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 문헌상 가장오래된 저수지
의림지

용두산 남쪽에 자리잡은 의림지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1호로 삼한시대 마한지역에서 축조된 저수지이다.
호반둘레는 2km이고 만수면적 151,470㎡, 저수량 6,611,891㎡나 되며, 수심은 평균 8~13m로 본래 이름은 '임지'라 했다.
특히 물이 나오는 수구를 옹기로 축조해 당시의 수리기술및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의림지에 대서는 신라 진흥왕 때인 서기 550년 경에 가야금의 대가인 악성 우륵이 축조하였다는 전설과 그로부터 700여년 정도 흐른 다음에 이곳의 현감으로 있던 박의림이란 사람이 축조했다는 등 두 가지 설이 있다. 이처럼 건립 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의림지가 수축된 것은 조선 세종 23년(1441년)으로, 당시의 관찰사로 봉직하던 정인지에 의해서 수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제천은 고구려시대부터 큰 둑이나 제방을 의미하는 내토(奈吐)·대제(大堤)·내제(奈堤) 등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의림지의 역사는 기원전 마한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추측 하고 있다. 따라서 의림지가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일 가능성이 크다.
벽골제

벽골제는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다. 이 저수지는 사적 제 1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헌상으로 볼때에는 우리나라에 가장 오래되었으며, 고대 시대 만들어진 저수지 중에서는 규모도 가장 크다.
《삼국사기 330년(신라 흘해왕 21)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때는 이곳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 신라가 만든 것처럼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실제로 만든것은 330년인 백제 비류왕 27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790년(신라 원성왕 6)에 증축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뒤, 1415년(조선 태종 15)에 다시 쌓았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익이 적고 나쁜 점이 많아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유적으로는 일직선으로 약 3㎞쯤의 제방(둑)만이 남아 있으며, 둑에 딸린 시설로는 둑의 남단 수문터였던 경장거(經藏渠), 북단 수문터였던 장생거(長生渠), 그리고 중앙 수문터였던 거대한 돌기둥[石柱(석주)] 등이 있다.
1925년 일제에 의해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1975년에 있었던 수문터 2개소에 대한 발굴조사에 따르면 둑의 높이는 약 4.3m, 윗변 너비는 7.5m, 밑변 너비는 17.5m 규모로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 너비는 4.2m이며, 여기에 사용된 돌기둥 높이는 5.5m이고, 돌기둥 1개의 무게는 약 8톤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돌기둥의 안쪽에는 너비 20㎝, 깊이 12㎝의 홈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 목제 둑판을 넣어 상하로 이동시키면서 방수량을 조절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조사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중수비)이 있는데, 그 크기가 높이 6.4척, 너비 3.4척이지만, 심하게 마모되어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수산제

수산제는 경상남도 밀양(密陽)에 있었던 관개용 저수지. 제방의 길이는 728보(步)이고 둘레는 20리에 이르렀다.
수산제 주위 양동리·귀명리·동촌마을의 산등성이에서는 고인돌[支石墓(지석묘)]·돌덧널무덤[石廓古墳(석곽고분)]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조개더미[貝塚(패총)]가 발견되고 있으며, 돌칼[石劍(석검)]과 4∼7세기 무렵의 유물인 붉은토기[등 신라토기도 많이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이곳은 일찌기 청동기 시대부터 문화가 발달되어, 진한에서 신라로 이어지는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적지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