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여러분들의 질문에 오재성 선생님이
답변하신 내용을 일부 편집하여 올려드립니다
동일한 질문 방지의 의미도 있사오니 많은 참고바랍니다
오탈자가 다소 있는 것은
오재성 선생님이 "독수리 타법"
+ "시력저하"에 기인합니다
제가 오탈자를 한번 보았지만 문맥에 큰 이상이 없다면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질문전제는 생략합니다
감사합니다
▒ 오재성 선생님

▒ 신라의 패망과 특산물에 대하여 ~
우선 특산물에 대한 것을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중국 25사 동이전과 삼국사기 및 교과서에서
한반도 사정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중국쪽의 신라의 특산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김유신때 목화를 고구려에 주었다면
그것은 고려때 문익점이 씨앗을 가져 옮으로써 이땅에 목화 사용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김유신때 목화 사용은 "요" 중심의
동쪽에 즉 "사로신라의 특산물"로
볼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나침반을 송나라 4대 발명품으로 배우고 있는데
김유신때 "자석과 바늘"을
당나라에 주었다고 했으니 자석과 바늘로 만든 나침반은 "사로신라"의 특산물로 볼수 밖에 없다는 것이며
"쇠뇌"도 마찬가지로 황하 이남에서 발달되었던 무기입니다
조선말기까지 비단장사는 왕서방 즉 중국인이라고 해왔는데
조선의 기자때 부터 양잠을 해왔으니 당연히 중국의 사로신라의 특산물이 아니?E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황"도 조선때까지도 수입품목에 있습니다
이것도 사로신라의 특산물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인삼은 고려때 고려의 특산물이고 현재도 고려인삼은 한국산이 최고이니 이것은 동신라의 특산물이 아닌가 합니다
사로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패망하고 당의 계림도독부가 되었다고 했는데
당나라에서는 "군이나 태수와 왕"이라는
칭호를 주었으니
사로신라왕은 "당의 계림도독부"이며
신라왕으로 인정받았을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나라가 패망한 시기인지 정확하게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구당서와 당서에서는 장보고의 기록이 마지막 기록이니
당의 패망을 사로신라의 패망으로 볼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당의 자치국 사로신라의 패망"은 더 연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동신라(반도신라)는
503년 고구려의 간(지역통치자) 에서
신라왕이 되었으니 독립신라로 보고
동신라의 패망은 현재로는 936년 고려에의 병합으로 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것 하나 단정지을수 없으며 더 연구를 해 보아야 할것입니다
고려의 건국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드릴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려초기(7대실록)의 기록은
없으져서 1033년 황주량이 다시 편찬하였고
삼국사기는 다시편찬된 자료를 가지고 신라말과 고려를 연결하여 편찬하였으니
분명하게 파악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말기의 수도는 개성이였으나
강화도로 천도하기전 수도는 과연 어디였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더욱이 조선인구는 백만이 안되었는데
고려인구는 210만이라고 하니 조선땅보다는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삼국사기에는 개성에 성을 쌓는다는 기록과 송악에 성을 쌓는다는 기록이 각각 있으니
개성과 송악이 다른지도 궁금한 것입니다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서경은 평양이라고 하고
동녕부를 심양이라고 이병도는 기록하였으니 더욱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답변을 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더연구되면 올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일본열도의 유적은 열도인의 유물 그러나
중국 25사상의 왜나 일본의 강역은 다른곳에서(대륙) 찾아야 한다
중국25사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에 대한 역사를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열도에 유적이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지요
문제는 일본열도에서 일본이라는 국호를 670년부터 계속하여 사용하였다면
일본서기에도 왜가 일본으로 변경하는 기록이 있어야 25사와 삼국사기에 전하는 일본으로
볼수 있는데
일본인 발행한 조선통신사에 명나라로부터 일본이라는 국호를 받는 다고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또 일본열도에서 단일국가 일본이 있었는지도 의문이지요
일본열도에서 15세기 이전뿐 아니라 서기이전에도 인간이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25사동이전에 등장하는 왜나 일본이라는 것이 입증되기에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25사의 동이전왜는 황해 동쪽의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의 일식관측지도 동해의 동쪽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입당구법순례행기도 중국에서 활동은 구체적으로 답사하여보지 않았으니 말하기 어렵지만
