일 양주는 회남도에 있고 태주(台州)는 강남서도에 있으며 또 태주는 영남도에 있다고 하였다.

태주가 속한 도가 왜 각 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가 ?
우적도에 있는 태()가 현재 절강성지역에 있으며 台의 발음이 ', , '이므로 영남에 있다는 이주(夷洲)도 태주(台州)로 쓰였는지도 모른다.

없는 도가 있고 도에 속한 지명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여행기에 전체적인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예측 할 수 있다.


4)
지나(진한)<支那(秦漢)>의 나라 이름에 혼선이 있다.


극동에서는 17세기까지도 나라 이름에 대국(大國)은 국()을 사용하지 않았고 국소적인 지역에 국을 사용한 ''가 한전(韓傳)에 실려있다.

우리민족 국가를 이름을 보면 구리(九黎), 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낙랑 ,, 일본, 고려, 발해, 조선 등이다.

지나족은 하 주 진 한 진() 위 오 촉 송 양 제 송 명 이라 하였다.
그러나 본 여행기는 당나라를 당 또는 대당(大唐)과 함께 중국(中國)이란 말이 같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중국(中國) 개성3(838) 9 11 , 11 27

명나라 이전에는 중국이란 국호가 없었음에도 중국이란 국호를 사용하였으니 전체적으로 문제가 있다 할 것이고 진위 여부를 해결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국호가 당나라인데 적어도 그 당시 여행기에서 중국이란 호칭의 사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이때의 중국(中國) "중부에 있는 나라" "중앙에 있는 나라"로 해석될 수 있고 이는 우적도의 범위 즉 현중국 땅의 가운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나라 이후 지리적으로 지구의 중심이라는 사상이 있던 때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5)
사기(史記) 주석에도 없던 황하와 양자강 이름이 사용되었다.

황하는 당나라 때까지도 『史記』권2의 주석에 의하면 하수 하수 한강 한수 면수 진수(河水 夏水 漢江 漢水 沔水 晉水) 양수 등으로 불리웠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河水(하수) 한수(漢水) 한강(漢江)으로 불리웠다고 『삼국사기』 蓋鹵王(=위로왕)전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도를 나눌때도 하동 하남 하서로 불렀고 양자강 역시 강수(江水)로 불렀으며 강남도 강서도라 불렀다.

그런데 하수(河水)를 황하(黃河)로 기록한 것이 있으니 어찌된 것일까 ?

황하
-
개성4(839) 9 1
-
개성5(840) 411 78, 81,812,813


양자강은 대강(大江)과 양자강으로 쓰고 있다.

-
大江 개성3(838) 628, 7 1
-
양자강 개성4(839) 4 2

황하는 당이후 송에서 역사를 정립하면서 황제가 다스리던 하수 또는 하나라 황제가 다스리던 물이라는 뜻으로 당나라 이후 황하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송나라 때 만든 우적도에 있다.

당나때는 현 양자강을 "양자강"이라 하지 않고 송나라에서 제작된 우적도에도 "강수"라고 표기되어 왔는데 그 후 저()가 살고 있는 곳에서 흘러 양주(揚州)까지 흘러가므로 양즈강이라 한 것 같다.

이 모두가 송나라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
다음시간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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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퓨쳐 / coo2.net 송준희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