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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전 선생님 홈페이지 자료를 인용 소개합니다
홈페이지 주소 http://www.cheramia.net
<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 「환단고기」 서문 전문공개 (2) >
<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일본에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소개한 가시마
노보루는
일본사의 혁명적인 대륙사와 문명서래설을 보여준다.
다음의 「환단고기」 서문 내용 중
- "북왜, 남왜설"에
대한 내용과
- "<단군세기(檀君世紀)>-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내용 및
-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에 대한 내용,
- "「단군세기」-왜한(倭韓) 양족과 솔로몬의 선단",
- "<북부여기(北夫餘紀)>-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에 대한
대륙사관적 견해를 들어본다.
중요한 것은 이 학설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 전에
가시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환단고기」를 100% 인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사를 북왜설과 서래설의 대륙사로 끌어올리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사관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국내 **지 ** 사학자들에게
좋은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참고로
그간 강단 **사학자군과 재야 민족사학계 사이에 「환단고기」의 진위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어왔음에도 막상 일역판 환단고기의 역자 가시마가 쓴 다음의 내용은 필자(안원전 선생님-운영자 주)가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두번째 글
<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단군세기> 제 35대 단군 사벌(沙伐)의 무오 50년 조는
'제(帝),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파견하여, 해상의 웅습(熊襲:꾸마소, 구마모또)을
평정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언파불합이란 우리나라(일본)의 우가야 "우가야 후끼아에즈"로,
정확히는 우가야 1대왕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이다.
우가야 후끼아에즈가
「일본서기」에는
"언파렴무로자초집불합존(彦波 武 草葺不合尊)」이 되고,
「고사기(古事記)에는 "천진일고일자파한건제집초집불합존(天津日高日子波限建 葺草葺不合尊)」이 되는 것은 유아라도 알 수 있다.
「구사기( 事紀)(3중판))에는,
「로자초집불합존( 草葺不合尊)」이 되는데,
삼서(三書)는,
우가야 왕조의 전대(全代)를 1대에 압축하여, 신무(神武)의 부(父)를 1인의 우가야 왕으로서, 소위 "키세르 계도(系圖)"
를 위조한 것이다.
< - 잠시 보완설명 인용 - >
정일영은 「고대사 동방대제국」에서 언파불합의
꾸마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나라가 망한 후 은의 덕망 있는 신료가 주나라에 항복해서 봉작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은나라의 당시 선진의 도덕성은 그와 같았으며
은나라 사람들이 그 당시 부른 시에도 오랑캐(周나라)가 침입하여 물리칠 수 없는 터에
유왕이 色情에 침적하여 충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 한다고 한탄하였다.
기자를 朝鮮王에 봉했다는 변조는
당시 무제가 한 4군을 설치했다는 역사 날조를 하기 위하여 안사고에게 강요했음이랴 !
아니면 후기에 당태종이 한 짓인지.
안사고는 문제가 역사를 변조하면서 {시전} {서전} 등에 기록을 모조리 없애는 작업을 소홀했다.
이러한 고서 기록이 남아 있음으로서 역사를 바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무왕이 조선왕을 봉했다는 것과
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두 가지 허위 사실을 모든 후세 역사 기록에 강조하여
古代 東夷 군자국의 문화 사회에 뒤떨어진 국민의 열등감을 씻고자
이를 항상 앞세워 기술하는 역사 서적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일제 식민 교과서는 이를 근거로 한층 조선 고대사를 말살하여 일본사를 위조하고 이것을 근거로 삼아 식민 사관을 보급하였다.
여기서 부동한 식민 사관이 생겨
신중한 古代史 記錄을 참고 없이 국민의 역사관을 오도한 것이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면서도
기자나 伯夷 叔齊같은 주나라에 불복하고 봉작도 받지 아니하는 인사들을 충절 지사라고 찬양하는 철학자로서 충효 사상의 윤리 도덕을
존중하는 성인이였다.
당시 주나라 사람들이 무왕을 성군이라 하였으나
공자는 무왕이 무력으로 통일을 했다고 왕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무왕은 각부 추장들을 그대로 두어 조선 제국 제도를 본따 제후에 봉하고 주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이 되게 하고 종주국으로서 관할권을
가졌으며
제후 추장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주왕의 딸들을 시집보내여 사돈을 삼았다.
비빈이 많았으니 딸도 많았을 것이다.
주왕의 딸은 姓이 姬氏니 王姬라고 불렀다.
그리고 타고 다니는 수레와 입고 다니는 옷은 화려한 성장이였다.
(周王之女姬姓故曰姬下嫁於諸侯車腹之盛 {侍典})
주왕은 제후 추장들에 가혹한 조공을 받지 아니하고 종주국으로 인정케하는 것으로 그치고 은나라 국민도 반항자를 학살하지 아니하고
노예로 포섭하여 차츰 주나라에 동화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가들은 그를 역시 성군이라고 호칭하였다.
