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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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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님이 올려주신 글을 재편집하여 올려드립니다
이메일 답변주신 유정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아래 자료들이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 중국 호북성 형문(荊門)에서 신라 태자묘 발견 >
최근 중국의 호북성 형문(荊門)에서 신라 선덕여왕의 태자묘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견되었다.
현지의 발굴 조사단으로부터 흘러나온 정보에 의하면,
637년 신라 선덕여왕이 국승을 따라 태자를 당나라에 보내어 경학(국자감)에 참여케 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신라 태자는 당 태종의 명을 받들어
호북성 형문에 있는 파초사(芭蕉寺)에
가서 불사를 주재한 일이 있었고,
사후에 이 절의 동쪽 "조사령"에
묻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는 10월5일~10일경 사이에 현지에서 열리는 발굴보고회를 통하여 상세하게 알려질 전망이다.
현장에는 한·중의 학자들과 경제관련 인사들까지 초청하여 대대적인 보고회를 가질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이 모든 사실들을 대외적인 비밀로 하고 있어
확실한 사실들을 파악하기는 어려워보인다.
그러므로 몇가지 의문사항과 궁금한 점들은 10월달이 되어서야 풀릴 전망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637년이 아니라,
640년(선덕여왕 9년)에 왕이 자제를 당에 보내어 국학에 들게 한 일이 기록으로 나오고 있어 현지의 정보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후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당으로부터
불법을 구한 고승 자장이 신라로 귀국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의 태자는 당시 고승 자장과 함께 당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먼 이국 땅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무덤의 규모나 발굴된 유물들,
명문이 출토되었는지의 여부,
주인공의 이름 등 대부분의 사항들이 미확인 사실로 남아 있다.
현지에서는 파초사(芭蕉寺)를 복원하고
고분을 재정비하는 한편으로
당시 태자 일행으로 인하여 이름 붙여졌을 신라천(신라샘) 등의 정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이는 현지 발표 이후 미디어 매체를 동원하는 등 홍보를 통하여
이곳을 양국의 우의를 다지고,
한편으론
한국인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명소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관련 문건 2장(간체, 2메가 분량)을 입수하여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위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 유정님 해설글 >
문건은 호북성 형문에서 발견되었다는 신라
태자묘를 어떻게 상업적으로 더 이용할 수 있는가에 치중한 사이드적인 정보(정식보고서가 아님)입니다.
그러므로 정식 발굴보고내용을 입수하게 되면 그때 다시 제대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해 설 >
이러한 중대발견은 중한양국의 우호관계의 시작을 1300여년 더 앞당기는 효과가 있으며,
이 기간 동안의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그리고 중한양국 국민의 우의가 대대손손 이어지기 위해 아래와 같은 활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1. 한중 양국의 역사학자를 초빙해 연구 검토하여 중한 양국의 우호한 교류 역사를 고증하고자 한다.
2. 신라 선덕여왕이 태자를 당에 보내 경학을 익히게 한 이야기와 전설등을 수집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3. 파초사, 신라묘(廟), 신라샘을 복원하고, 태자묘를 다시 고친다.
4, 중한 양국의 지도자가 우호의 글귀(회호)를
쓴다.
1) 김대중 대통령이 "신라샘"이라
쓴다.
2) 중국의 지도자가 "신라샘수류천년, 중한우호
대대전" 이라 쓴다.
5. 형문시의 경산현과 한국의 모(임의의) 시를
자매결연한다.
6. 신라샘, 파초사, 명현릉, 갈주파(방죽)등을
연계하여 여행코스를 개발하여 양국 여행업 발전에 기여한다.
7. 양국의 유명배우가 출연하는 20부작 TV연속극 "신라태자"(가칭)를 만들어 양국에서 동시에 방영한다. 추후 촬영지는 관광지로
개발하여 지속적인 관광객 유치에 힘쓴다.
8. 중한양국의 우호를 모토로 여행업을 주축으로 관련산업의 발전을 꽤한다.
9. 중한양국의 우호를 모토로 외자유치에 힘쓴다.
10. 중한양국의 매스컴에 신라태자의 얘기가 심도있게 발표되어 중한양국의 천년우호관계가 더욱 돋보이게한다.
11. 신라태자를 소재로 지방색 짙은 문예프로그램을 만들어 양국에서 공연한다.
