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6) 소수민족 신화 속 한족의 위상, 만리장성 안과 밖이 달랐다
중국 서남부 윈난·쓰촨·구이저우성 등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이족은 한때 남조(635~902)라는 나라를 세우고 이문이라는 독자적인 문자도 사용했지만 그 이후 더 이상 민족국가를 이룩하지 못한 채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산속의 사람들’로 살 수밖에 없었다. 사진은 조상신으로 모시는 호랑이를 위한 춤을 추기 전 제사를 지내는 윈난성의 츄숭 이족 마을 주민들. 조현설 교수 제공
중국 사람들이 일제히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지구가 흔들린다는 농담이 있다. 인구가 거대하다는 뜻이다. 인구만큼 영향력도 대단하다. 중국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윈난의 차밭들이 커피콩밭으로 바뀌고 있다. 사드 사태로 인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지진은 현재진행형이다. 큰 나라 옆에서 사는 일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중국 안팎의 민족들은 어떻게 이 대국과 더불어 사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 왔을까? 신화 속에서.
이족(彛族)이라는 중국 내 소수민족이 있다. 쓰촨(四川),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등의 산지에 거주한다. 이들 가운데 윈난의 이족들은 <므이꺼>라는 창세신화를 구전하고 있다. ‘옛날이야기’ 또는 ‘옛날을 노래한다’는 뜻을 지닌 서사시이다. 거쯔라는 천신이 등장하여 금과(金果), 은과(銀果)로 아들과 딸을 만들어 이들로 하여금 세계를 창조케 한다. 인류가 창조된 뒤 인류의 낭비와 게으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대홍수가 일어난다. 착한 오누이는 곰을 살려준 덕분에 곰이 선물해준 박씨를 심었고, 수확한 큰 박에 들어가 살아남는다. 그런데 둘이 혼인하여 낳은 것도 괴상하게 생긴 박이었다. 이들이 박을 버리자 천신 거쯔가 박을 찾아 송곳으로 연다.
첫 번째 여니
나온 것은 한족
한족은 맏이
제방 속에 살며
밭을 쌓아 곡식을 키우고
책을 읽고 글을 짓고
총명하여 본래 큰일을 하네.
두 번째 여니
나온 것이 따이족
따이족은 수단이 좋아
하얀 면화를 생산하네.
세 번째를 여니
나온 것은 이가
이가는 산속에 살며
땅을 일궈 곡식을 키우네.
이런 식으로 리수, 먀오, 짱, 빠이, 훼이족 등 주변에 거주하는 아홉 민족의 출현을 노래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바는 이족이 자신들은 셋째로, 한족은 첫째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족은 첫째 형님일 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고 글을 지을 줄 아는, 총명한 민족, 그래서 능히 큰일을 하는 민족이라는 인식이다. 제방 안에 사는, 다시 말해 만리장성 안의 한족과 산속에 사는 자신들을 대비시키고 있는 셈. 왜 이족은 창세신화를 통해 이런 민족적 정체성을 노래하고 있을까?