공자는 물론 올바른 인군이 아니라고 평하였다.
이 때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 영토를 중원의 중심 지역뿐이고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성과 황하 일대는 모두 대단군
영토였다.
단군세기({환단고기})에
BC 909년 제30대 단군 나휼(나휴) 천왕이 청구(靑丘, 수도)의 정사를 살피고
치우천왕의 공덕을 돌에 세기고
서쪽으로 엄록홀에서 列國汗들이 모여 열병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며
흉노가 조공을 받쳤다고 하였다.
BC 723년에는
웅습(熊襲)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 언파불합을
海上의 熊襲에게 보내 평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는 後記할 것이나
해상이라 함은 倭國에 위치한 큐슈(九洲) 쓰시마(對馬島) 이키(臺岐) 시곡(四國) 등 4개 섬을 말하며 거기 강력한 추장 구마소(熊襲)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토벌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 일본의 역사책은 이것을 일본의 고대사에 편입하여 일본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倭國의 고대 인명에 무슨 마로(磨呂), 무슨
미고도(尊), 무슨 히꼬(彦)라는 것들은 당시 그곳의 통치 계급인 조선인이다.
日本史에 熊襲을 구마소라고 하는 것은
熊襲 즉 곰습을 일본 발음으로 구마소라 부른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 웅습에 관한 기록은 물론 후세에 와서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 반도에 인적이 드물고 남부 해안 지역에 약간의 사람들이 살고
거기서 가까운 일본 열도의 서남단에 있는 구주 지방과 교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단군 제국의 월주지역 (上海 부근)과
행상으로 통하여 단군 제국 광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는
반여언(磐余彦:神武)을 이도국(伊都國) 왕(王)으로 하는데,
「세기(世紀)」의 언파불합(彦波弗哈)은,
단군 사벌(前(B.C.) 711-643)의
시(時), "해상의 웅습(熊襲)을 평정한" 왕이므로,
멀리 후세, 왜의 대란당시의 이도국왕(伊都國王)·신무(神武)의
부(父)일리가 없다.
따라서 「세기(世紀)」의 기술은
우가야 후끼아에즈를 한 명의 왕이 아닌 일계(一系)의
왕조로 하는 『상기(上記)』『궁하(宮下)』 등이 옳은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세기(世紀)」는
언파불합(彦波弗哈)을 신무시대가 아니라, 전(前) 8-7세기의
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이 왕은 우가야조(朝) 초두(初頭)의
왕이다.
그런데, 『궁하문서(宮下文書)』는
제 1대 우가야 왕을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으로 기록하고,
이 왕명(王名)은 3서에 비교하면 가장 언파불합(彦波弗哈)과 유사하다.
즉,
1)언(彦)이 일자(日子)
2)파(波)가 파(波: )
3)불(弗)이 무(武)
4)합(哈)이 (言) 합(合)과 도일하고,
2)에서는 파(波)와 염( ),
4)에는 언(言)과 합(合)이 동어(同語) 중복되어 있다.
전부터 나는,
본서(환단고기)를 인식하기 전에,
졸저 「실크로드의 왜인」에서 우가야 제 왕의 왕대를 고증했지만,
거기서 추리한 우가야 1대 왕과 이의 언파불합(彦波弗哈)과는, 거의 거의 같은 시대였다.
이와같은 「세기(世紀)」와 『궁하문서(宮下文書)』에 있어서의 우가야 1대왕의 연대 및 왕명(王名)의
유사는,
전혀 별개로 전해진 양서(兩書)의 신뢰성이, 함께 극히 높은 것을 보여준다.
시험삼아 왕명(王名) 만을 들어도,
후의 후의 3서(書)의 왕명(王名)은, 언어학적으로는 『궁하문서(宮下文書)』의 왕명(王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편,
저는 졸저 「실크로드의 왜인」에서,
우가야 1대왕이 우랄토의 영주(英主) "아르기슈팃슈"라고 지적했다.
대저 언파(彦波)는 겐하도, "하(아르)기"의 역기(逆記)이고, 불합(弗哈)은
훗사흐-휫슈여서 이 네 글자를 합계하면, 아르기슈팃슈가
된다.
그 위에, 『궁하문서(宮下文書)』는
우가야 1대왕의 어린시절 이름(幼名)을 「아조남명(阿祖男命)」으로
하여, 아르기슈팃슈의 "아르"를 나타내고,
그 왕명(王名) 을 「가기도왕명(家基都王命)」으로 하여, 아(카)르기(키) 슈·릿(츠)슈라고 표음(表音)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이의 한자(漢字)의 선택방법은 표음적일
뿐 아니라, 표의(表意)적이기도 하여,
어의(語義)상으로도 아르기슈팃슈를 가리키고
있다.
