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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학 [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 (29) 천지를 만들고 인간을 빚는 ‘꽃할머니’…꽃은 생명의 근간이다

작성일 20-04-15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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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화강 (210.♡.92.119) 조회 11,95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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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 (29) 천지를 만들고 인간을 빚는 ‘꽃할머니’…꽃은 생명의 근간이다

 

꽃의 여신과 생명

경향신문

제주도의 불도맞이굿에서 서천꽃밭(저승의 꽃밭)에서 꺾어온 꽃으로 꽃점을 치는 서순실 심방. 불도맞이굿은 제주도 신화의 여신 삼승할망(삼신할미)이 아이의 출산이나 건강을 기원하는 굿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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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류자·꽃할머니·삼승할망

나라·부족에 따라 이름은 달라도

창조신화의 전형적인 여신들


한국의 대표적 신화 ‘바리데기’

저승서 약수와 함께 꽃 꺾어오듯

물이 있으면 식물이 있고

식물이 있으면 꽃이 있다


마른꽃이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안에는 생명의 씨앗이 숨쉬고 있다


내가 일하는 학교에는 ‘민주화의 길’이라는 곳이 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산화한 학생들의 추모비 12개를 이어주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가을 교정을 걷노라니 누가 다녀갔는지 마른 꽃들이 추모비 앞에 놓여 있다. 아직 마르지 않은 국화 다발이 그윽하다. 우리는 왜 망자를 추념하기 위해 ‘꽃’을 바치는 것일까?

<식물의 역사와 신화>를 쓴 프랑스 작가 자크 브로스는 우리는 종종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까지도 식물한테서 얻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고 했다. 식물이 없다면 지구에 산소가 있을 수 없고, 산소가 없다면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식물은 지구 생명의 근간이다. 그런 식물의 절정에 꽃이 있다. 꽃에서 우리가 생명의 클라이맥스를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꽃의 상징성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구석기 유골 곁에서조차 종종 꽃가루 흔적이 발견되는 것도 이 상징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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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 신화 <바리데기>에는 의문스러운 대목이 하나 있다. 막내딸을 버린 뒤 아버지는 죽을병에 든다. 점을 쳐보니 약은 하나밖에 없다. 삼신산의 불사약, 동해용왕의 비례주, 봉래산의 가얌초, 안아산의 수리치와 같은 명약들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여러 이본에 공통으로 거론되는 것은 ‘약(령)수’다. 그런데 약수를 구하러 서천서역국, 곧 저승에 간 바리데기가 구해오는 것은 약수만이 아니다. 바리는 꽃도 꺾어 온다. 환생화(還生花), 구체적으로는 뼈살이꽃·살살이꽃·숨살이꽃 같은 이름의 꽃들이다.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다. 약수만으로도 가능했을 텐데 일종의 이중처방, 겹 상징이다. 왜 그랬을까?

저승에 꽃이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를 창조한 신들은 인간세상의 치리권을 두고 다툰다. 한반도에서는 미륵님과 석가님, 제주도에서는 대별왕과 소별왕이 그들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여서 되풀이하기 미안하지만 두 신은 ‘자면서 꽃 피우기 내기’를 한다. (10회, 28회 관련 기사 참조) 미륵님과 대별왕은 깊은 잠을 자면서 무릎이나 그릇에서 꽃을 피워 올린다. 자는 척만한 석가님이나 소별왕 쪽은 꽃을 피우는 데 실패한다. 이제 승패가 정해졌을까?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 대목에서 거대한 신화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진 쪽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이긴 쪽이 피워 올린 꽃을 꺾어 제 것인 체한다. 이 사태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권은 이긴 쪽에 달렸다. 여기서 미륵

님과 대별왕은 이승의 치리권을 ‘사기꾼’

신에게 넘겨주고 저승행을 선택한다. ‘더럽고 축축한 이승’과 ‘맑고 청량한 저승’이라는 역설적 공간배치도를 남기면서. ‘저승의 꽃’은, 저 태초에 자면서 꽃을 피운 창조적 권능을 지닌 미륵님 혹은 대별왕이 그리 갔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중국 좡족 화파절 축제의 꽃할머니. 좡족을 비롯, 마오난족·부이족·무라오족 등은 이 꽃할머니가 꽃밭에서 키우는 꽃을 인간 세상에 전해주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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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부에 거주하는 좡족을 비롯, 마오난족·부이족·무라오족 등은 화파(花婆) 신앙을 소중하게 전승하고 있다. 화파는 화왕성모(花王聖母)·화림성모(花林聖母)·화파왕(花婆王) 등 다양한 존칭으로 불리는데, ‘꽃할머니’라는 뜻이다. 이 꽃할머니가 꽃밭에서 키우는 꽃을 인간 세상에 전해주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믿음을 이들은 공유하고 있다. 꽃할머니가 화림선관(花林仙官)을 통해서 꽃을 전해준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꽃산 혹은 꽃숲은 신(선)들의 세계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좡족의 꽃산 상상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꽃산에는 붉은 꽃과 하얀 꽃이 있는데, 붉은 꽃을 주면 여자아이가, 하얀 꽃을 주면 남자아이가 태어난다고 한다. 꽃산에 벌레가 들거나 가뭄이 들면 아이들도 병이 든다. 그러면 무당을 모셔 꽃할머니를 부르는 굿을 한다. 벌레를 잡고 물을 주라고. 꽃이 살아나면 아이도 살아난다고 믿는다. 꽃할머니가 두 꽃을 한 곳에 심으면 인간 세상에 부부가 탄생한다고도 한다. 죽으면 모두 꽃산으로 돌아가 꽃이 된다고도 한다. 아름다운 상상이다.

