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夷傳 句驪
또 한 가지 이름은 맥이다. 또 딴 종족 하나는 소수에 의지해 살았기 때문에 이것을 소수맥이라 한다. 여기에서 좋은 활이 나는데 이것을 맥궁이라고 한다.
왕망 초년에 구려의 군사를 내서 흉노를 치려고 하는데 그 군사들이 가지 않으려 했다. 이에 억지로 그들을 보냈더니 모두 국경지방에서 도망하여 도둑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이를 추격하다가 전사했다.
왕망은 부하 장수 엄우를 보내서 이를 치게 했더니 구려의 후추를 꾀어서 국경에 들어가 목을 베어 수급을 장안으로 보내 왔다. 이것을 보고 왕망은 몹시 기뻐하여 고구려왕의 칭호를 고쳐 구려후라고 낮추었다. 이로부터 맥땅 사람들은 변방을 침략하기를 더욱 심하게 했다.
건무 八년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바쳐 왔다. 이에 광무제는 그 왕호를 전대로 회복해 주었다. 광무제 二十三년 겨울에 구려의 잠지락, 대가, 대승 등 만여 호가 낙랑에 와서 붙였다.
二十五년 봄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침략해 왔다. 이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이들을 대우하여 다시 변방을 막을 수가 있었다.
후구려의 왕 궁은 나면서 이내 눈을 뜨고 물건을 보니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꺼렸다. 그러더니 그가 자라자 용맹이 있고 씩씩하여 자주 변방을 침범해 왔다. 화제 원흥 원년 봄에 그들이 다시 요동에 들어와서 여섯 현을 침략하자 태수 경기가 이를 쳐서 깨치고 그 장수를 목 베었다.
안제 영초 五년에 구려는 다시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략하여 화려성을 공격했다.
건광 원년 봄에 유주자사 풍환과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내어 국경지방에서 그들을 쳐서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아 베고 병마와 많은 재물을 노획했다. 이에 궁은 그 아들 수성을 시켜 군사 二천여 명을 거느리고 역광등에게 사신을 보내서 거짓 항복했다. 그러나 광 등은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자 수성은 지세가 험한 곳에 웅거하여 큰 군사를 막고 비밀히 三천 명 군사를 보내서 현도와 요동을 쳐서 성곽을 불사르고 군사 二천 명을 살상시켰다.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등 속국의 군사 三천여 명을 모아 함께 이를 구원하기 위해 보냈으나, 이 때 맥 사람들은 이미 가버린 뒤였다.
이 해 여름에 다시 요동과 선비 군사 八천 명을 내어 요수를 쳐서 관리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자 채풍 등이 이를 추격했으나 신창 땅에서 전사했다. 이때 태수의 밑에 있는 공조 경모와 병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가 자기들의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모두 칼에 맞아 죽었다. 이 싸움에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가을에 궁이 마한, 예맥의 군사 수천 명을 데리고 현도를 포위했다. 이에 부여왕이 아들 울구태를 보내어 군사 二만여 명을 거느리고 그 고을 군사와 힘을 합하여 쳐서 깨쳐 五백여 명을 보내어 군사 二만여 명을 거느리고 그 고을 군사와 힘을 합하여 쳐서 깨쳐 五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 해에 궁이 죽자 그 아들 수성이 자리를 계승하여 즉위했다.
이 말을 듣고 요광이 왕에게 말하여, 저쪽이 초상을 당한 때를 이용하여 군사를 내어 치자고 했다. 모든 의논이 이 말이 옳다고 해서 허락하려 했다. 그러나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궁은 원래 사납고 교활했으나 이제 광이 능히 치지 못할 것이며, 또 사람이 죽은 때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사람을 보내서 조문하고 전에 잘못한 죄를 책망만 하고 용서해 주어서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하니 안제는 이 말을 좇았다.
이듬해 즉 안제의 연광 원년에 수성이 한나라의 살아 있는 포로들을 돌려 보내고 현도에 나가 항복했다. 이에 조서를 내리기를, 수성 등이 반역한 행동이 말이 아닌즉 마땅히 머리를 베어 젖을 담아서 백성들에게 보여야 할 것이나 다행히 용서를 받아 항복하기를 빌어 왔다. 선비와 예맥은 해마다 침략해 와서 백성들을 노략하는데 그 수가 천 명씩이나 되니 이는 교화를 받으려는 마음씨가 아니다. 이로부터는 현관과 싸우지 말고 스스로 와서 따르고 백성들을 보내는 자는 모두 죄를 용서해 줄 것이다. 그러니 큰 집은 비단 四十필씩을 바칠 것이요, 식구가 적은 집은 그 반을 바칠 것이다]했다.
그 뒤에 수성이 죽고 그 아들 백고가 왕위에 올랐다. 이로부터 뒤로는 예와 맥이 모두 와서 항복하니 동쪽에는 일이 적었다.
순제 양가 원년에 현도군에 둔전 六부를 두었다. 이 때 질환 사이에서 다시 요동 서안평을 침범해서 대방현의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들을 잡아 갔다.
건영 二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토벌해 와서 백여 명의 머리를 베자 백고는 이에 항복해서 현도에
소속되기를 빌었다고 한다.(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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