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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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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로 안원전 선생님의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 「환단고기」 서문 소개를 마침니다
안원전 홈페이지 주소 http://www.cheramia.net
여러 가지 잡설은 다 생략하고 한가지만 집고 넘어가자면
"가시마 노보루"는 한단고기를 일단 신뢰하고
이용가능한 모든 부분을 자국의 상고사와 연결시켜 새로운 해석을 만드는데 이용했다는 점입니다
진위여부를 떠나 100%로 위서라는 것을 증빙할 수 없는 이상
몇가지 부분을 문제삼아 연구조차 안하고 배척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반대의 증빙자료들이 시간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제 사고를 바꾸지 않으면 큰 곤란을 조만간 겪게 될 것이다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잔재를 더 머뭇거린다면 더 가혹하게 심판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두려워 할 줄알고 스스로 대비해야 할 것이다
다소 생소하고 낯설은 글들이지만 "가시마 노보루"의 글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겨봅니다
이하 전재합니다
<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 「환단고기」 서문 전문공개(7) >
< 「태백일사(太白逸史)·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
일본에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소개한 가시마
노보루는
일본사의 혁명적인 대륙사와 문명서래설을 보여준다.
다음의 「환단고기」 서문 내용 중
- "북왜, 남왜설"에
대한 내용과
- "<단군세기(檀君世紀)>-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내용 및
-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에 대한 내용,
- "「단군세기」-왜한(倭韓) 양족과 솔로몬의 선단",
- "<북부여기(北夫餘紀)>-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에 대한
대륙사관적 견해를 들어본다.
중요한 것은 이 학설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 전에
가시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환단고기」를 100% 인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사를 북왜설과 서래설의 대륙사로 끌어올리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사관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국내 **지 ** 사학자들에게
좋은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참고로
그간 강단 **사학자군과 재야 민족사학계 사이에 「환단고기」의 진위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어왔음에도 막상 일역판 환단고기의 역자 가시마가 쓴 다음의 내용은 필자(안원전 선생님-운영자 주)가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일곱번째 이야기
< 「태백일사(太白逸史)·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
「태백일사(太白逸史)」 제 5는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이다.
그 가운데 3.1신고(神誥)가,
원동중(元董仲) 「삼성기(三聖紀)」 주(注)의 '왜(倭), 진(辰), 여국(餘國), 혹은 횡서하고, 혹은
결승(結繩)하고, 혹은
계목( 木)하다.'라는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결승(結繩)이라는 것은 키프라는
것으로, 원래가 모이 족, 챰 족, 토번(吐蕃) 등의
문자였다.
그 범위는 넓게 태평양 전역에 이르고, 예전부터 충승( 繩), 진경(津輕), 잉카 등에서 행해지지만, 본서에 의해, 왜인, 진국(辰國), 부여(夫餘)도
키프(결승문자)를 갖고있는 것이 판명되었다.
키프가 참파, 충승( 繩), 왜(倭), 진경(津輕), 잉카라는 해인계(海人系)의 문자인 것은 졸저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서술했지만 그것을
인정한다면,
모이 족, 토번, 진국(辰國:濊國), 부여(夫餘) 등은, 이들
해인(海人)에서 문자를 수용하게 된다.
(이 부분은 환단고기를 100% 인정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가시마의
사료 이해 부족과 서래설의 대륙사관을 통한 북왜설의 견강부회적인 측면이 감지되고 있다 : 안원전)
윗트포겔과 휑크는
''거란 치하에서는 주조된 황금제 어패(魚佩)의
신임장은, 모든 점에서 판단하면, 쌍어패( 魚佩)가 되고, 황제
권력의 심볼로써 전쟁 작전의 동원을 위한 부첩(符牒)으로써
사용됐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행해졌다.
원정(遠征)에 들어가기 전에 황금제 어패(魚佩)의 신임장을 주조하고,
이의 반분(半分)은 군대에 송부했다.
군대가 원정을 떠나는 날, 거란(契丹) 왕은 황금제 쌍 어패(魚佩)의
신임장의 하나를 직접적으로 사령관에게 배포했다.
