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13) 남성권력 탓 ‘남동생 살고 누이 희생’…이젠 변혁하겠다는 여성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있는 견훤산성. 이 산성은 견훤이 쌓은 것이 아닌데도 상주 지역에 전해지는 ‘오뉘힘내기’ 전설에 따라 견훤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전설처럼 예로부터 여성은 남성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오누이가 등장하는 설화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아주 특이한 이야기가 있는데, ‘오뉘힘내기’가 그것이다. 보통 전설이라 부르는데, 이 이야기가 세계의 기원을 말하지 않고 우리 주변의 지형지물이나 역사적 인물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누이가 범인(凡人)이 아니라는 사실, 이야기의 배후에 숨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이 전설은 ‘나를 신화로 독해하라!’ 종용한다.
우리 마을 근처에 견훤산성이라고 있어요. 그 산성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 산성 아랫마을에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재주도 있고 기운도 셌어요. 하루는 둘이 내기를 하기로 했답니다. 동생은 말 타고 서울을 갔다 오고, 그사이 누이는 산성을 쌓아서 지는 사람이 죽기로 했어요. 그래서 동생은 말을 타고 떠났고 누이는 돌과 흙을 날라다가 성을 쌓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누이가 성을 다 쌓고 나서 성문을 달려고 하는데도 동생은 오지를 않았어요. 그때 엄마가 있다가 아들을 죽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딸을 불렀어요.
“야야 성 쌓느라 고생한대이. 콩 볶았으이 묵고 해라.”
“어무이, 성문 달아놓고 묵을라요.”
그래도 먹고 하라고 자꾸 권하자 딸은 하는 수 없이 콩을 먹었답니다. 콩은 목이 메서 잘 안 넘어가죠. 그때 동생이 서울에서 돌아왔어요. 누이는 결국 성문을 못 달고 내기에 져서 죽었습니다. 그때 누이가 쌓은 성을 견훤산성이라고 합니다.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 전해지고 있는 전설이다. 힘센 누이가 쌓은 성이 견훤산성이라니? 말이 안된다. 사실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있는 이 산성은 견훤이 쌓은 것도 아니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이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고 견훤이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일 뿐이다. ‘오뉘힘내기’는 우리나라 전역에 전해지는 전설인데, 인근에 견훤에 얽힌 산성이 있으니까 갖다 붙인 이름일 따름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왜 둘은 쓸데없이 목숨을 걸고 내기를 했을까? 앞뒤에 아무 설명이 없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들의 내기는 신화의 시각에서 봐야 풀린다. 목을 건 내기는 신화의 단골 소재가 아니던가! 테바이의 스핑크스는 수수께끼 내기를 해서 행인들의 목숨을 거둬갔다. 우리가 잘 알듯이 내기에서 이긴 오이디푸스는, 거꾸로 스핑크스의 목숨을 수장(水葬)했다. 태초의 내기에서 윌겐한테 진 에를릭은 죽음의 세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미륵님도 그랬다(10회 참고). 그렇다면 오누이의 내기도 단순한 힘자랑이 아니라 신화적 내기일 것이다.
우리 신화에서 산성 쌓기는 본래 창세여신의 일이다. 노고할미나 마고할미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신은 하룻밤에 산성을 쌓는다. 몸집이 거대한 데다 바위를 공깃돌 다루듯이 할 정도로 힘이 세니까 가능한 일이다. 제주도의 마고할미인 설문대할망은 화산섬 제주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300개가 넘는 오름도 창조했다. 그것도 치마에 뚫린 구멍으로 흘린 흙으로. 그러니까 오뉘힘내기 전설의 산성 쌓기는 여기가 출처다. 산성 쌓기는 괜한 힘자랑이 아니라 창조행위의 하나였던 것.
