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5) 신성한 나무 베는 군주 이야기…자연 앞 인간의 욕망을 읊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전해지는 신화에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사유하게 하는 사건들이 많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설정 문제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딜레마다. 그 신화들은 신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우리들에게 지혜와 통찰력을 전하고 있다. 사진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 등을 강조하는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의 한 장면이다.
일본의 고대 이야기 등을 기록한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720)는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26년(618)에 일어난 이상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배를 만들기 위해 파견된 신하가 적당한 목재를 얻으려고 산에 들어가면서 발생한 일이다.
‘이 해에 가하에노오미(河邊臣)를 아키노쿠니(安藝國)에 보내 배를 만들게 하였다. 산에 들어가 배 만들 목재를 찾았는데 마침 적합한 나무를 얻어 베려고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벼락을 맞은 나무이니 베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가하에노오미가 “벼락신이라고 해서 천황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적지 않은 폐백으로 제사를 올린 뒤 인부를 보내 베게 했다. 그러자 즉시 큰비가 내리면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번쩍였다. 가하에노오미는 칼을 굳게 쥐고 “벼락신이여, 인부를 다치게 하지 말고 내 몸을 상하게 하라!”고 외치면서 하늘을 우러러 기다렸다. 벼락이 십여 번이나 내리쳤지만 가하에노오미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곧 조그마한 물고기로 변하여 나뭇가지 사이에 끼었다. 가하에노오미는 그 물고기를 잡아 태워버리고는 드디어 배를 완성했다….’
일본의 33대 천황인 스이코는 백제계인 소가씨 집안 출신으로 아스카 문화를 연 인물이다. 아키노쿠니는 지금 히로시마현의 서쪽 지역이다. 7세기 초는 일본이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이던 시기로 배가 많이 필요했던 때였다. 그래서 가하에노오미를 아키노쿠니에 파견한 것이다. <일본서기>를 참고하면 그는 외교와 군사 방면에서 활약했던 씨족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기록이 던지고 있는 문제적 상황은 지역민들의 민간신앙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대립이다.
가하에노오미가 신중히 고른 나무가 하필이면 이른바 ‘벼락 맞은 나무’였던 것이다. 벼락 맞은 나무, 특히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사악한 기운들을 물리치는 벽사목(辟邪木)으로, 우리나라 민속에서도 살아 있는 신성한 나무다. 이 일을 현대에 비유하면, 국도를 뚫어야 하니 마을 앞 당산나무를 베겠다고 달려드는 꼴이다. 지역민들의 저항이 클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에서는 그 저항이 큰비와 천둥·벼락이라는 자연의 노여움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나무신 혹은 벼락신의 저항은 천황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는다. 벼락은 가하에노오미의 칼을 이기지 못했다. 물고기 형상의 신은 관리의 칼에 살해된다. 천황가의 정치적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제작된 <일본서기>의 목적에 잘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흥미롭게도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벌어진 나무신과 왕권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가 중국에서도 보인다. 중국 문헌인 <수신기(搜神記)>(권18)에서다. 춘추시대 진나라 문왕(기원전 765~716년 재위·원문에서는 ‘문공’이지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문왕’으로 통일) 때의 일이니 기원전 8세기까지 올라간다.
‘진나라 때 무도군의 고도 지역에 노특사(怒特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사당 위에 가래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진나라 문왕 27년에 사람을 시켜 나무를 베려 했더니 갑자기 큰 비바람이 불었다. 도끼로 찍었던 곳이 다시 아물어 종일 찍었지만 베지 못했다. 문왕이 다시 병졸을 증파하여 도끼를 든 자가 40명이나 되었는데도 베지 못했다. 병졸들이 피곤하여 쉬려고 돌아갈 때 한 병졸이 다리를 다쳐 따라가지 못하고 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그는 귀신이 나무신한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싸우느라 힘드시지요?” 나무신이 대답했다. “어찌 힘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문왕이 반드시 쉬지 않을 텐데 어쩌시렵니까?”라고 묻자 “문왕이 어쩌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귀신이 또 “문왕이 만약 삼백 명으로 하여금 머리를 풀어헤치고 붉은 실을 나무에 두르고 붉은색의 거친 털옷을 입고 재를 뿌리면서 당신을 베면 힘들지 않겠습니까?”라고 묻자 나무신은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그 병졸이 엿들은 바를 전하자 문왕은 병졸들에게 그런 차림으로 나무를 베고 벤 자리에 재를 뿌리라고 명했다. 드디어 나무가 베어지자 나무 속에서 푸른 소 한 마리가 나와 풍수(豊水)로 달려들어갔다.’