1)언(彦)은 재덕(才德)이 뛰어난 남자 또는 그 미칭이다.
2)파(波)는 존자(尊者)의 경칭(敬稱)이다.
「오선록(吳船錄)」에 "촉중(蜀中), 존노(尊老)의 자(者)를 칭하여 파(波)가
된다.
조(祖) 및 외조(外祖)는 모두 파(波)라고 부른다.
또한, 소위 천파(天波)·일파(日波)·월파(月波)인 자(者) 있다"고 되어있다.
1)·2)를 총합하면,
<언파(彦波)>는 재덕(才德)있는 조왕(祖王)이라는 게 된다.
3)불(弗)은,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불기(弗忌)는
희성(姬姓)이다.
진(晋)의 대부(大夫) 난불기(欒弗忌)의 후(後)가 된다고
하여, 함께 불성(弗姓)이 진계(晋系)의
성(姓)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별도로, 「만성통보(萬姓統譜)」에는, "불롱(弗 ), 인속(印 )을
보다"로 되어있고,
「위서(魏書)·관씨지(官氏志)」에는, "후에, 위(魏)의 출불(黜弗)씨, 철불(鐵弗)씨, 연불(燕弗)씨, 모두, 다시 불(弗)씨가
되다"라고 되어있다.
4)합(哈)은 「정자통(正子通)」이, 「합(哈)은 외국 성(姓)이다.
범서(梵書)에, 합(哈)은 알와번( )이라 읽는다고 쓰여있다.
나는 졸저 「한반도의 우가야사」에서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가 단군왕조의 왕과 함께, 3진(三晋)의 조(趙)의 왕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고 있던 옛날의 한자(漢字) 사용자가, 아르기슈팃슈를 언파불합(彦波弗哈)으로서 한자(漢字) 표현 한 것은, 어의(語義)에 따른 것이 아닌가.
그 후, 『궁하문서(宮下文書)』의 "일자파렴무언합(日子波 武言合)"이,
「기기(記紀:고사기,일본서기)」나 「구사기( 事紀)」의 왕명(王名)으로
변화한 과정에 대해서는, 장래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연구되겠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부언하면,
언(彦)을 히꼬로 읽고, 일자(日子)로
쓴 것은, 히꼬가 원래 병아리의 의미로, 봉(鳳)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
'변하여 새가 된다.
그 이름을 건여골(乾餘骨: 키요꼬·히요꼬)이라고 했다로 되어있고,
병명관우(浜名寬祐)는, '제어(齊語)에는 "키요꼬"라 하고, 국어(國語)에서 "히요꼬"가 된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언파불합(彦波弗哈)"에 관계된 기록은, 「왜인흥망사」제 25, 6장에도 나와있다.
- 제25장 ;
무백산군기(武伯山軍冀)에, 규합하여, 남으로 도파(跳破)할 때,
때때로 영의추기(寧義 其)의 주사(舟師) 및 노족(弩族:쇠뇌족)을 투림( 淋)에서 만나다.
고령(高令), 나라를 들어 전주(前走:앞으로 나가)하고, 노래하길,
단납번(鄲納番), 달모맹(達謨孟). 가찬금(珂讚 ), 운질맹(隕 孟). 이삭솔진모검돌(伊朔率秦牟黔突). 압나남왕명맹(壓娜 旺鳴孟). -
무백(武伯)의 산군(山軍)이 병사를 정비하여 남하할 때,
때때로 니기씨가 그의 군선(軍船)과 궁병(弓兵)을 갖고 해변에 도착했다.
고령(高令)이 나라를 들어 선진(先陣)을 모아 노래했다.
'옥의비녀(玉依比女)가 원수를 무찌르다.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은 원수를
쫓다'
- 제 26장 ;
무백(武伯)이 쫓아 하막차(夏莫且)를 얻고, 영의추(寧義 )를 베어 묻다.
제족(諸族) 희약향(喜躍響) 응(應)하다.
전(傳)하여 유우입(兪宇入)의 주살(誅殺)이라 한다.-
「환단고기·세기(桓檀古記·世紀)」와의 조합(照合)의
결과,
이소스스의 명(命)이 언파불합(彦波弗哈)인 것을 확실히 했다.
앞서서 서술한 것처럼,
언파불합(彦波弗哈)은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여서,
약음(略音)한 "기스티스"가 사투리로 "이소스스"가 되었다.
아르기슈팃슈 1세는
전(前) 780년경, 즉위하여
반 호안(湖岸)에 새겨진 「호루호루 연대기」에
의하면,
메누아슈 뒤를 이어 디아우에히로 원정(遠征)하여,
코르키스 남부국경을 거쳐,
치르도일 호(湖)와 쿠르 하(河) 상류로 나아가,
아라가츠 산을 돌아 아라쿠스 하곡(河谷)을
거쳐 귀환했다.