좡족의 꽃할머니 신앙을 뒷받침해주는 신화가 있다.

하늘과 땅이 갈라진 뒤 대지는 황막했다. 나중에 잡초가 자라나더니 꽃이 피었고, 꽃 속에서 맨몸에 머리를 풀어헤친 한 여인이 나왔다. 그녀가 바로 무류자(姆六甲)다. 무류자는 신들을 보내 하늘과 땅을 고치게 하였는데, 하늘은 작고 땅은 커서 땅이 덮이지 않았다. 무류자가 손으로 땅 한가운데를 한번 긁자 하늘과 땅이 딱 들어맞았다. 그때 땅이 구겨져 높은 곳은 산이 되고 낮은 곳은 바다와 호수와 강이 되었다. 무류자는 땅에 생기가 없는 것을 보고는 바람을 쐬어 임신하고, 오줌을 누어 진흙으로 사람을 빚었다. 그러나 아직 남녀 구분이 없었으므로 무류자는 산에 올라가 양도(楊桃)와 고추를 따 땅에 던지고는 아이들한테 줍게 했다. 양도를 주운 쪽은 계집아이가 되고, 고추를 주운 쪽은 사내아이가 되었다. 좡족은 무류자를 생육신(生育神)으로 여긴다.(<中國各民族宗敎與神話大詞典>, 784쪽)

여신이 천지를 만들고 인간을 빚는 전형적 여신창조신화다. 여신이 바람으로 임신하고 오줌으로 진흙을 개어 사람을 빚었다는 화소가 특이하다. 여와(女 ) 신화를 비롯 진흙으로 사람을 빚는 신화는 적지 않지만 바람과 오줌과 흙의 조합은 좡족 신화만의 개성인 것으로 보인다.

무류자 창세신화와 꽃할머니의 연결고리는 둘이다. 하나는 이름인데, 꽃할머니를 모시는 광시성 핑궈현(平果縣)의 어떤 사당에서는 꽃할머니를 ‘무냥(姆娘)’이라고 부른다. 무냥은 무류자 할머니 정도의 뜻이다. 꽃할머니와 창조여신 무류자가 동일시되고 있는 셈이다. 다른 하나는 무류자의 탄생 이야기다. 신화가 말하듯이 무류자는 꽃 속에서 나신으로 태어난다. 꽃의 여신이 꽃봉오리 속에서 탄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장면은 힌두신화의 브라흐마 탄생담을 닮았다. 태초에 비슈누가 물 위에서 잠을 자는 동안 배꼽에서 피어오른 연꽃 속에서 브라흐마가 태어났다는 신화 말이다. 브라흐마와 달리 무류자는 여신이지만 꽃과 신의 탄생을 연결하는 신화적 발상은 같다. 꽃으로 아이를 점지하는 꽃할머니는 창조여신의 신화가 민간신앙과 결합된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경향신문


무류자 여신과 꽃할머니 신화를 읽노라니 자연스레 제주도 신화의 여신 삼승할망(삼신할미)이 떠오른다. 삼승할망 역시 꽃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삼승할망은 아이의 출산이나 건강을 기원하는 ‘불도맞이굿’에서 모시는 여신이다. 산육신(産育神) 삼승할망의 다른 이름이 불도신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승할망은 어째서 꽃할머니인가? <삼승할망본풀이>(또는 <생불할망본풀이>)가 그 의문을 풀어준다.

삼승할망은 본래 인간세상 출신이다. 그녀는 첫째 삼승할망이 제 역할을 못하자 새로 선발된 존재다. 옛 삼승할망은 용궁 출신이다. 옛 할망은 본래 동해용왕의 딸이었는데, 어미 젖가슴을 때리고 아비 수염을 뽑고 씨앗을 망가뜨리는 등등의 죄로 인간세상에 쫓겨 나오는데, 먹고는 살아야 하니 삼승할망 자리를 맡긴다. 한데 결함이 있었다. 아비의 불호령에 급히 용궁을 떠나느라 잉태 기술은 익혔지만 출산 기술은 익히지 못했다는 뼈아픈 사실! 아이를 못 낳아 아이도 죽고 산모도 죽어가니 세상에는 난리가 난다. 이 사태를 해결하려고 새로 뽑은 존재가 인간세상의 똑순이 맹진국따님애기다.