어패(魚佩)의 신임장에 의해 위임된 군대의
진영에 사령관이 도착하여, 사령관은 반분의 신임장을 제시(呈示)하여, 만약 그것이 이미 군대가 갖고있는 다른 반분(半分)과 일치하면, 병사들은
곧 도착한 지휘자를 장(長)으로 하여 원정에 출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시베리아 극동의 고고학」2)
또한 에·베·샤프크노프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前揭書)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여진(女眞)국가의 거대한 무역·수공업의 중심지의 하나인 연해주의, 샤이긴 성지(城址)의
발굴 때, 우리들은 주조된 청동 어패(魚佩)와 녹각(鹿角)을
발견했다.
중형(中形)의 늘어진 녹각의 조상(彫像)은 (도표 A·1), 3호 금속 가공지(加工址)의 흔적인 단상(段狀)을
이루는 광장의 경사면에서 발견되었다.
뿔의 기저부에 아래로 드리워 장식하는(垂飾用) 작은
쥐는 부분이 있다.
대각(袋角)에 표현된 상황에 의해, 예전부터 우리들은 이 골기(骨器)를 각종의 중병(重病)의
몸(身)을 전치(全治)시키는 호부(護符)에
결부시켰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이긴 성지(城址) 출토의 고고자료를
검토하고 있던 게·게·스트라타노비치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어 별도의 견해를 서술했다.
게·게·스트라타노비치의 의견에 의하면,
이 뿔(角)은 해독봉(解讀棒)이고, 이것에
의해 결승문자의 해독때 이음매를 푸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여진의 결승문자의 존재에 대하여 직접 결정적 확증을 갖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다음 사항이 증명되고 있다.
12세기까지 여진은 결국 음절(音節) 문자의
발명까지,
'마치 문자와 같이 작은 목판을 쪼개 나무에 새긴 흔적이 많이 있었다.
계약의 결정(決定) 때 나무에 새긴 결정(決定)은 파기하기 어려운 것으로써 존속하고,
그것을 누구도 범할 수 없다.
어디에서도 모두 명령의 계약에 종속되어있다.
기호는(그것은)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보로죠프)
필요한 경우에, 어떤 중요한 일을 명기하거나 혹은 상세한 기술을 했다.
특히 근린제국(近隣諸國) 사자(使者)의 문통(文通) 때에,
여진은 나무로 만들어진 표(表)나,
혹은 그것에 각각의 일의 상황을 새긴 계산목(計算木)을 사용했다.
(Ma Touan Lin, 1876,p.427∼446)
확실히 상형문자가 이러한 목적을 갖고 쓰이고,
비교적 최근까지, 시베리아, 극동의 많은
제 족 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연락을 전하는 경우에는 (여진-에·베·샤프크노프) 비각(飛脚)을 사용하여, 암창(暗唱)하면서 명령서를 암기한다.…군사적인 것에 관해서 말하면,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모두 구술로 신임된 인물에 전해졌다.
저(彼)가 지령을 전할 때, 개개의 군사적인 것은, 명령으로서 연락을 암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령은 수천 어(語)로 되어있고, 결코 작은 착오도 용납되지 않는다.(보로죠프)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결승문자에 의해 달성된 것에 틀림없다.
사이긴 성지(城址)의 해독봉(解讀棒) 발견의 덕으로, 여진의
아래(下)에서 결승문자가 존재하는 것은, 지금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들의 관계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결승문자가 고대 중국 12세기, 13세기 초에, 여진의
근린(이웃) 몽골(란제젠)의 치하에서도 널리 분포되어있다. 결승문자의 흔적은 금일, 니부히 치하에서도 인정된다.(크레이노비치)
이와같은 키프의 분포영역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반첸 흑도(黑陶)를 뿌리로 하는
성자애(城子崖), 서울, 두만강, 구강(龜岡)이라는 흑도 문화권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양자(兩者)가 원래 해인계(海人系)의 문화라는 것을 의미한다.
<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국본기>
<태백일사> 제 6은 "고구려국본기"지만, 체재(體裁)에서 보면 완본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을 읽으면,
고구려 시대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얼마나 완전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모두(冒頭)에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단군
해모수(解慕漱) 최초로 강재(降在)한 것은 진왕(秦王) 정(政:진시왕) 8년이다.
