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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초기 부여(夫餘)의 형성과정 -고구려(高句麗)의 계승

송화강 2019-05-29 (수) 22:16 6년전 13180  

[펌]초기 부여(夫餘)의 형성과정 -고구려(高句麗)의 계승


초기 부여(夫餘)의 형성과정 -고구려(高句麗)의 계승


<초기 부여(夫餘)의 형성과정 -고구려(高句麗)의 계승>


한민족 고대사의 원조격인 부여(夫餘)라는 나라에 대해 후세 사가들의 기록이 소략하여,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많은 혼란을 주었다. 따라서 초기 부여(夫餘)의 실체 및 소멸까지 변화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조금이나마 한민족 기원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보고자 한다.


<사기 화식열전>

연(燕)나라는 발해(渤海)와 갈석산(碣石山) 사이에 있는 큰 고을인데, 남쪽으로는 제 조나라에 통하고, 동북쪽으로는 흉노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상곡(上谷)으로부터 요동에 이르는 곳은 아주 먼 곳으로 백성들이 적고 자주 침략 당한다. 풍속은 조나라와 대나라와 아주 닮았으나, 백성들은 생각이 얇다. 물고기 소금 대추 밤 들이 많이 생산된다. 북쪽으로는 오환(烏桓) 부여(夫餘)와 이웃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예맥(穢貊) 조선 진번에서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 


부여(夫餘)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이다. 사마천의 <화식열전>는 경제활동의 대강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각 나라의 풍속과 지리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초기 부여(夫餘)의 위치는 연(燕)나라 북쪽이었으며, 시대는 趙나라 멸망 이전임을 감안하면 기원전 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마천은 부여(夫餘)라는 국명만 기록하였지 다른 정보는 없다. 이는 부여(夫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사마천이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 부여(夫餘)은 朝鮮인들로 구성 되었는가, 아니면 예맥(穢貊)족 이었을까?


<진서晉書>에 부여(夫餘)가 현도(玄 ) 북쪽 천여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왕의 도장 글귀에 穢王之印(예왕지인)이라 칭하였고 나라 안에 옛 예성(濊城)이 있다 하였다. <위서魏書」(魏收찬.북위서)>에서는 두막루국(豆莫婁國)은 물길국(勿吉國) 북쪽으로 천리되는 곳으로 낙(洛)으로부터 6천리 떨어져 있고 옛 북부여(北夫餘)이며 실위(室韋)의 동쪽인데, 혹은 본래 예(濊)의 땅이라고 한다 하였다.


서기 1세기에 쓰여진 <논형>을 비롯하여 이후 모든 기록에 부여(夫餘)와 朝鮮의 연관성이 드러난 것이 없다. 고대에는 요녕성(遼寧省) 부신시(阜新市) 지역을 구려(句麗 =九黎)라고 불렀는데, 이는 구려(句麗)족이 <전한>시대 이전부터 정착했던 사실을 증명하는데, <후한서>에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는데, 소제(昭帝)가 이맥(夷貊)이 침략한다고 하여 현도군을 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 라고 하였다. 소제(昭帝) 집권기에는 아직 추모가 나라를 개국하기 이전이므로 이맥(夷貊)의 침략이라 함은 예맥(濊貊)족의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초기 현도군이 있었던 옥저 지역은 대능하 이남 이라고 볼 때 예(濊)족 토착세력과 적봉에서 부신 지역까지 활동하던 맥족인 구려(句麗)족의 공격으로 현도군은 적봉 이남으로 치소를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여(夫餘)의 종족은 예맥(濊貊)족으로 추정된다.


부여(夫餘)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高句麗)가 부여(夫餘)를 흡수 통합한 이후에나 중국측에 알려졌다고 볼수 있다. 후한 시대에 편찬된 <논형>에 이르길


"북이(北夷) 탁리국 왕의 시비가 임시하였다. 왕이 그 여자를 죽이려 하니 대답하기를 "달걀만한 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까닭에 제가 임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 안에다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금 마구간 안으로 옮겨 말에게 깔려 죽게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여겨 그 어미로 하여금 거두어 종처럼 천하게 기르도록 하였다. 그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마소를 치게 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렀는데,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병은 건너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도읍을 정하고 부여(夫餘)의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북이(北夷)에 부여국이 있다."