문제는 이승을 저승으로 만들어버린 동해용왕따님애기를 어떻게 축출할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둘은 하늘로 올라가 천신 옥황상제 앞에 선다. 대별왕·소별왕의 대결처럼 누가 적임자인지 결판을 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바로 꽃이 등장한다. 옥황이 낸 시험 종목이 ‘누가 은대야에 꽃을 심어 번성하게 하는가’였던 것. 구연본에 따라 모래밭에 꽃씨를 뿌려 꽃을 피우는 형식도 있지만 초점은 누가 꽃을 피울 능력을 갖추었느냐는 데 있다. 예상하듯이 옛 삼승할망의 꽃은 처음에는 번성한 듯했으나 금방 시들어 버리고, 새 삼승할망의 꽃은 처음에는 약한 듯했으나 나중에는 사만오천육백 가지에 꽃이 피어난다. 번성꽃을 피워 낸 맹진국따님애기가 진짜 꽃할머니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신화를 구연한 뒤 심방은 ‘꽃타러듬’과 ‘꽃풀이’라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꽃타러듬은 저승의 꽃밭(서천꽃밭)에 몰래 들어가 꽃을 따오는 행위다. 이 꽃을 ‘생불꽃’이라고 부르는데, 생불은 ‘생명의 씨앗’이란 뜻이다. 꽃이 생명의 씨앗을 함축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삼승할망의 별명이 생불할망이다. 심방이 삼승할망을 대신하여 따오는 꽃의 색깔에 따라 딸·아들이 결정되고 수명의 장단과 출세 여부가 정해지는데, 꽃풀이란 꽃의 상태를 보고 아이의 운명을 풀이하는 행위다. 서천꽃밭의 꽃은 삼승할망을 통해 이승으로 배달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왜 꽃밭에 ‘몰래’ 들어간다고 할까? 그것은 삼승할망이 좡족의 화파와 달리 서천꽃밭의 관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주 창세신화로 보면 저승의 최고신인 대별왕이 꽃밭의 주인이다. 대별왕은 창세의 시간에 자면서 꽃을 피워 올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실질적으로 서천꽃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신은 사라도령과 그의 계승자 할락궁이다. 이들은 꽃타러듬 제차 전에 구연되는 또 다른 신화 <이공본풀이>의 주인공들이다.

사라도령이 꽃밭 감관이 되려고 길을 떠난 뒤 태어난 아들 할락궁이는 아버지를 찾아와 꽃을 타 간다. 탐욕에 눈이 먼 자현장자에게 살해된 어머니 원강아미를 살릴 환생꽃, 복수에 쓸 싸울꽃·악심꽃 등등이다. (자세한 것은 ‘서천꽃밭에는 누가 있을까?’,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참조) 환생과 복수를 마무리한 할락궁이는 사라도령의 뒤를 이어 서천꽃밭 지킴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의 신인 삼승할망은 마음대로 저승을 드나들 수 없다. 가더라도 꽃밭에는 몰래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몰래 들어가야 좋은 꽃을 꺾어올 수 있지 않겠는가. 심방의 위세도 올라가지 않겠는가.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동시에 물은 홍수신화가 함축하고 있듯이 파괴와 재생의 상징이다. 하나의 생명이 시작되려면 다른 생명이 죽어야 한다. 그래서 파괴와 재생은 빛과 그림자처럼 하나이면서 둘이다. 제사 전에 목욕재계를 하고, 물로 세례를 받는 까닭도 재생은 과거의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바리데기가 찾아야 할 약수가 저승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승의 약수’라는 역설적 세계 인식은 물이 죽음과 생명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데서 흘러나온다.

물이 있으면 식물이 있다. 식물이 있으면 꽃이 있다. 바리데기는 약수를 구하러 갔지만 약수가 흐르는 곳에는 꽃밭도 있었다. 약수가 흐르니 죽음의 세계에도 꽃밭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약수를 찾으러 갔던 바리데기가 숨결도 살도 뼈도 되살릴 수 있다는 생명꽃까지 가져온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병든 아비를 두고 집을 떠났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으므로, 아비는 이미 죽었으므로, 약수도 환생화도 필요했던 것이리라.

추모비 앞의 마른 꽃이 죽었다고 말하지 말자. 그 안에는 생명의 씨앗이 숨 쉬고 있다. 망자의 고운 뜻도 함께 호흡하고 있다. 말라가는 가을 교정에서 나는 꽃의 여신의 숨결을 느꼈다.

※ 좡족의 화파 신앙에 대해서는 김선자 교수의 ‘중국 남부 소수민족 신화에 나타난 꽃의 여신과 민속, 그리고 서천꽃밭’(<비교민속학> 45)을 참조함.

▶필자 조현설

경향신문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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