거대한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인간을 수호하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사진은 경남 하동군 상신흥 마을의 성황당 나무와 돌탑.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본서기>의 이야기보다 좀 더 복잡하지만 기본 구도는 동일하다. 왕과 나무신의 대립이 그것이다. 문맥에 따르면 이 나무는 노특사의 신을 상징하는 나무다. ‘노특사’가 ‘화난 수소를 모시는 사당’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사당 위의 가래나무는 화난 수소가 깃들어 있는 나무이고, 노특사는 수소가 깃든 나무의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그런데 문왕은 왜 군사들에게 벌목을 명했을까? 이야기 속에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추론해볼 수는 있다. 무도는 오늘날 감숙성 무도현 일대로 진나라의 변방 지역이다. 문왕은 군사를 이끌고 변방으로 순행을 나간 것이다. 그곳에서, ‘화난 수소’가 시사하듯이 지역민들이 두려워하는 신과 부딪치게 된 것. 문왕은 변방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벌목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음사척결을 내세워 신당들을 불태운 사건과 아주 비슷하다. 문왕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나무신을 척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천황이 파견한 가하에노오미에게 나무신이 저항했던 것처럼 노특사의 나무신도 문왕의 도끼에 저항한다. 병사들이 아무리 찍어도 나무의 찍힌 상처는 바로 아문다. “문왕이 어쩌겠습니까?”라고 반문할 정도로 나무신의 힘이 강했다는 뜻이다. 이 팽팽한 싸움의 승부는 엉뚱하게도 내부의 적에 의해 결판이 난다. 두 신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귀신이 나무신의 아킬레스건을 누설한 것이다. 귀신이 일부러 그렇게 물은 것은 아무래도 다리 다친 병사가 들으라고 한 행위로 봐야 한다. 귀신은 이미 중앙의 권력자인 문왕의 편에 선 것이다.
그런데 유사한 이야기라도 왕권이 배제될 경우엔 사뭇 달라진다. 일본의 <히타치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그런 사례이다.
‘옛날 노인이 말하기를 이와레노타마호노미야가 통치하던 시절에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름을 야하즈노 마타치(箭括麻多知)라 했는데 군청 서쪽 계곡의 갈대밭을 차지하고는 새로 밭을 개간하려고 했다. 그때 야토가미(夜刀神)가 동료들과 무리를 지어 와 갖은 훼방을 놓으면서 밭을 경작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마타치는 몹시 화가 나 갑옷을 차려입고 창을 들고 나가 뱀을 죽여 없애 버렸다. 그러고는 산 입구에 땅을 점유했다는 표시로 커다란 막대기를 경계가 되는 수로에 세우면서 선언했다. “여기부터 위로는 신의 땅으로 허락한다. 그렇지만 이곳부터 아래로는 결단코 사람의 밭이다. 앞으로 내가 제주(祭主)가 되어 대대손손 정성스레 제사를 드리겠으니 원컨대 탈이 없기를, 원망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후 신사를 설치하여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후 마타치 자손들이 대대로 제사를 드렸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다.’
히타치국은 현재 일본 간토 지방 동북부의 이바라키현에 있었고, 야하즈노 마타치는 이 지방 호족이었다. 그의 과업은 습지 개간이었는데 습지를 먼저 차지하고 있던 야토가미들의 저항에 부딪힌다. 야토가미는 마타치가 살해한 뱀신이다. 마타치는 뱀신을 제거하고 갈대밭 개간을 시작한다. 이야기의 표면만 읽으면 가하에노오미가 벼락신이 깃든 나무를 베어낸 행위, 문왕이 황소신이 깃든 나무를 찍어낸 행위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하나는 이와레노타마호노미야, 곧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이 등장하지만 그는 개간의 명령자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천황의 이름은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뜻할 뿐이다. 다른 하나는 뱀신을 살해한 뒤 이어진 마타치의 ‘사후조치’다. 그는 신의 땅과 인간의 땅 사이에 경계표지를 세우고, 땅을 빼앗긴 신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낸다. 이뿐만 아니라 이 제사를 가문의 관례로 만든다.
마타치 이야기가 보여주는 두 가지 차이점은 사실 서로 조응하는 것이다. 마타치는 갈대와 나무를 베어내고 뱀신을 살해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영역을 좀 더 확장했지만 제사를 통해 인간과 신의 공존을 도모한다. 뱀신, 곧 타자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처럼 타자의 존재를 대등하게 인정하면 천황의 권위는 수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명령을 받은 가하에노오미는 천황의 권위를 내세워 나무신을 살해한 것이다. 사후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문왕도 마찬가지였다.
신에 대한 두 가지 태도는 기실 낯선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을 개간해서 살 수밖에 없다. 도심에 멧돼지가 출몰하는 것도 멧돼지의 땅에 우리가 들어가 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멧돼지를 보호하기 위해 산의 일부를 점유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인류가 오랫동안 안고 온 큰 딜레마의 하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화는 일찍부터 방안을 고심하고 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지혜를 전수해왔다.
신화는 살해된 동물을 신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동물을 잡은 것이 아니라 신인 동물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아이누족의 서사시 ‘카무이유카르’에서는 “마을 한가운데 집에서 나는 불의 여신 후치의 환영을 받았네. 인간들은 내게 선물을 주었고 마지막엔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네”라고 노래한다. 곰을 살해하는 이오만테 의례에서 부르는 살해된 곰의 노래다. 곰은 인간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선물로 내주었고 곰은 다시 인간들의 답례품을 받아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노래이다.
산을 개간하여 나무를 베는 것도 다르지 않다. 생존을 위해 동물을 죽일 수밖에 없듯이 나무를 벨 수밖에 없다. 문제는 벌목과 개간의 적절성이고, 개간의 대상인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야하즈노 마타치는 뱀신을 살해하고 갈대 늪을 밭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상 신의 영토를 점유하지 않았고, 신을 완전히 쫓아내지도 않았다. 신의 영역을 조금 점유하는 대신 제사를 통해 신에게 선물을 바쳤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증여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이 상호적 증여관계에 왕의 권력이 개입되면 균형이 깨진다. 스이코 천황의 명을 받은 가하에노오미의 나무신 살해, 문왕의 나무신 살해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왕은 나무를 목재로만 여기지 자연의 선물로 여기지 않는다. 왕의 마음, 권력자의 시선으로 자연을 보는 한 되돌아오는 것은 자연의 저항이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