부여(夫餘) 건국신화를 말하고 있는데, 이후 <위략> <수신기>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고구려(高句麗) 추모왕 건국신화와 매우 유사하다. 이병도는 이에대해 부여(夫餘) 건국신화는 고구려(高句麗) 건국신화가 와전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호태왕비문>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창조하시었다.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녀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시니, 나면서부터 성스러움을 지니고 계시었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길,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녀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은 떠 올라라." 하니 소리에 응하여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 떠 올랐다. 그러한 연후에 건너가 되고, 비류곡의 홀본 서쪽의 성위에서 도읍을 정하였다. 세상에서의 위치를 즐기지 않아, 황룡을 아래로 보내어 왕을 영접하니, 왕이 홀본동쪽에서 용의 머리에 올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비문에는 동명(東明)왕이라 하지않고 추모왕이라 기록하고 있다. 추모왕이 동명(성)왕의 휘를 가졌다면 광개토태왕릉비에 추모왕이라 하지 않고 동명(성)왕이라 기록하여만 했다. 또한 <모두루 묘지>에 "하백의 손자시오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 께서는 원래 북부여에서 나오셨도다. 천하 사방이 이 나라가 최고로 성스러움을 알았다."라고 하였듯이 광개토태왕 당시 북부여 자사를 역임했던 모두루란 자도 동명(東明)왕이라 하지 않았다. 이는 부여(夫餘) 건국신화와 고구려(高句麗) 추모왕 건국신화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남산 묘비>에 "옛날에 동명은 기운에 감촉되어 호천을 넘어서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로 잉태되어 패수에 임하여서 도읍을 열었다."라는 기록이 이를 반증한다.

고구려(高句麗)가 부여(夫餘)를 흡수 통합하면서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동명(東明)왕 신화를 인용한 것으로 볼수 있다.


부여(夫餘)가 언제부터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고 존재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사마천의 기록에 국명이 나타나는 것을 볼때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존재 하였다고 생각된다. 이후 고구려(高句麗) 추모왕 건국시에 부여(夫餘)가 다시 기록에 보인다. 사마천 이후 부여(夫餘)에 대한 중국측 기록은 고구려(高句麗)을 통해서 인용된 것으로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구삼국사>를 인용한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삼국사기>를 통해 부여(夫餘)의 변천과정을 고찰한다.


<동명왕편> 서장(序章)

海東解慕漱 해동의 해모수는 眞是天之子 진실로 하늘의 아들이시라. 

본기에 말하기를 부여왕 해부루가 늙어서도 자식이 없어 산천에 제를 지내 후사를 구하러 가는데 부리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금색의 개구리 모양의 작은아이가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주신[賜] 아들이로구나." 하면서 거두어 길렀다.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그 나라의 재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일전에[日者] 하늘이 나에게 감응하여[天降我] 말씀하시기를, '장차 나의 자손을 시켜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다. 너는 그것을 피하라. 동해 바닷가에 땅이 있어 가섭원(迦葉原)이라 합니다. 땅에 마땅히 오곡을 길러[宜(有)五穀] 도읍을 할 만 하다.'라고 하였습니다."했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라 하였으며, 옛적 도읍에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로 와서 도읍하였다.


부여(夫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등장한다. 해부루(解夫婁)가 부여(夫餘)의 몇 번째 왕 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해부루(解夫婁)왕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解慕漱)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고 동쪽으로 옮긴다. 해부루(解夫婁)와 해모수(解慕漱)는 친족관계로 보이며, 금와(金蛙)의 양자 입적을 계기로 해모수(解慕漱)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것으로 이해된다. 동부여(東夫餘)에서는 해부루(解夫婁)가 죽고 금와(金蛙)가 왕위에 오른다. 금와(金蛙)왕은 해모수(解慕漱)의 반대 세력을 포섭하며 원부여(原夫餘) 공격을 준비한다. 해모수(解慕漱) 또한 왕권강화를 위해 원부여(原夫餘) 토착세력의 하나인 하백(河伯)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조선 후기 학자 안정복은 하백(河伯)이 군장의 이름이라 하였다. 하백(河伯)의 위치는 동부여(東夫餘)와 해모수(解慕漱)의 원부여(原夫餘) 중간일 것이다.


해모수(解慕漱)는 하백(河伯)과의 담판으로 맏딸 유화(柳花)를 왕비로 맞이한다. <동명왕편>에는 하백(河伯)과의 혼인과정을 신화적으로 표현 하였지만, 유화(柳花)가 원부여(原夫餘) 왕도로 간 것으로 생각된다. 고토 회복과 해모수(解慕漱)에 대해 좋지않은 감정을 품었던 금와(金蛙)왕은 드디어 원부여(原夫餘)를 공격 하기에 이른다. 이 전쟁으로 해모수(解慕漱)가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며, 하백(河伯)에게 도망쳐왔던 유화(柳花)는 재차 태백산(太伯山) 남쪽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관리에게 발견되어 결국 금와(金蛙)왕에게 붙잡힌다. 이로써 금와(金蛙)왕은 해모수(解慕漱)에게 빼앗겼던 부여(夫餘) 의 적통이라는 지위를 회복한다. 그러나 한 가지 잘못은 해모수(解慕漱)의 적자인 추모(鄒牟)를 살려 두었다는 사실이다.