고리군( 離郡)의 왕·고진(高辰)은 해모수의 2자(子)로,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高辰)의 손자이다.…그리고 서쪽 압록을 건너, 하백(河伯)의
여(女) 유화(柳花)를 만나, 취하여 고주몽(高朱蒙)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 고진(高辰)이 해모수의 2자(子)인데, 성이 다른 것을 생각하면 양자가 아닐까.
「왜인흥망사」제 38장과 조합(照合)하면
고진(高辰)은 흉노(匈奴) 고령부(高令部)의 왕이라는 얘기가 된다.
다음에, '유화 아들 주몽을 이끌고 웅심산(熊心山)에 돌아가다.
목마(牧馬)를 이뤄 아직 몇 마리 안될
때 관가(官家)가 꺼리는 장소가 되고,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와 협보(陜父)와 함께 도망가 졸본(卒本)에
이르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협보(陜父)란 것은 앞서 나온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의 자손이지만,
후에 남하하여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웠기
때문에,
그것이 「고사기(古事記)」의 "니기하야히"로 여겨지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다음에, 광개토왕의 조(條)에,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 이른 곳 왜인을 격파하다.
왜인은 백제의 개(介)가 되다.
백제, 먼저 왜와 밀통하고,
이것으로 신라의 국경을 연합해 침략하다'고 되어있다.
이 부분은 광개토왕 비(碑)에서 이미
익숙하지만,
문제는 '왜인은 백제의 개(介)가 되고, 백제, 먼저
왜와 밀통하다'라는 부분이다.
이 경우,
개(介)란 개첨(介添)이라는 것이겠죠.
다음에 '백제가 왜와 밀통했다'라는 것은
무슨 일일까.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에서 말하는
부여왕 의라(依羅)가 남하하여 왜왕이 됐다.
이것이 숭신(崇神)이지만, 그의 아들 수인(垂仁)이
백제왕이 되어 경행(景行)이라고 칭했다.
이것이 밀통(密通)이라는 것이겠죠.
"칠지도(七支刀)"에는
이것이 '백제왕의 세자 연고가 있어 왜왕이 되다'라고
새겨져 있지만,
졸저 「환무분서(桓武焚書)와 천(天)의 왕조」(「역사와
현대」Vol. 3-1 所收)에서 이미 서술했다.
「구사기( 事紀) 대성경(大成經)」30권
본에,
'진사왕(辰斯王) 흠례(欠禮:예가 부족해)하여
죽임을 당하다'로 되어있어,
광개토왕에게 내응(內應)한 왜인에 의해
살해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후, 본서는
'앞서 협보(陜父) 남한을 달려가 마한
산중에 있다.…협보, 장(將)·혁(革)을 알고,
배로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가…되돌아 아소산(阿蘇山:규슈
구마모토 인근의 유명한 활화산)으로 옮겨(徙) ...여기에 머물다.
이것을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로 하다.
후에 임나(任那:대마도)를 병합하여 연정(聯政)하여
다스리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육지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야마다이국(邪馬臺國) 연합인데,
"장(將)·혁(革)"이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일로,
그의 자(子)인 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이 우리들의 장수언(長髓彦)이다.
또한 임나(任那)란 대마도지만 「왜인흥망사」는 '비미호(卑彌呼)의
종녀(宗女) 일여(壹與)가 임나를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미「역사와 현대」Vol.1-1 『「환단고기」와 야마다이국(邪馬臺國)』Vol.1-2 『「환단고기」는
말한다』Vol.2-1 <비미자(卑彌子)-임나(任那)-마자(馬子:백제계 蘇我씨)의
계보>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이 외,
본서의 내용은 여러 갈래로 퍼지지만, '고려진(高麗鎭)은 북경의 안정문(安定門) 외 60리 정도에 있다.
안시성(安市城)은 개평부(開平府)의 동북 70리에
있다.
고려성(高麗城)은 하간현(河間縣)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武烈帝)가 세운 곳이다.'라는 부분을 지적해두고 싶다.
같은 것을 「왜인흥망사」 제 16장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 16장
서정송소(西征頌疏)에 이르기를, 신조장(神祖將)에게
서(西)를 정복케 하다.