그러나 오누이의 내기는 태초의 창조행위와는 다르다. 그럼 왜, 무슨 이유로 내기를 했을까? 문면에는 아무 단서가 없다. 이긴 남동생이 뭘 얻었다는 말도 없다. 오히려 누이를 잃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뿐일까? 그렇지는 않다. 남동생은 누이와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사건 자체’를 얻었다. 달리 말하면 승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승리의 사건은 오뉘힘내기 전설이 이야기될 때마다 재현된다. 이렇게 되면 ‘성문 없는’ 산성은 누이의 패배의 상징이 된다. 마고할미가 쌓은 산성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참가자들이 성평등을 촉구하며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잠시 만주신화로 우회해 보자. 만주 구전신화 ‘우처구우러본’(조상신들의 이야기)에는 압카허허라는 창세신이 등장한다. 압카허허는 여천신(女天神)이라는 뜻인데, 제 몸에서 지신 비나무허허와 성신(星神) 와러두허허를 빚어 함께 세계를 창조한다. 그런데 서사시의 끝부분에 이르면 이상한 반전이 나타난다. 창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대홍수가 일어난 뒤 압카허허를 사람들이 압카언두리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 압카언두리는 “9층 구름하늘에 누워 입김으로 노을을 만들고 불을 뿜어 별을 만”드는데, 남성신이다. 요컨대 천신의 성(性)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창세신의 성전환은 엄청난 사건이다. 사람들이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은 제사에서 모시는 최고신을 바꾸었다는 뜻이다. 의례는 사회를 반영한다. 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바뀌면 의례에서 받드는 최고신도 남성이 된다. 이를 설명해주는 신화가 제작되고, 이 신화는 다시 현실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권능을 발휘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하룻밤에 산성을 쌓던 여신의 계보에 있는 힘센 누이가 내기에서 졌다는 이야기는 이 전설의 바탕에 남성 지배문화가 깔려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시각에서 봐야 어머니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가 딸을 만류하지 않았다면 아들이 죽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왜 아들이 죽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을까? 딸보다 아들이 귀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생각’은 바로 ‘칠거지악’이라는 부조리한 도덕률을 구축한 남성지배의 산물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시몬 드 보부아르) 이런 조건 속에서 어머니는 누이를 살해하는 남성권력의 기획에 기꺼이 공모한다.
남성권력의 기획 상품인 오뉘힘내기 전설은 구전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인물과 만나면서 여성의 자발적 희생을 미화하는 새로운 상품으로 변형된다. 호남에서 전승되고 있는 김덕령 남매 이야기가 그런 사례다.
김덕령 남매가 있었어요. 둘 다 힘이 장사였는데, 누이가 더 셌어요. 그런데 덕령이는 제 힘을 믿고 여기저기 내기 씨름을 하고 다녔습니다. 누나는 그것이 걱정이 되어 동생의 버릇을 고쳐 주려고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 나갔지요. 붙자마자 누나는 동생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김덕령은 부아가 나서 집에 돌아와서도 이를 갈고 있었어요. 보다 못한 누이가 ‘내가 했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김덕령이 내기를 한 번 더 하자고 했습니다. 덕령이는 나무 신을 신고 무등산을 한 바퀴 돌고, 누이는 베를 짜기로 했어요. 한데 누이가 베를 다 짜도록 동생은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누이는 베틀에서 베를 끊지 않고 동생을 기다렸어요. 그사이 김덕령이 돌아와 내기에 이겼다고 누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김덕령 같은 영웅이 누일 죽일 그런 이치가 어디가 있어. 우린 그런 소릴 믿지 안혀.”
이 전설은 어머니를 빼는 대신 남동생한테 이름을 부여했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시기의 유명한 의병장이었지만 억울하게 옥사한 인물이다. 이 억울함이 그를 전설의 주인공으로 밀어 올렸다. 그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는 용력이 있었지만 아기장수처럼 좌절한 영웅이다.