이족은 당나라 시기에 윈난의 빠이족과 연합하여 남조(南詔·653~902)라는 국가를 세웠던 기억을 지닌 민족이다. 이문(彛文)이라는 독자적인 문자도 사용했다. 그러나 남조 이후 더 이상의 민족국가를 이룩하지 못한다. 중국이라는 정치적, 영토적 질서 내에서 이웃 소수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산속의 사람들’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집단적 경험이 <므이꺼>에 표현되어 있는 민족들의 서차와 정체성을 주조했을 것이다. 한족을 형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집단의 존속에 긴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자신들을 한족과 한 박에서 나온 ‘동포(同胞)’라고 노래함으로써 한족의 인정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족과 달리 중국 서북방의 당항족(Tangut·지금의 치앙족)은 동포 되기를 거부한다. 당항족의 수장은 본래 척발씨였는데 척발씨의 후예 이원호가 송(宋)에 대항하여 세운 나라가 대하(大夏·1038~1227)다. 대하는 한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번서(蕃書)’라고 불린 독자적 문자도 갖춘 국가였다. 하지만 번서 문헌 안에는 대하의 건국에 관한 신화가 없다. 중국 역사서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티베트 문헌에 나타나는데 <홍사(紅史)>(1363)가 그것이다. 티베트 불교가 이 지역에도 전해졌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역사서에 관련 자료가 실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하 왕릉
처음에 서하 지역은 한인(漢人) 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북쪽 도성과 까 지역 사이에 만시산의 산신은 꺼후였다. 어느 날 도성 안 한 부인의 처소에 백마를 탄 일곱 사람이 나타난다. 이들의 수령과 부인이 동거한 지 일 년 후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때 하늘에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별이 출현한다. 한인 점성술사가 사직을 빼앗을 인물이 태어났다고 말한다. 황제가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부인의 지혜로 위기를 벗어난다. 황제가 성안에 있는 두 살 아래 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한다.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죽었다고 통곡하면서 관에 넣어 성 밖으로 나가 강변의 숲속에 버린다. 매일 큰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아이를 덮어주었고, 한 부인이 키우는 누런 소가 매일 젖을 먹였다. 하루는 부인이 소를 따라왔다가 아이를 발견하고 데려가 키운다. 아이는 일곱 살에 설산(雪山)으로 도망쳐 반도(叛徒)가 되어 군대를 양성한다. 후에 한인 노파의 꾀로 한인 황제의 옥새를 넘겨받아 나라를 세운다. 그는 아버지 이름 꺼후의 꺼자를 취하여 꺼쭈왕(格祖王)이라고 했다.
대하 건국신화는 첫머리부터 대결 장면을 툭 던진다. 한인 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는 당항족의 상황이 그것이다. 고난은 영웅을 부르는 법. 당항족이 신성시하는 설산 만시산의 산신이 여섯 기사를 데리고 현현하여 고난을 극복할 영웅을 낳는다. 산신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는 많은 영웅들처럼 어려서 고난을 겪은 뒤 고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세운다.
그런데 이 대하 건국신화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한인들의 역할이다.
먼저 황제를 죽일 이족(異族)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인물이 한인 점성술사라는 점. 그는 ‘이상한 별’을 ‘사직을 빼앗을 인물의 출현’으로 해석한다. 둘째는 영웅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한인 노파의 역할이다. 이 노파는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말채찍과 말똥을 황하에 버려두면 황제의 옥새를 넘겨주겠다’고 말한 뒤 성벽에 올라가 대성통곡을 한다. 왕이 이유를 묻자 답한다. “제석천신이 서하국왕의 출현을 명했으니 항복하지 않으면 한인들이 전멸할 것이다. 내일 무수한 대군이 들이칠 것이다.” 국왕은 다음날 말똥과 말채찍으로 변색된 황하를 보고 두려워 일곱 기사에게 옥새를 바친다.
왜 한인들이 신화 속에서 적을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일까? 신화는 당항족의 조상신이기도 한 설산의 산신이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 또 하늘의 뜻이 당항족에게 있었다는 것, 나아가 한족도 이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꺼쭈왕은 옥새를 넘겨받은 뒤 한인 황제와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한족, 곧 중국에 대한 강한 적대감의 표현이었다. 이들에게는 이족처럼 한족을 형님으로 노래해야 할 아무런 동기가 없었다. 실제로 대하는 송나라와 2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인 나라였다.
이족과 당항족 사이에 비엣족의 나라 베트남이 있다. 베트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주변에서 중국과 적지 않은 전쟁의 역사를 거쳤다. 기원전 111년에 한나라에 점령된 이래 네 차례나 중국 왕조의 직접적 지배를 받은 바 있다. 그렇다면 베트남 신화는 중국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 쩐 왕조 시기인 14세기 후반에 편술된 <영남척괴열전(嶺南怪列傳)>에 실려 있는 ‘홍방씨전(鴻氏傳)’에 그 단서가 있다. ‘홍방씨전’은 홍방씨가 세운 반랑(文郞)국의 기원신화다.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3세손 제명이 제의를 낳은 후 남쪽으로 순수하여 오령에 이르러 무선의 딸을 만났다.