진아희(辰阿 )로 개맹나돈(介盟奈敦)의 성(城)을 공격케 하고,
찰하가희(察賀珂 )로 안사나돈(晏泗奈敦)의 성(城)을 공격케 하고,
유기아희(悠麒阿 )로 갈제예말(葛齊汭沫)의 성(城)을 공격케 하다.
이에 따라 노렬앙태(怒洌央太)를 평정하고, 비이구왜(斐伊 倭)의
강(岡:언덕)에
다다라, 도읍을 정하다.
틀림없이 노렬앙태(怒洌央太)는 서해의
이름이 되다.
비이구왜(斐伊 倭)는 서륙새일(西陸塞日)의 거처가 되다.
서정송소(西征頌疏)에 이르기를,
'신조(神祖)·신대왕(新大王)은 정말로 서정(西征)하려 했다.
"우시아케"로 금주만(金州灣)에,
"사카아케"를 안시(安市)에,
"유키아케"를 진황도(秦皇島)에, 각각 성을 쌓도록 시켰다.
그리고 니레와타(직예해협(直隸海峽)) 건너, 산동반도의 히이쿠와(龍口)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생각해 보니 니레와타는 서해의 이름이고, 히이쿠와는 서륙(西陸)에 태양이 저무는 곳이다.
병명조광(浜名祖光:명은 물가 빈으로도
훈독)은 여기서
"카메나토"를 금주만(金州灣),
"아시나토"를 안시(安市),
"케시세마"를 진황도(秦皇島),
"니레와타"를 직예해협(直隸海峽),
히이쿠와를 용구(龍口)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이 신조(神祖)는 태조왕(太祖王)였다.
또한 비이구왜(斐伊 倭)는 용구(龍口)지만, 본서에 '광개토왕…거란, 평량(平 ) 모두(皆) 평복(平服:엎드려
복종)시키다.
임나와 이왜(伊倭)의 속(屬), 신(臣)이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되어 있고,
이왜(伊倭)라는 민족이 등장한다.
생각해 보니 이왜(伊倭)는 원래 용구(龍口)에 있던 왜인을 북구주,
아마 이도국(伊都國)을 거쳐 이세(伊勢)에 이주한 것이 된다.
< 「태백일사(太白逸史)·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
「태백일사」 제 7은 <대진국본기>지만,
대진국은 후고구려 또는 발해(渤海)라고도
했다.
그런데, 본서(환단고기)는 왜국의 성립에 관해서도 중요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속일본기(續日本記)」 권 10 성무(聖武) 천황
신구(神龜) 5년의 조를 읽어보자.
'17일, 발해국사(渤海國使) 고제덕(高齊德)은
그 왕의 서병(書幷)에 방물(方物)을 헌상하다. 그
가사에 말하기를, 무예(武藝)를 계발하다.
산하역(山河域)이 다르고, 국토가 같지 않다.
엎드려 생각하니,
대왕(성무)의 천조(天朝)는 (하늘의) 명을 받아, 일본은 터(基)를 열다.
혁엽광(奕葉光)을 거듭하고, 본지(本枝) 100세(世) 되다 운운'으로
되어있다.
성무(聖武)의 왕조가 명을 받아 일본이
건국(開基)했다는 것은,
전부터, 신라 문무왕의 손(孫) 김양림(金良琳)이
구주(九州)에서 나니와(難波:오오사카)로
옮겨,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하고, 신라 문무(文武)왕의 이름을 세습하여 문무(文武) 천황이라 칭하고, 독립을 지향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졸저 「환무분서(桓武焚書)와 천(天)의 왕조」
(「역사와 현대」Vol.3-1 所收)에서
서술했지만, 여기서 "본지(本枝) 100세(世)"라는 것이 문제이다. 왜 발해가 본국이고 일본이
지국(枝國)이라는 것인가. 그런데 그 의문이 본서(「환단고기」)에 의해 풀린 것이다.
본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정주(正州)는 의려(依慮)국(國)이 도읍한 곳이다.
선비(鮮卑)·모용외(慕容 ) 때문에 패하한 후,
우박(憂迫:근심해 가슴이 막힘)하여, 자재(自裁:自決)하려다 못하고 문득 생각하기를,
'내 혼이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랴.'하여,
몰래 아들 부라(扶羅)에게 부탁하여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대능하(海口)를 넘으니,
따르는 자 수 천.