12. 태자묘를 계기로 유구하고 찬란한 동방의 문명역사를 세계에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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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주)
< 자장법사는 양신라(대륙신라, 반도신라)를 모두다닌 유일한 인물 >
삼국유사
"대산 오만진신"편과
"명주 오대산 보즐도 태자 전기"를 보면
자장법사는 사로신라(대륙)와 신라(반도)를 모두 다닌 유일한 기록의 주인공이다
삼국유사는 사로신라와 신라가 각각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자장법사가 돌아왔을 때 신라왕은 선덕여왕이었으나
선덕여왕은 결혼을 했다는 기록도 아들이 있다는 기록도 없다
이름은 덕만이었다
그런데
다른 항목에서는 자장법사가 돌아왔을 때 신라왕은 정신대왕이며
정신대왕에게는 보천(보즐도), 효명태자가
있었다
자장법사가 돌아왔을 때 신라왕이 다르다는 것은
사로신라왕과 신라왕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나 25사나 모두 사로신라와 신라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나
명칭이 신라이므로 단일국가로 인식하려고 하다보니
사서를 부정하는 쪽(정신대왕의 기록 부정)으로
기울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형문(荊門)지역은
고대로부터 묘족의 주강역 즉 동이의 주무대였습니다
▒ 형문(荊門) : 고지도

- 통상 중국고지도에는 외자 즉 "형"만 표시하고 "형주"로 인식
- 바로 옆에 "형문"이
있다
▒ 형문(荊門) : 중국군사지도

- 주변에는 서쪽으로 덕안(안륙), 한양, 나주성, 악양이 있으며
- 북으로 곡성, 남으로 강릉이 있습니다
- 김부식이 모르겠다고 한 지명들이 이지역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됩니다
▒ 중국 오대산 인근지도 : 중국군사지도

▒ 위치도
: 형문, 오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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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원문 해석본을 올립니다 !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편 >
선덕왕
5년(636) 봄 정월에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 효과가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어
승려를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론케 하고
10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에 말하였다.
두꺼비는 성난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서남쪽 변경에 이름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니
혹시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이에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명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갑자기 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덕왕
9년(640) 여름 5월에 왕이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당] 태종은 천하의 이름난 유학자를
많이 불러 모아
학업을 가르치는 관원(官員)으로 삼고,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들러 그들로 하여금
강론케 하였다.
학생으로서 대경(大經) 가운데 하나 이상에
능통한 사람은
모두 관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하고,
학사(學舍)를 1천2백 칸으로 늘려 지었으며
학생을 늘려 3,260명에 차게 하니,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경사(京師)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고구려, 백제, 고창(高昌), 토번(吐蕃) 역시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선덕왕
12년(643)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배우던 고승 자장(慈藏)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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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관련 내용 >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산중에 있는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진성(眞聖), 즉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 <당승전唐僧傳>에서는 12년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에
따른다)에 당(唐)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구(句)의 게(偈)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梵語)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색(金色)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法師)의
곁으로 와서는, 어찌해서 수심에 싸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법사는 대답한다.
"꿈에 네 구의 게(偈)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가라파좌낭(呵 婆佐 )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 )란 본래의 성품은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희가낭( 伽 伽 )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해석(解釋)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達 盧舍那)란 노사나불(盧舍那佛)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쓰시던 도구(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臺山)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法師)는 두루 보살(菩薩)의 유적(遺跡)을 찾아 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현신(現身)해서 재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法師)에게 말한다.
"전일에 게(偈)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貞觀) 17년(643)에 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려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고 하였다.
뒤에 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淨岩寺)가 바로 이곳이다(이것도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그 후 두타(頭陀) 신의(信義)는 범일대사(梵日大師)의 제자로서 이 산을 찾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에는 암자도 역시 오랫 동안 헐어져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니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바로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太子)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형제
※ (<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淨神·보천寶川·효명孝明의 세 부자父子에 대한 명문明文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하문下文에, 신룡神龍 원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했으니 신룡神龍 원년은 곧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 을사乙巳다.
왕王가의 이름은 흥광興光이요,
본명本名은 융기隆基이니 신문왕神文王의 둘째아들이다.
성덕聖德의 형 효조孝照는 이름이 이공理恭이니 혹은 홍천洪川이라고 했다.
이는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자는 일조日照니 정신淨神은 아마 정명政明 신문神文이 잘못 전해진 것인 듯싶다.
