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으로 본 한반도의 역사 - 백제 >
< 3) 백제 >
유물에서 분명한 연대를 알수 있는 것은 512, 520, 523, 529, 660 년이다.
발견된 지역은 충청남도 서부 지역에 한정되고 있다.
당평백제비는 내용이 같은 2개의 비가 왜 같은 지역에 있는가 ?
첫째
내용이 같은 2개의 비가 왜 부여읍에만 있는가 ?
멀리 떨어져 있다면 모르지만 같은 읍내에 두 개가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대수령(大首領)의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당서, 구당서에도 대수령이라는 관직이 없는데 이곳에 있다.
대신(大臣) 또는 위장(僞將) 또는 추장(酋長)을 대수령(大首領)으로
기록하였다
* 궁구미님의 지적으로 , 대좌평(大佐平) 문구는 삭제합니다(삼국사기에 기록 있음)
- 궁구미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셋째
"사지절신구?이마한웅진등일십사도(使持節神丘?夷馬韓熊津等日十四道)"의 기록이 있는데
사서에는 마한 웅진이 도(道)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의문이다
넷째
"범치오도독부 삼칠주 이백오십현 호이십사만 구육백이십만각제편호(凡置五都督府
三七州 二百五十縣 戶二十四萬 口六百二十萬各齊編戶)"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24만호는 이곳에만 있고 또한 인구 620만명의 기록도 이곳에만 있다.
(여러 사서에 백제의 호수는 76만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 기록대로 호당가족수를 환산하면 25.8명으로 상식 밖의 수치이다.)
▒ 출토 비문 : 사비성은 내지성(柰祗城) ?
부여를 사비성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사비성이란 비는 없고 내지성(柰祗城)이란 비(碑)가
있다.
부여에서 출토된 비에서 사비성이란 기록은 없으나 내지성이란 명문의 비가 발견되었으니 그곳이 내지성이 아닐까 ?
< 내지성(柰祗城) :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문 탁본 >

불교를 믿는 국가에서 불탑에 평정 명문을
새겼을까 ?
정복당하는 국가의 궁궐이나 물건은 파괴될수 있다고 할수는 있을 것이나
문명인이 종교와 관련된 물건에 대해서 파괴 할 수가 있을까 ?
그것도 완전파괴가 아니라 문자를 새겨서 미개인이 하는 짓과 같은 평정 기록을 남길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유인원의 공덕비에 그에 대한 기록이 아닌 그의 족보를 들추어 비를 세웠을까 ?
유인원의 상관인 소정방비도 없는데
부하인 유인원비가 있는가 하면
비문에 유인원의 족보를 만들 듯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
< 당유인원기공비 >

- 신라 문무왕3년( 663년)
- 출토지 : 부여부소산성
이 비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復興運動)을 무산시킨
당나라 유인원의 공적을 적기 위해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세워진 전공비이다.
< 종 합 >
지금까지 반도에 있는 백제의 유물을 살펴 볼 때 그것만으로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단정하기에는 미흡하고 사서와 일치할때만이
우리의 삼국위치를 밝혀질 것이다.
현재 유물로서 백제의 수도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한다면 만약 우리나라 땅에서 USA가
명기된 유물이 출토되면 미국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 관운장의 사당이 신설동 동묘에 있다고 여기가 魏,蜀,吳(위, 촉, 오)의 삼국이 있다고 우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유적 및 유물과 사서가 종합적으로 검토를 거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백제 >

다음시간에는
"공주에서 발굴된 斯麻王에 대한 지석(誌石) 연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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