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올린 자료를 보완, 재편집 연재하는 것입니다
향후 3회 재 연재합니다
많은 참고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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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에서 발굴된 사마왕(斯麻王)에 대한 지석(誌石) 연구 (1) >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
영동대장군백제 사마왕이 62세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12일에 올려모셔 대묘에 기록하기를
이상과 같다.
丙午年十二月百濟國王大妃壽復終居喪在西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
병오년 12월 백제왕대비가 돌아가시니 서방에 사매장했다가
기유년 2월 12일에 개장하여 묘를 만들었다.
錢日万文右一件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以前件錢訟
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不從律令
전일만문(錢一萬文)의 우건(右件)에 대하여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백제 사마왕은 前其件(前其件)의
전(錢)으로
토왕과 토백 토부모의 상하중관에게 이천석을 주고
신지를사 묘를 만들고 권(買地卷 : 買地卷)을 작성하노니
앞으로 이 토지에 관해서는 세상의 율령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해둔다.
(번역 : 학술원논문집 1972년 11호, 백제문화 1991 제 21집 참고)
☞ 癸卯---523년, 乙巳---525년, 丙午---478년, 己酉---529년
김성호저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
의하면
백제의 웅진도읍은 63년간(475-538)에
불과함에도
공주읍을 중심으로
- 송산리
- 주미리
- 교촌리
- 신기리
- 폐목리 일대에
수백기의 고분군이 집중되어 있으니 어떻게 설명 할수 있을까 ?
라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 관련사진 >
▒ 무덤내 유물위치도

▒ 지 석

▒ 오수전

< 분 석 >
1.
출생, 즉위, 사망 관계에 대한 기록
① 삼국사기 백제본기
- 익왈 무영왕 휘 사마(謚曰 武寧王 諱 斯摩)
- 출생 기록없음
- 즉위 501년
- 523년 계묘(癸卯) 5월 왕이 붕(崩)
② 지석(誌石)
- 칭호 사마왕(斯麻王)
- 출생 462년
- 즉위모름
- 523년 계묘(癸卯) 5월 7일 왕이 붕(62세)
2. 삼국사기 분석
(1) 지 명 : 고구려와 분쟁지명
수곡성 마수성 고목성 장령성 횡악산 가불성 원산성 위천 등이며
(水谷城 馬水城 高木城 長嶺城 橫岳山 加弗城 圓山城 葦川)
현 한반도 지도상에 없음
신라와는 분쟁 기록 없음
(2) 일식(日蝕) : 516년 3월 1일(백제에서
관측한 일식 26개중 무령왕시대 일식기록)
일식 기록 하나로 관측지를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볼수 있는 지역을 참고하기 위해 소개한다
한반도 전체와 중국양자강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볼수 있다.
☞ 서울대 박창범 교수 제공

(3) 대수(大水) : 512년 5월
- 한반도에서 5월의 대수는 이례적인 일이면 가능하다.
- 중국에는 그 가능성이 한반도 보다 높다고 한다.

(4) 위(魏)와 백제전쟁(488년) 및
개로왕(△) 시대지명

(5) 조공
512년 4월 및 521년 11월에 양(梁)나라에
사절보냄
양나라에서 같은 날자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양국간 거리가 1개월 이내의 지역으로 볼 수 있다.
(6) 21년(521) 12월 양(梁)고조는
백제왕을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을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다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으로 삼다라고 하여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몇자의 수정"이 있다.
3. 斯麻王陵과 誌石 분석
(1) 삼국사기 무령왕의 휘 "사마(斯摩)"와
지석의 "斯麻(斯麻)"의 차이점은 "마" 이다.
발음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이두문 이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왕의 칭호를 문자가 틀리게 쓰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양서에는 여융(餘隆)이라는 이름밖에 없다.
(2)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라는
직함은 같다.
삼국사기와 내용이 같다.
삼국사기에는 진동대장군과 영동대장군(鎭東大將軍과 寧東大將軍)을 같다고 했다.
양서에는 보통 2년 12월에 鎭東大將軍을
寧東大將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3) 사망년대와 월이 같다.
사망년월이 같다는 거은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는 기록이다.
(4) 삼국사기에는 무령왕능의 위치 기록이 없고, 사마왕릉에는 접 한 두개의 능이
있다.
고구려 초기와 신라의 왕릉은 어디에 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에는 의자왕릉을 빼고는 단 하나의 왕릉위치에 대한기록이 없다
또 한 보통 경우 왕릉주위에 다른 능이 있다면
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사마왕릉에는 붙어서 두개의 능이 있다는 것이 예외이다.
☞ 검은점 위 가는 사마왕릉이고 그 전면 약 20미터에 두 개의 묘가 나란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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