억울함과 용력 가운데 아마도 용력이 김덕령을 오뉘힘내기 전설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설에서도 여전히 힘이 더 센 쪽은 누이다. 공모자의 개입이 없으니 씨름 대결에서는 김덕령이 패한다. 그러자 재대결을 제안하는데, 종목을 바꾼다. 사실 씨름은 양념이고 이 대결이 진짜다. 한데 문제는 누이의 경쟁 종목이 바뀌었다는 데 있다. 누이는 성을 쌓지 않고 베를 짠다. 옷을 짓는 경우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모두 여성의 노동이었다는 점이다. 베틀 앞에 앉은 누이, 누이는 가부장제 사회의 일반적 여성의 형상을 입고 있다. 이런 조건이 누이로 하여금 차마 베를 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누이의 덕성 때문이 아니다! 누이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야기에서는 어머니가 콩이나 팥죽으로 딸의 성 쌓기를 방해했는데, 이번에는 누이 스스로 자신을 방해한다. 누이 안에 이미 어머니가 들어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누이의 자발적 포기는 어머니의 공모와 동일한 효과를 지니게 된다. 누이도 남성지배의 동조자가 되었다. 이런 누이의 행위를 일부 남성 화자들의 인식처럼 ‘고결한 희생’으로 칭송할 수는 없다. 누이는 남성지배의 번제물이 되었을 따름이다.
이제 신화는 ‘서사 형식의 이데올로기’라는 브루스 링컨의 정의를 음미해 볼 때가 되었다. 오뉘힘내기 전설은 남동생의 승리, 아들의 승리 담론이다. 아들의 승리에 어머니가 공모했다는 이야기다. 남성의 승리를 위해 여성들 사이의 적대를 오도하는 이야기다. 영웅이 될 남성이 죽어서는 안되니 여성이 희생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오뉘힘내기 전설은 남성의 승리를 정당화하는 이야기, 곧 이데올로기다. 그렇다. 오뉘힘내기 전설을 신화로 불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오뉘힘내기 ‘신화’라는 해독,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 현장에서 화자들은 종종 다른 목소리를 낸다. 김덕령이 누이를 죽였다는 결말이 말이 안된다는 화자들도 있지만 “그래서 누이는 약속대로 죽고 말았어. 누이가 이겼더라면 동생을 안 죽게 했을 거야”(임석재, <한국구전설화6>, 235면)라고 말하는 화자도 있다. 전자가 김덕령의 영웅성을 칭송하는 담론이라면 후자는 누이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런 화자들의 감정이 “김덕령 누나가 영웅이여. 누나만 안 죽여 버렸으면 김덕령이 큰 놈 됐어. 그런디 누나 죽여 버리고 맥이 없어. 김덕령이가”(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구비문학대계6-11>, 606면)라는 식의 마무리를 이끌어낸다. 누이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잘못되었다는 화자들의 인식이 이 목소리들에 담겨 있다. 여성 화자의 경우 이런 목소리는 더 커진다.
지난해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MeToo) 운동이 2018년 벽두부터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한동안 ‘갑질’ 행태가 우리 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는데, 미투 운동은 남성의 성적 갑질에 대한 저항의 한 형식이다. 성폭력은 남성권력의 문제다. 권력은 그 속성상 대중의 암묵적 동의를 먹고 산다. 갑의 억압 이전에 을의 억제가 있다. 어머니의 공모는 여성이 남성을 위해 스스로를 억제한 결과다. 누이의 희생은 남동생을 위해 제 욕망을 억제한 결과다. 남성권력의 폭력에 대해 침묵한 결과다. 이 침묵이 오뉘힘내기 전설을 고착화시키는 자원이다.
그러나 오뉘힘내기 전설에는 누이의 죽음이 부당하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누이의 죽음에 강한 연민을 표현하는 남성 화자의 목소리도 있다. ‘미투의 목소리’는 이야기 속에 숨어 있던 희미한 이야기들이 드디어 목청을 증폭시키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미투 운동은 더 이상 아들 편을 들지 않겠다는 어머니들의 선언이다. ‘희생의 신화’를 거부하는 새로운 신화 쓰기 운동이다. 이 운동이, 누이가 내기에서 지지 않는 새로운 오뉘힘내기 신화를 만드는 데 이를 수 있을지, 귀추를 주목해야 한다. ‘위드유’로 연대하면서!
※이 글을 쓰는 데 김준희의 ‘오누이 힘내기 설화 연구’(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2016)를 참조하였음.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