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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발해는 분명히 한국사의 일부이다.

송화강 2019-09-27 (금) 23:18 6년전 13341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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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옛날부터 우리 역사의 중요한 무대였다. 일찍이 우리의 옛 조상인 예맥족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고조선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 무대를 삼았고 그 뒤를 이어 부여, 고구려가 활동했던 곳이다.


만주가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에서 점차 밀려나게 된 것은 고구려를 대신해 등장한 발해의 흥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발해(669-926)를 건국한 지배적인 민족과 그 문화적 성격, 그리고 고구려와의 계승 관계 등이 어떠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자주적 인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중국, 러시아, 일본이 발해사 연구에 열을 올렸다. 중국의 경우 당나라 때부터 발해에 관심을 가진 이래 청나라 때에는 그들의 발원지가 만주라는 사실 때문에 발해사에 대한 상당한 연구가 이뤄졌고, 그 후에도 발해 연구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일본 역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그들은 19세기 말 청일 전쟁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키는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또한 연해주 지역에 진출하면서 일찍이 만주에서 터잡았던 발해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각국이 발해사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그 연구가 그만큼 주변 여러 나라의 이해 관계에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 시대부터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삼국사기'를 쓴 고려 중기의 김부식은 고려 초기에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이념과는 달리, 삼국 중에서 신라를 중요시하고 고구려를 가볍게 여기는 관점에 서서 역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 대부분의 한국사 서술은 고구려와 그를 계승한 발해를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발해사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한말 일제하에는 독립 운동의 기지인 만주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고구려사 및 발해사 연구가 한층 고조되었다. 한말 신채호는 `독사신론'이라는 글을 쓴 이래 그의 한국사 서술마다 발해사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발해사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에서 자기 나라와의 이해 관계를 앞세워 발해사를 연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발해사를 과연 한국사의 범주에 귀속시켜 다루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이며 고구려의 영토와 백성, 사회와 문화를 계승했다고 하여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이해하려 하였다.


우리는 이 글에서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 같은 발해사 이해의 타당성을 더욱 구체화시켜 보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범주로 체계화하려 할 때 어떠한 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을 몇 가지고 지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 부흥 운동의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건모잠과 안승이 이끄는 대규모의 부흥 운동군을 비롯하여 고구려 옛 영토의 여러 지역에서는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만주 지방에서의 고구려인들의 독립 운동은 기록상으로는 671년 안시성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 이후의 것은 보이지 않지만, 그 뒤에도 매우 끈질기게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당이 한반도의 평양-원산 선에서 물러난 그 이듬해인 677년에 당은 포로로 잡아갔던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삼아 신성에 자리잡은 안동도호부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신성에 파견된 보장왕은 당의 의도와는 달리 고구려 유민들과 연결하여 고구려의 독립을 꾀했던 것 같다. 당나라의 역사책인 `당서'에 "보장이 말갈족과 함께 모반하였다"고 쓴 것은 바로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때문에 보장왕은 당으로 소환되었다.

  

이어서 그의 손자 보원이 `조선국왕'으로 임명받아 안동도호부에 파견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698년에는 `충성국왕'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그 역시 고구려의 부흥운동군과 내통한 듯 얼마 안 있어 당나라로 소환당하고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덕무가 `안동도독'으로 임명받게 되었다. 결국 당나라가 포로로 잡아간 고구려의 왕과 그의 후손에게 벼슬을 주어 고구려의 옛 땅으로 잠시나마 돌려보낸 것은, 당시까지 만주 지역에서 끈질기게 일어나고 있던 고구려인의 독립운동을 무마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그곳으로 파견되었던 고구려 왕족들은 오히려 고구려 유민들과 손잡고 고구려의 독립의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가 건국된 시기는 보원과 덕무가 옛 고구려 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669년이다. 또 보장왕과 함께 `모반'을 꾀했던 말갈족은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건국 주체 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들은 바로 발해의 건국이 고구려의 부흥 독립운동의 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발해를 건국한 주도 세력은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이 점은 발해사를 한국사의 범주에 귀속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한 혼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 발해를 건국한 사람으로 알려진 `고구려의 옛 장군 대조영'에 대해서만 하더라도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그의 민족 성분에 대하여 고구려인이라는 주장과 말갈인이라는 주장 두 가지가 있다. 신라와 고구려인들이 남긴 자료들에서는 대체로 그를 `고구려인'으로 써 놓았지만 당나라와 중국 측 자료에서는 대체로 `말갈인' `고구려의 별종' 혹은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던 말갈인'으로 써 놓았다.


대조영과 힘을 합하여 발해를 세운 건국 주도 세력에 대하여도 역시 고구려인 혹은 말갈인이었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중국의 여러 역사 책에서는 대체로 대조영과 건국 주체 세력이 말갈족이었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이 점은 중국 측 자료를 인용한 한국 측의 역사책에서도 더러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국의 역사책을 많이 읽었던 우리의 옛 조상들의 역사 인식 한계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학자들 중에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을 고구려계가 아닌 말갈계로 보았던 것이다.


 어떤 일본인 학자는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보고 발해 건국 주체 세력을 말갈족이었다고 절충적인 견해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런 중에서도 일본인 학자 시라도리는 건국자 대조영과 발해의 상류 계급을 형성한 중추 세력은 고구려계 유민이었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본과 중국 측 주장에 대해, 한국 측은 비교적 처음부터 대조영과 발해 주체 세력을 고구려 유민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발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신라의 석학 최치원은 그가 당나라의 여러 학자 고관들에게 보낸 글에서 "고구려의 유민들이 모여 북쪽 태백산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고 하였고 "저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고 했는가 하면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음을 알겠다."고 했다.


이것은 발해가 존재하고 있을 당시에 신라의 한 지식인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어떤 증언이 목격자의 것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발해와 같은 기대에 살았던 신라의 한 지식인의 증언만큼 `발해의 민족적 성분'에 대해 더 확실한 것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발해를 건국한 주도 세력이 고구려의 후예들이었으며, 여기에 근거해서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한국사의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만열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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