일본열도로 운행하는 부분은 신라시대의 환경이 아닌 조선시대의 환경이라는 것이니
여러가지를 검토할때 일본열도의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열도인이 25사의 왜지역인 양자강 이남에 있다가 대만지역으로 진출되었으나
본토회복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신개척을 위하여 일본열도로 진출된 것은 아닌지 연구해 볼 일입니다
일본열도의 유적은 당연히 일본열도에서 활동했던 유물이므로 문화도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잉카문명이 있듯이 말입니다
일본열도의 유적이 있어도 중국25사의 동이"왜"나 변경국호 일본의 역사인물의 유적으로 보기에는 여러가지 일치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죽어서 미이라형태로 나왔다고 가정할때 그곳이 한국이라고 이야기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옛 기록을 살펴서 옛 기록에 의한 강토를 찾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본열도에서 삼국시대 왜나 일본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이전"기록을 정리하고 그 강역을 찾아 보자는 노력의 일환일 뿐입니다
그러던 중 여행기도 그 시대 상황에 일치되지 않으므로 다시 연구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뜻으로 올려 드렸으니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감사합니다
▒
"서신라와 동신라"는 하나의 나라로 보여지지 않음
- 서신라는 고구려 백제로 부터 "광복"하는 신라이고
- 동신라는 고구려간(제후국)이었다가 "독립"하는 신라로 보여짐
- 서신라는 고구려 백제 패망이후 발해의 서남쪽에 있었으며 당나라의 도독부로 신라왕을 칭하였으며
- 동신라는 발해의 남쪽에 있었으며
서로 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여짐
후삼국은 서신라지역에 존재했는가 아니면 동신라지역에 있었는가 분명하게 밝혀줄 연구자료가 없으나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며 아주
어려운 연구과제임
▒ 동신라가 만주까지 통치하게된 사유
동신라는 서신라지역의 속칭 5호16국시대(317-418)의
혼란기때 고구려가 서쪽을 치중하고 5호의 광복여운에 황해동쪽 고구려간지역이 합동하여 독립하여
신라로 독립한 것으로 보여짐
그래서 만주까지 신라가 통치할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더 연구는 해보야 하지만
- 만주원류고
- 요사
- 삼국사기에서
만주까지 신라가 통치한 것으로 보아서 동신라지역의 "간"들의 집단으로 독립한 것으로 보아야 할것 같음
▒ 김부식은 한반도 고려인
고려사는 태조부터 7대실록은 없어져서
1033년에 황주량이 재집필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으로 볼수 없으나
1033년이후 고려사 일식집중관측지가 한반도쪽으로 나타나므로 김부식은 한반도 고려인으로 보아야 할것임
김부식의 고려땅에는 기록이 없었는데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요의 동족에 있던 고구려, 백제 및 서신라에 대한 기록들을
가져온 것으로 보여지고
서신라의 사료도 신라(당 영호징의 신라국기 등)
동신라의 사료도 신라(거칠부의 국사)로
표기되므로 인해서
전부 동신라 기록으로 오인하여
하나의 삼국사기, 신라본기로 기록한 것으로 보여짐
평화지역인 동신라는 기록이 적고
서신라 기록이 많은 것을
'신라'라는 것 때문에 하나로 보았고
반도사관에 의하여 동신라 지역에 맞추었어도 지금도 중국에는 있는데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으로 기록했을 것임
고려사의 1033년 이후 일시관측지 연구에서
한반도쪽으로 관측지가 집중되므로 고려는 한반도와 만주남부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짐
▒ 시조중심의 사관으로 보아주시길
한반도로 갇힌 것으로 보지 말고 구리민족의
일부로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다고 생각하시길
즉 구리 고조선 고구려 발해 후예 일부가 한반도에 있는 것이지
갇힌것으로 보아서는 안될것이다.
바로 고구려 발해 후예를 여진족이라고 하고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반도사관으로 보지 말고
시조 중심주의사관으로 국조이후에는 어디에 살던 어떤 언어와 지방풍습을 같던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사관으로 생각해 볼것
만약 한민족이라고 한다면 1945년 이후로 갇히는 꼴이 될것이고
조선족이라고 한다면 1402년 이후로 갇히는 꼴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단군을 국조로 하고 고조선을 최초 국가로 하고
고구려 발해를 우리역사로 한다면
그 후예를 여진족이라고 하고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하는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서
우리는 단군이전 치우천자때 국호 구리(시작의 의미)와
백성 묘(시작의 의미)를 기준으로 하는 민족사와 민족
호칭을 찾아야 할것임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이 있는한
한반도 민족으로 갇힐수도 없고 갇혔다고 할수도 없다.
단지 구리민족의 일부가 한반도에서 국가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할것이고
서양에서는 민족이 다르다고 하여도 EC로 단일화하는데 구리의 후예가 하나되는 역사를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고구려의 이상이며 전통을 계승하며 복구하겠다는 국가 구리를 기준으로 하는 민족사를 복원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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