효명孝明은 효조孝照, 혹은 소昭의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
이 기록에 효명孝明이 즉위한 것만 말하고 신룡神龍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또한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룡神龍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바로 성덕聖德이다)
가 하서부
(河西府;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또는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라 하나
잘못이다)에 와서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각 무리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닿아 여러 날 유람하는데,
갑자기 어느날 밤에 두 형제가 속세(俗世)를
벗어날 뜻을 남몰래 약속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오대산
※ (五臺山;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元年 무신戊申 8월 초에 왕王이 산속에 숨었다고
했으나 아마 이것은 잘못인 듯싶다.
상고해 보건대, 효조孝照를 효소孝昭라고도 했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에 즉위했는데 이때 나이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에
죽었으니 나이 26세였고, 성덕왕聖德王이 이 해에
즉위했으니 나이 22세였다.
만일 태화太和 원년이 무신戊申이라면 효조孝照가 즉위한 갑진甲辰년보다 이미 45년이나
지났으니 즉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다.
이것으로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
에 들어가니 그를 시중들던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太子)가 산 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므로 형 태자(太子)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으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보(步)를 가니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태자(太子) 효명(孝明)이
또 암자를 짓고 살면서 각각 부지런히 업(業)을 닦았다.
어느날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예(禮)를
하러 올라가니 동쪽 대(臺)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쪽
대(臺)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있고, 서쪽 대(臺)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쪽 대(臺)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나 있고, 중앙의 대(臺)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령산(地靈山)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를 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는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上院)인
진여원(眞如院)에 이르러 서른 여섯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났다.
혹은 부처의 얼굴 모양이 되고 어떤 때는 보주(寶珠) 모양이 되고, 또 혹은 부처의 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보탑(寶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불두(萬佛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등(萬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교(金橋)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고(金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金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신통(神通)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루(金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륜(金輪)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강저(金剛杵)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옹(金甕)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도 된다. 또
혹은 오색 광명(五色 光明)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圓光)의
모양으로, 혹은 길상초(吉祥草) 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으로도 되었다. 또 혹은 금전(金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은전(銀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뇌전(雷電) 모양으로도
되었다.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봉(金鳳)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오(金烏)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말이 사자(獅子)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닭이 봉(鳳)을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청룡(靑龍)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백상(白象)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유저(遊猪) 모양으로도 변하고, 혹은 청사(靑蛇) 모양으로도 변해 보였다. 두 태자(太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王位)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네 사람의 장군을 보내서 산에 와서 이들 두 태자(太子)를 맞아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孝明)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어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 노부(鹵簿)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寶川)은 울면서 이를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나라를 여러 해 다스렸다
(기記에는 말하기를, 왕위王位에 있은 지 20여
년이라 했다. 이는 대개 죽을 때의 나이가 26세라
한 것을 잘못 전한 것이다. 그가 왕위王位에 있었던 것은 다만
10여 년뿐이었다.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우가 왕위王位를 다투었다고 하였는데, <국사國史>에는 그런 글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룡(神龍) 원년(이것은 당唐나라 중종中宗의 복위復位한 해로서 신라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이다) 을사(乙巳)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眞如院)을 고쳐 세웠는데
이때 성덕왕(聖德王)은 친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또 흙으로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당(堂)에 모셨다.
그리고 이름있는 중 영변(靈卞) 등 5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오래 돌려 가면서 읽게 하고 이어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해 오랫동안의 공비(供費)로,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00석(石)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는 것을 정해 놓은 규칙으로 삼았으며,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000보(步)쯤 되는 의니점(矣尼岾)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結)과 밤나무밭 6결(結), 좌위(坐位) 2결(結)을 내어서 장사(莊舍)를 세웠다.
보천(寶川)은 항상 그 영동(靈洞)의 물을 길어다가 마시더니 만년(晩年)에는 육신(肉身)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쉬었으므로 여기에서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을 외는 것으로 밤낮의 과업(課業)으로 삼았다.
어느날 장천굴(掌天窟)의 굴신(窟神)이 현신(現身)하여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 굴의 신이 된 지가
이미 2,000년이나 되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진리(眞理)를 들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신(神)은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청했다.
그가 계(戒)를 받고 나자 그 이튿날
굴도 또한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
보천(寶川)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곳에 20일 동안이나 머물고 있다가 오대산 신성굴(五臺山神聖窟)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또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 利天)의 신(神)이 삼시(三時)로
설법(說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올렸으며,
40명의 성인(聖人)은 10척 높이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면서
방을 세 바퀴씩 돌아다니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업(修業)했다. 문수보살이 혹 보천(寶川)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 )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죽던 날, 후일에 산 속에서 행할 국가를 이롭게 할 일을 기록해 두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산맥으로, 각 대(臺)는 진신이 항상 있는 곳이다. 푸른빛 방위인 동대(東臺) 북각(北角) 아래의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서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그린 1만 관음보살상을 모시도록 하라.
