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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에서 발굴된 사마왕(斯麻王)에 대한 지석(誌石) 연구 (2) >
4. {삼국사기}의 武寧王과 誌石의 斯麻王를 비교분석
(1) 무령왕의 백제 수도는 웅진인데 웅진조건은
중국에 일치된다.
웅진은 백제가 패망하는 기록에 있으므로 가장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패망의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구당서, 신 당서가 동일하다.
이곳에 등장하는 지명에서
- 평원
- 황산
- 동성
- 잠산
- 독산
- 동명
- 덕안
- 주류성
- 항성
- 백마하
등이 있는데 반도에는 없다.
고조선시대의 기자능과 九黎시대 치우능이 있는
중국에는 위 지명이 있으나 반도에는 없다.
웅진을 수도로 했던 무령왕릉은 어디에 있는가 ?
과연 공주의 능이 무령왕릉인가 ?
(2) 사마왕의 출생년대는 개로왕의 한성 시대인데 한성조건은 중국에 일치된다.
지석에 있는 사마왕의 출생년대는 개로왕시대이다.
개로왕시대 한성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한 지역인데
지명으로
- 숭산
- 하수
- 사성
- 그리고 하수를 따라 만든 제방,
- 벽돌로 만든 성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에는 있으나 반도에는 없다.
(3) 斯麻가 시호인가 아니면 휘인가?
▒ 백제본기에서의 휘 소개
전지왕(405-420)--------휘 映
개로왕(455-475)--------휘 慶司
문주왕---------------없음
삼근왕---------------없음
동성왕(479-501)-------휘 모대(마모)
무령왕(武寧王)(501-523)-휘 사마(斯摩)
성왕(523-554)---------휘 명농
위덕(554-598)---------휘 창(昌)
혜왕(598-599)---------휘 계명
법왕(599-600)---------휘 선
무왕(600-641)---------휘 장
의자왕---------------없음
삼국사기의 사마(斯摩)는 휘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지석의 사마왕(斯麻王)은 휘로
볼 수는 없지 않을까?
광개토대왕비등 어느 곳에도 "휘"를
기록하지 않고
"시호"를 기록하여 능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석에 있는 사마왕은 "휘"가
아닌
"시호"로 볼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4) 익산 미륵사의 과부아들, 자칭왕(自稱王)인 무강왕(武康王)과의
관계
익산 미륵사를 창건한 왕은 무강왕이라고 한다.
그는 과부의 아들이며 "스스로 왕"이라고
한 백제왕이라고 하였다.
이 자칭왕과 공주의 사마왕은 어떤 관계일까.
"남제서"에서 백제가 태수로 임명한 지명이
"북제서"에서는 그 지명에 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있다.
혹시 사마왕이나 무강왕은 같은 예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다.
(5) 영동대장군의 영동(寧東大將軍의 寧東)은 "남제서"의
백제 지명이 있는 중국의 위(魏)와의 접경 지역
백제 무령왕은 488년 백제와 위의 전쟁 13년 뒤에 즉위하였는데
남제서에서 백제가 통치했다는
- 광양
- 청하
- 대방
- 낙랑(하북성),
- 성양(산동성),
- 광릉(강소성)의 지명으로 보아
영동(寧東)은 중국의 강회(江淮 : 양자강, 회수
지역)지역을 나타낸 말로 보이며
그 지역을 다스리는 왕의 벼슬 이름으로 보여진다.

(6) 삼국사기에서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곤지왕의 아들로 기록(삼국사기는 곤지는 무령의 조부)
▒ 금송(金松)
관목은 금송(金松)으로 생산지는 일본
고야산과 절강성 태주(台州)에서 생산

☞ 역사스페셜에서는 일본 특산물로 금송을
소개하고 있으나
중국 절강성에서도 나는 나무이다
청동거울 및 우수전은 남경 것과 닮았다(흡사하다)

연꽃벽돌도 공주것과 남경것이 닮았다(흡사하다)
* 금송 + 연꽃벽돌 + 청동거울 + 무덤양식 = 중국식 ?
* 대륙백제의 분왕이 아닌지 의심 ? (운영자 생각)
▒ 금동신발의 영토
일본규수--고마모도--후마나야고분--익산입점리
금동신발과 금동관모로 보아
신발과 관모로 백제전체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

▒ 흑치상지
남양군도 부남(캄보디아), 탑등(북인도), 곤륜, 양자강연안
등에는
음식을 먹으면 이가 검어지는 지역이 있다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이라는
책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흑치상지(?∼689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당고종 이치, 측천무후 때 명장.
- 백제(지금 광동성 흠현 서북) 서부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 원문 >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47,
흑치상지(黑齒常之 : ?∼689年)
- 당고종이치, 무칙천시명장 : 唐高宗李治,
武則天時名將
- 백제(금광동흠현서북) 서부인 : 百濟(今廣東欽縣西北)西部人
- 신장칠척유여, 효용선전, 유모략(身長七尺有余, 驍勇善戰, 有謀略)
黑齒常之早先在本蕃任達率兼郡將. 顯慶五年(660年),
唐高宗派蘇定方破灰百濟, 黑齒常之率部下前去送降款,
遭到唐軍兵士的 劫殺戮, 黑齒常之見狀,
忙帶了十幾人逃回本部, 不幾日收羅兵士三萬余人.
蘇定方破兵圍攻, 黑齒常之率部報死相 ,
唐軍大敗, 黑齒常之一擧收復失地二百多 城池.
龍朔三年(663年), 唐高宗下詔招降黑齒常之, 常之隨卽率部降唐, 被任左領軍員外將軍.
☞ 출처 : 대륙고려 홈
(http://kym5006.new21.org/ccc1.htm)
< 흑치상지 묘비는 남경박물관에 보관 >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허난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을 파헤쳤는데,
거기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됐다.
거기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혀주는 보물 같은 글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학자들이 묘지석을 해석한 결과 흑치씨(黑齒氏)는
그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고,
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최근 중국학자들은 흑치가 필리핀임을 증명한 바 있다"
(문답란 글 일부 인용)
- 붕과 묘(崩과 墓)는 어울리지 않는다. 붕과 총이라면 모를까 ?
- 대비와 대부인(大妃와 大夫人)도 어울리지
않는다
< 참 고 : 3국의 일식관측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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