반랑국 건국자 훙부엉(웅왕)의 기일인 음력 3월10일에 벌어지는 훙왕사원의 훙왕 축제.
‘홍방씨전’은 이렇게 시작되어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염제가 무선의 딸을 데리고 와 녹속을 낳았는데 이 녹속이 적귀국(赤鬼國)의 경양왕이 된다. 경양왕이 다시 동정군의 딸 용녀(龍女)와 결혼하여 낙룡군(龍君)을 낳는다. 그 후 낙룡군이 제명의 손자 제래의 딸 구희를 유혹하여 함께 살았는데, 구희가 100개의 알을 낳았고 알 속에서 사내아이가 하나씩 태어난다. 주몽이나 혁거세와 마찬가지로 난생(卵生)이다. 이들 가운데 50명은 낙룡군이 데리고 수부(水府)로 가고 나머지 50명은 구희가 데리고 지상에 남았는데, 지상의 50명 가운데 우두머리를 뽑아 웅왕(雄王)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을 반랑국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복잡해서 간단히 정리했는데도 복잡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반랑국의 건국자 웅왕의 모계가 염제신농씨에 혈통적 시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방씨전’을 기록할 당시 문헌을 통해 중국 신화를 잘 알고 있었을 원저자나 후대에 편집에 관여한 무경(武瓊)은 왜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염제를 계보의 첫머리에 두었을까?
중국 최대 민족 한족을 제외한 이민족을 상징하는 신으로 통용되는 염제신농씨의 상.
주지하다시피 염제신농씨는 중국 신화체계에서 5행 개념에 따라 중앙의 황제헌원씨를 보좌하는 남방상제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체계화 이전의 염제는 황제와 적대관계에 있던 존재였다. 염제는 황제와의 신화적 싸움, 이른바 ‘탁록대전’에서 패배하여 중원에서 밀려나 주변화된 신이다. 말하자면 중국의 일부이면서도 변방에 거주하는 존재인 셈이다. 염제는 한족을 제외한 이민족을 상징하는 신으로 통용된다. 이런 표상을 지닌 염제를 반랑국의 모계 쪽 기원에 배치한 것 자체가 베트남 신화의 이원적 중국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쪽 혈통을 통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황제가 아닌 염제를 선택함으로써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태도 말이다. 이는 이족의 신화와도 다르고 당항족 신화의 선택과도 다른 방향이다.
이런 태도는 둘째 아들 녹속이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여 제명이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데도 사양하고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베트남의 시조인 낙룡군을 낳았다는 선양담(禪讓譚), 제래가 남방에 내려왔다가 물산이 풍부하고 자연이 아름답고 기후가 좋아 북방으로 돌아갈 마음을 잊었다는 자랑, 제래가 낙룡군의 신술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딸 찾기를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일화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구희가 백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부왕이 있는 북방으로 돌아가려고 국경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두려워하여 군사를 보내 변방을 막았다는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북방 중국에 대해 남방 베트남의 자신감을 서하 건국신화처럼 표현하면서도 염제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베트남 신화이다.
이렇게 보면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신화가 보여주는 중국 인식을 세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는 이족의 위상을 지닌 내부적 유형인데, 중국 내 상당수의 소수민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둘째는 서하의 위상을 지닌 외부적 유형인데, 만리장성 이북의 몽골이나 위구르 등의 민족이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셋째는 베트남의 위상을 지닌 경계적 유형이다. 한자문화를 공유하고 조공책봉체제와 같은 외교적 관계를 가지면서도 대결의식을 놓을 수 없었던 한국, 일본이 이 유형에 속할 것이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