<동명왕편> 본장(本章)

해가 지나 장대하여 재능이 아울러 갖추어졌다. 금와왕은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며 사냥을 다녔다. 왕자와 종자 40여 명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을 쏘아 많이 잡았다. 왕자가 그것을 투기하여 주몽을 붙잡아 나무에 묶고 사슴을 빼앗아 가버렸더니 주몽은 나무를 뽑아서 가버렸다. 태자 대소가 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주몽이란 놈은 신이 내린 용력을 가진 사람이니, 눈길[瞻]이 심상치 않습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기원전 57년에 추모(鄒牟)가 부여(夫餘) 왕실에서 태어났다. 부여(夫餘)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 불렀다. 해모수(解慕漱)의 아들답게 추모(鄒牟)는 재능이 뛰어났는데, 금와(金蛙)왕의 태자 대소의 경계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로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라는 기록으로 금와(金蛙)의 왕자중에 우태(優台)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추모鄒牟가 졸본(卒本)지역에 정착하기 이전에 이곳에 있었던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연타발은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금와(金蛙)왕의 왕자 우태(優台)와 자신의 딸 소서노를 혼인 시킨다. 부여(夫餘) 태자 대소의 압박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유화(柳花)는 비밀리에 자신의 토착지역 사람과 연통하여 추모(鄒牟)를 탈출시킬 계획을 세운다. 기원전 37년에 드디어 추모(鄒牟)는 부여(夫餘)에서 탈출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 지역에 정착한다. 추모(鄒牟)는 해모수(解慕漱)의 적자이자 어머니 토착지역인 하백(河伯)의 외손자라는 두가지 타이틀을 바탕으로 졸본부여(卒本扶餘)왕으로 등극한다. 이는 우태(優台)가 죽은후 부여(夫餘)와의 연결고리가 없었던 졸본(卒本)에 천손의 아들이라는 추모(鄒牟)가 오게 되었던 것이다. 후원 세력을 얻고자 했던 추모(鄒牟)와 세력 신장을 꾀했던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결과이다.


추모(鄒牟)왕은 졸본부여(卒本扶餘)의 주축 세력이었던 구려(句麗)족들을 감안하고, 부여(夫餘)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하여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칭한다. 추모(鄒牟)왕은 고구려(高句麗)를 개국 하였지만 왕을 증표하는 기물(我器)이 없었다. 이에 부분노(扶芬奴)가 비류(沸流)의 고각(鼓角)을 훔쳐오는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다. 추모(鄒牟)왕의 지속적인 공격에 이길수 없다고 판단한 비류국(沸流國)의 송양(松讓)은 결국 기원전 36년 나라를 들어 바친다.

추모(鄒牟)왕은 비류국(沸流國)을 병합하고 여세를 몰아 기원전 32년에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는다. 또한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北沃沮)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는다. 이렇듯 부여(夫餘)와의 제2차전을 앞두고 영토확장에 심혈을 기울이던 추모(鄒牟)왕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당도한다. 기원전 24년 부여(扶餘)에 남았있던 추모(鄒牟)왕의 모후인 유화(柳花)부인이 죽는다. 기록에 따르면 유화부인이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죽었는지가 자세하지 않다. 하지만 금와(金蛙)왕이 태후의 예로서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으며, 이에 추모(鄒牟)왕이 사신을 보내 은덕을 갚은 것으로 볼때 병으로 죽음을 맞이 했던 것 같다.


추모(鄒牟)왕은 아버지 해모수(解慕漱)의 원한도 갚지 못한채 기원전 19년 나이 40세로 승하 하신다. 앞서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扶餘)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자, 추모(鄒牟)왕은 그를 태자로 삼는다. 유리(類利)가 태자가 되고 추모(鄒牟)왕의 죽음까지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진 걸까?

<호태왕비문>에 “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시자” 란 표현이 주목된다. 유리(類利)가 태자가 되면서 왕위(王位) 계승문제로 말미암아 개국(開國) 시기부터 생사를 같이 한 중신(重臣)들인 오이(烏伊) 등과 건국(建國) 과정에서 중요한 중심축으로 작용한 소서노(召西奴)의 세력과의 정쟁(政爭)에 휘말린 듯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속에 왕에 오른 유류(孺留)왕은 내부 단속에 전념 하느라 추모(鄒牟)왕의 유훈을 따를 정신이 없었다. 당시 부여(扶餘)는 금와(金蛙)왕에서 대소로 왕위계승이 이루어 졌고, 고구려(高句麗)의 혼란을 틈타 부여(扶餘)왕 대소는 기원전 6년에 사신을 보내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한다. 이에 유류(孺留)왕은 부여(扶餘)가 강대한 것을 꺼려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서 가지 않았으므로 겨울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돌아갔다. 제1차 부여(扶餘) 對 고구려(高句麗) 전쟁은 자연재해로 싱겁게 끝난다.