그리고 복전승(福田僧) 5명은 낮에는 8권의 <금경(金經)>과 <인왕반야(仁王般若)>·천수주(千手呪)를
읽고, 밤엔 <관음경(觀音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하고, 그곳을 원통사(圓通社)라
하라.
붉은빛 방위인 남대(南臺)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어 원상(圓像)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린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고,
밤엔 <점찰경(占察經)> 예참(禮懺)을
염송하고 이곳을 금강사(金剛社)라 일컬어라.
흰 빛 바위인 서대(西臺) 남쪽 면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원상(圓像) 무량수불(無量壽佛)과 흰 바탕에 그린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시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8권의 <법화(法華)>를 읽고, 밤엔
아미타불(阿彌陀佛) 예참을 염송하고 수정사(水精社)라 일컬어라. 검은
빛 방위인 북대(北臺)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원상(圓像) 석가불(釋迦佛)과
검은 바탕에 그린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엔 <열반경(涅槃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케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일컬어라. 누른 빛 방위인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에는 가운데에는 이상(泥像)으로
된 문수보살 부동상(不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누른
바탕에 그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삼십륙 문수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고, 밤에는 문수보살 예참을 염송하고 이곳을 화엄사(華嚴社)라 일컬어라. 보천암(寶川庵)을 고쳐 세워 화장사(華藏寺)라 하고 원상(圓像) 비로자나삼존(毗盧遮那三尊)과 대장경(大藏經)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문장경(門藏經)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할 것이며,
매년 100일 동안 화엄회(華嚴會)를 베풀고 이곳을 법륜사(法輪社)라 일컬어라.
이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라. 여기에는 정행 복전(淨行 福田)에게 명하여 길이 향화(香火)를 계속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국왕(國王)은 오래 사시고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文武)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下院)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여 사(社)의
도회(都會)로 삼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7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예참(禮懺)을 행하고 위의 37명이
재(齋)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을 하서부(河西府) 도내(道內) 8주(州)의 조세(租稅)로써 공양하는 네 가지 물건의 자금에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代代)의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 명주(溟州; 옛날의 해서부河西府)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 太子傳記) >
신라의 정신태자(淨神太子) 보질도(寶叱徒)는 그 아우 효명태자(孝明太子)와 함께 하서부(河西府)의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큰 고개를 넘어 각각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가서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 8월 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 운영자 주) :
- 앞의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편"을 보면 정신대왕의 두아들이 분명 "보천과
효명"이라 하였으니 "정신대왕의
큰아들 태자 보천 = 보질도", 보천의 동생
효명으로 보아야 되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 다른 한글 해석본은 "정신대왕의 태자 보즐도"로도 해석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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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 무리 중의 시위하는 자들은 두 태자를 찾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형 되는 태자는 오대산 중대(中臺) 남쪽
밑에 있는 진여원(眞如院) 터 아래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터에 풀로 암자를 지어 살고,
아우 태자 효명(孝明)은 북대(北臺)의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형제 두 사람은 부처님에게 예배하고 염불하며 행실을 닦으면서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대(臺)에 나가서 공손하게 예배했다.
푸른 빛 방위인 동쪽 대(臺)의 만월형(滿月形)으로 된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眞身) 1만이 항상 있고,
붉은 빛 방위인 남쪽 대(臺)의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항상 있고,
흰 빛 방위인 서쪽 대(臺)의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항상 있고,
검은 빛 방위인 북쪽 대(臺)의 상왕산(相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00 대아라한(大阿羅漢)이
항상 있고,
누른 빛 방위인 중앙 대(臺)의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로산(地爐山)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항상 있다.
또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삼십륙형(三十六形; 대산오만진신전臺山五萬眞身傳에
나온다)으로 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서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에 공양했다.
이때 정신태자(淨神太子)의 아우 부군(副君)이 신라에 있어 왕위(王位)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내서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바로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부터 신라에까지 뻗쳐 7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빛을
발했다.
나라 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질도태자(寶叱徒太子)는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려 하니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아가 왕위(王位)에
오르게 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에
진여원을 처음 세웠다 한다.
보질도태자는 항상 골짜기에 신령스러운 물을 마시더니 육신(肉身)이 공중을 떠서 유사강(流沙江)에 이르러 울진대국(蔚珍大國)의
장천굴(掌天窟)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고 한다.
오대산은 바로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에는 진신이 항상 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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