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서술한 중국 사료



 東夷傳 濊

東夷傳 濊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연접되어 있고, 남쪽은 진한과 연접되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가서 끝이고,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르렀다.

예와 옥저와 구려는 본래 조선 땅이다.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기자는 그들에게 예의와 농사 짓는 것과 누에 치는 법을 가르치고 또 팔조의 교훈을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둽고 문을 닫고 자지 않으며, 여자는 모두 정조를 지키고 믿음이 있으며 음식은 모두 그릇에 담아 먹었다. 그 뒤 사십여 대를 지나서 조선후 준 때에 이르러 자칭 왕이라고 했다.

한나라 초년에 크게 난리가 나자 연, 제, 조나라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해 간 자가 수만 호나 되었다. 그 뒤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을 쳐서 깨치고 자기가 조선왕이 되어 나라르 전해 가서 그의 손자 우거에까지 이르렀다.

원삭 원년에 예의 왕 남여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이십팔만 명을 데리고 요동에 와서 소속되자,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을 삼았다가 몇 해 뒤에 없앴다. 그 뒤 원봉 삼년에 조선을 멸하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네 부를 나누어 두었다.

소제 시원 오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과 현도에 소속시켰더니 뒤에 현도는 다시 구려로 옮겨 갔다. 그리고 자단, 대령으로부터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그 뒤에 너무 땅이 넓다고 해서 다시 동쪽 땅을 나누어 일곱 현을 만들어서 낙랑에 동부도위를 두었다. 여기에 소속된 이후로 그 지방은 풍속이 차츰 박해지고 법률도 여러가지가 있어서 육십여 조목이나 되었다.

건무 육년에 도위를 없애고 드디어 동쪽 땅은 모두 그 우두머리를 봉하여 현후를 삼았다. 그리고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면 조하를 했다. 이 곳에는 대군장이 없고 벼슬로는 후와 읍군이 있었다.

늙은이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구려와 같은 종속이라고 했는데, 언어와 법률과 풍속이 대개 구려와 비슷하다. 사람들의 성품은 몹시 어리석고 욕심이 적었다. 남녀들은 모두 곡령을 입었다.

그곳 풍속은 산천을 소중히 여겨 산천마다 각각 부계가 있어 이웃 지방끼리 서로 간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같은 성끼리는 혼인하지 않고 모든 일에 꺼리는 것이 많았다. 사람이 혹 중한 병으로 앓거나 죽는 일이 있으면 그 집을 헐어 버리고 새로 집을 지어 살았다. 삼을 심을 줄 알고, 누에를 칠 줄 알아서 능히 면포를 짜서 옷으로 입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별의 움직임을 보고 농사 일이 풍년 들고 흉년 들 것을 미리 점쳤다. 또 十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가 되면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 추어, 이것을 무천이라고 했다. 도 사당을 지어 범을 제사 지내어 이것을 신으로 여긴다. 부락에서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을 때는 언제나 그 사람의 집에 있는 소나 말을 잡아서 벌 주고 이것을 책화라고 한다. 또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인다. 도둑질 하는 자가 적고 보전을 잘해서 창 하나의 길이가 세 길이나 되는데 이것을 혹 몇 사람이 함께 갖기도 했다.

낙랑과 단궁이 그 땅에서 났고, 그곳에는 또 얼룩진 표범이 많으며 과하마도 있다. 바다에서는 반어가 나는데 이것을 잡아 오면 반드시 사신을 시켜 바쳐 왔다.(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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