전(前) 774년,
왕은 디야라 하곡(河谷)에서 앗시리아군과
충돌하고,
더욱이 자카후카스, 우르미아 호안(湖岸) 지방, 앗시리아 변경 속주(屬州)에,
재삼 원정하여, 그때, 1년간 3만인의 노예를 노획했다.
여기서 "쿠만"은 무엇일까.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 1세가 앗시리아 왕 샤르마네사르 4세(前782-773)를
격파한 것은
주사(周史)에서 '견융(犬戎)이
유(幽)왕을 죽였다'고
되어있어,
"쿠만"이란 유왕(幽王), 즉 "샤르마네사르→카르마네소루"이다.
이것이 '해상(海上)의 쿠만이 된 것은,
전장이 반 호(湖), 또는 우르미야 호(湖)였기때문이 아닐까.
-호(湖)에서 수군이 싸우고, 페니키아인(니기氏)이
우랄토에 참가했다는 추리이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주(周)의 책명금문(冊命金文)의 관습(習)이 유왕(幽王) 후에
끊어져 없게 된 것은, 앗시리아(周)가 우랄토(견융)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단군세기」와 「마한세가」는, 전(前) 7세기경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이 전선(戰船) 500을
데리고 왜인의 반란을 평정(定)했다'고 했다.
협야후(陝野侯)가
「왜인흥망사」의 "니기시"이고,
"완(宛)의 서(徐)"이고,
중국사의 예왕(濊王)이고,
「구사기( 事紀)」의 니기하야히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때의 "왜인의 반란"이란
것은 갠지스 유역의 사건이 아닐까.
인도 최대의 왕조는
반도족(바라따족,쿠르·판차라족)의 왕, 파시쿠시토로
전(前) 9세기 경의 쿠르국의 왕였다.
이 왕조가 쇠퇴하자,
전(前) 7세기경, 비데하 8국의 자나카 왕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중의 왕을 의미하는 사무라이(統王)로
불렸지만, 이것은 일본어의 사무라이의 어원이 되었다.
(저자는 백제의 싸움아비에서 나온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의 역사를 서래설에 꿰어 맞추다 보니 이러한 얼토당토 아닌 사실까지
유츄해 내고 있다. 다음을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이누족에 한반도 계와 남방해양족이 섞인 하이브리드
튀기족인 그로서 그저 역사가 오래만 된다면 이곳 저곳에 끌어부치려는 의도에 오히려 환단고기의 정통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다 : 안원전 주)
비데하 8국의 주변에는 쿠르국, 판차라국, 카시국, 코사라국 등이 있고, 마가다국은 아직 유력하지 않았다.
이중에 우선 강대해진 것은, 바라나시(베나레스)를 수도로 하는 카시국이었다.
이 나라는 원래 바라타족의 왕가였지만, 비데하 8왕가에서
분리된 브라흐마닷다 왕조가 되고, 아자타샤토르가 왕이 되었다.
또한 코사라는 아우도를 도읍으로, 그 왕은 이크슈바크 왕의 말예(末裔)라고 칭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 의하면, '카시국은 맛라키족(마라족)의 9인의 왕이 통치하고, 코사라국은
릿차비족(밧지족의 상류계급으로 카시국의 왕비의 후예이다)의 9인의 왕이 통치했다'고 되어있다.
「본생담(本生譚)에는
'카시왕 브라흐마닷다가 코사라 왕을 죽이고,
그 비(妃)를 빼앗고,
앙가국의 도읍 포타리를 뺏고,
또 바라나시의 왕(카시왕)마이자가, 코사라, 앙가, 마가다
왕을 정복했다'고 한다.
카시국은 장기적으로 서로 패권을 유지했지만, 후에 코사라 왕 카무사에 병합되었다.
한편,
코사라의 수도 아우도는 페니키아인의 일파 아르와도 인을 어원(語源)으로 한다.
또한 카시의 지배자 맛라키족(마라족)은, 니기하야히의 선장 "아마츠마라"의 일족이지만,
국명(國名)의 카시는 문다어족 계 카시족의
땅을 의미한다.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 또는 "니기하야히"를 페니키아 왕으로 읽고,
코사라왕이 되면, 니기하야히의 선장이 마라족였다는 것은, 카시국의 수군이 되고,
그의 인민인 왜인은 카시족 등의 문다계 제 족이 되는 게 아닐까.
프라나에 의하면,
코사라 왕을 의미하는 "이크슈바크의 계보"는, 브라도바라, 브라크사야,우르크사야, 프라이비오마로 읽지만,
이 Pra tiv yoma를 배폐명(裵幣命) 또는 니기하야히로 하고,
아자타샤토르를 아시스키타카히꼬네로 하면, 나의 반설( 說)은 전부 완성되는데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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