부여(扶餘)의 공격으로 두려움을 가진 유류(孺留)왕은 도읍지 천도(遷都)을 생각한다. 서기 3년에 유류(孺留)왕은 드디어 국내(國內)로 천도(遷都)를 하게 된다. 부여(扶餘)왕 대소는 제1차 고구려(高句麗) 공격 이후 군사력을 강화 하던중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서기 10년에 “모천(矛川)가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져서 싸웠는데,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논의하던 [어떤] 사람이 “검은 색은 북방 색이다. 북부여가 파멸할 징조이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부여(扶餘) 왕자들 간에 벌어진 왕권 다툼으로 보인다. 왕자의 난을 진압한 대소는 고구려(高句麗)에 사신을 보내 유류(孺留)왕에게 형제의 예를 요구한다. 당시 무휼(無恤)은 부여(扶餘)가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꾸짓는다. 서기 13년에 무휼(無恤)은 유류(孺留)왕으로부터 병권을 받아 제2차 부여(扶餘) 對 고구려(高句麗)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로인해 무휼(無恤)은 태자가 되며 군무와 국정을 맡는다.


무휼(無恤)은 서기 18년에 왕자 여진(如津)의 반란을 잠재우고 유류(孺留)왕을 폐위 시킨다. 유류(孺留)왕은 모든 것을 내놓고 두곡의 별궁에서 죽는다. 이에 고구려(高句麗) 3대왕으로 등극한다. <삼국사기> 기록에 무휼(無恤)은 유리왕의 셋째 왕자로 되어 있지만, 무휼(無恤)의 어머니는 왕비 송(松)씨 라고 하였는데, 왕비 송(松)씨는 기원전 17년에 죽었다. 그렇다면 무휼(無恤)은 기원전 17년 이전에 태어났어야 한다. 해명(解明)이 기원전 12년에 태어났으니, 유류(孺留)왕의 셋째 아들이다. 라는 기록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는 조선시대에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재편찬 하면서 망실 되거나 훼손된 부분이 많은 관계로 기년에 있어서 이런 오류가 발생 한 것으로 판단된다.

무휼(無恤)이 왕에 등극할 당시 대륙의 하북지역 사정을 살펴보면 왕망(王莽)의 신(新)나라에 반기를 둔 각지의 호족들과 농민들의 반란이 있었고, 팽총(彭寵)은 신(新)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한 공으로 유주(幽州) 지역의 관할권을 인정받았다. 왕망王莽이 몰락하면서 천하대란이 일어났을 때는 반 자립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무휼(無恤)왕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가 멸망으로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서 서기 22년에 드디어 부여(扶餘) 공격에 나선다. 북명(北溟) 출신 괴유의 활약으로 부여(扶餘)왕 대소를 죽이지만, 나라를 흡수 시키지는 못한다. 대소의 죽음으로 부여(扶餘)는 혼란에 빠지고, 이에 부여(扶餘)왕의 아우는 갈사수(曷思水)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한다. 갈사국왕(曷思國王)은 금와(金蛙)의 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7월에 대소의 사촌 동생이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자, 무휼(無恤)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 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낙(絡)씨 성을 주었다. 이후 서기 68년에 갈사국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고, 서기 72년에는 조나(藻那)를 정벌하였다. 또한 서기 74년에 주나(朱那)를 정벌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로 삼았다. 이로써 부여(扶餘)는 고구려(高句麗)에 완전히 통합된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였던 부여(扶餘)는 고구려(高句麗) 태조왕에 이르러 멸망 하게 되었다. 이는 고구려(高句麗)가 부여(扶餘)의 정통성을 계승 받은 것이 된 것이다. 


<북사(北史)>에 “고구려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며 음사(淫祠)가 많다. 신묘(神廟)가 두 곳에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이라고 하여 나무를 새겨 부인의 상(像)을 만들었다. 또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조로서 부여신의 아들이라 하였다. 모두 관청을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였으니 대개 하백녀(河伯女)와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유화(柳花)를 부여신(夫餘神)으로 삼고 제사를 지낼 정도로 고구려(高句麗)가 부여(扶餘)의 정통성을 계승 했다는 자부심이 어떠 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서기전 17년 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을음(乙音)은 온조왕의 재종숙부라 했는데, 즉 북부여(北夫餘) 서손(庶孫) 우태(優台)계 7촌 이다. 또한 온조왕은 서기 23년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부여(扶餘) 출신인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는다. 따라서 백제(百濟) 또한 부여(扶餘) 계승 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다. 백제(百濟) 성왕이 남부여(南夫餘)로 국호를 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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