마침내 건너가서 왜인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는데,
스스로 3신(三神)의 부명(符命)에
응한다 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축하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의려(依慮)왕이 선비(鮮卑) 때문에 패배하여, 도망하여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들(子弟)이 도망하여 북옥저를 지키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즉위하였다.
이 뒤로부터 모용외(慕容 )가 재차 나라사람들을
침략하므로, 의라(依羅)가 무리 수 천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옛적 일본에 있던 이국(伊國)을 이세(伊勢)라고도 말하는데 왜와 더불어 이웃이었다.
이도국(伊都國)은 쭈꾸시(筑紫)에 있어 이 또한 곧 일향국(日向國)이었다.
이때부터 이동(以東)은 왜에 속하고 그
남동은 안라(安羅)에 속했는데,
안라에는 원래 졸본(忽本) 사람들이 살았다.
북쪽에는 아소산(阿蘇山:규슈 구마모토
인근 활화산)이 있고,
안라(安羅)는 후에 임나(任那:대마도)로
편입되었는데,
고구려와 더불어 이전부터 이미 화친을 맺었다.
말로국(末盧國)의 남쪽을 대우국(大隅國)이라 하는데,
시라군(始羅郡)이 있으며,
원래 남옥저인이 모인 곳이다.
남만(南蠻), 도침미(屠 彌), 환하(晥夏), 비자목(比自 )의
붙이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南蠻)은 구려(九黎)의 후손(遺種)들로, 산월(山越)에서 온 자들이다.
비자목은 변진(弁辰) 비사벌(比斯伐) 사람들의 취락이다.
환하(晥夏)는 고구려에 속한 노예들이다.
때때로 왜인들이 나뉘어 산과 섬에 분거(分據)하여
각기 백 여국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구야한국(狗邪韓國)이 가장
컸는데,
원래 구야(狗邪) 본국인이 다스리는 곳이다.
바다의 상선 선박이 모두 종도(種島)에
모여 교역했는데,
오(吳)·위(魏)·만(蠻)·월(越)에 속한
자들이 모두 통교했다.
비로소 천 여리나 되는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 대마국에 이르니 사방이 가히 4 백
여 리쯤 되었다.
또 천 여 리의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 일기국(一 國)에 이르니 사방이 3백 리쯤 되다.
원래 사이기(斯爾 )국인데,
자다(子多)의 여러 섬사람들이 모두 조공을
바치다.
또 천 여리의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서 말로국(末盧國)에 이르니 원래 읍루( 婁)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동남의 육지로 5백리를 지나 이도국(伊都國)에 이르니,
곧 반여언(盤余彦:이와레히코)의 고읍이다.
여기서,
발해사의 후반부에 왜 부여(夫餘)왕 의려(依慮)가 나오는가 하면,
'의려왕이 도망가 바다에 들어가고…아들들(子弟)이 도망하여 북옥저를 지키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바다를 건너,
결국 왜인을 평정하여 왕(崇神)이 되다.'와 같이,
이때 부여의 후기왕조는 2분(分)하여,
북옥저를 보존하는 것과 왜왕이 된 것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전자가 후에 발해국이 되고 후자가 일본국이 되었다.
이것을 발해국사(渤海國使)는 "본지백세(本枝百世)"라고
했다.
발해는 이와 같이 하여,
성무(聖武)때 일본에 접촉하여,
후에 누누이 일본에 반(反) 신라정책을
요청했다.
그리고,
등원광사(藤原廣嗣)의 난, 혜미압승(惠美押勝)의
난을 거쳐,
마침내 백제왕 준철(俊哲)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준철은 즉위하여 환무(桓武)가 되었다.
더욱 본서(「환단고기」)는
'아소산(阿蘇山)의 남(日向)에 안라국(安羅國)이 있고, 후에 임나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야마다이(邪馬臺)국이 일향(日向)-웅본(熊本) 연합인 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이들의 문제는 이미 전게(前揭) 「역사와
현대」의 제 논문(Vol.1-1,1-2,2-1)에서 상세히 서술해 두었다.-
(안원전, 이강승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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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전 선생님의 노고에 그듭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운영자 송준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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