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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 사라진 문명 7부 - 이집트 람세스 2세

송화강 2019-05-29 (수) 22:33 6년전 12343  

사라진 문명 7부 - 이집트 람세스 2세

 

1. 3,300년전 람세스 2세,

카르나크 신전 궁전 진입로에 다주식 홀을 세우다!~

자연석을 조각해 신전을 건축한 람세스 2세는 전설에 빛나는 위대한 인간이었다.

람세스는 이집트를 67년 동안 지배하며 제국의 영광을 이루고자 온 열정을 쏟았다.

"동서남북을 불문하고 신전을 세웠으며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창출해냈죠."

- 캐슬린 쿠니 박사, 스탠포드 대학교

 

람세스가 남긴 위대한 유적 속에서 이제 우리는 최신 연구와 첨단 컴퓨터 영상 기법을 통해

3,300년 전 람세스가 열망했던 야망의 진정한 실체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볼 것이다.

 

람세스는 아주 기본적인 도구로 건축 역사에 남을 아주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데

헤아릴 수 없는 인력과 수천 톤의 돌로 대역사를 이룩했다.

 

이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람세스2세가 서 있었다.

이제 람세스2세가 세운 사라진 문명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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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는 이집트 왕좌의 계승자로서

2,000년에 걸친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위대한 문명의 지배자인

파라오가 될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치와 종교의 대격변기 속에서 제국의 권좌를 차지한 람세스 왕가는

통치 기반을 다질 권력을 구축해야만 했다.

람세스의 조부인 람세스 1세는 가문에서 최초로 이집트의 권좌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리고 부친인 세티왕은 군사력을 통해 제국의 지배자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당시 람세스 가문 신흥 왕가였습니다.

람세스 1세는 겨우 1년 반만에 권좌에서 물러났고

세티왕의 통치 기간도 11년에 불과했죠."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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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로서 위상을 갖추어야 했던 람세스 왕가는 이 이상을 건축물을 통해 구현했다.

 

역사적으로 파라오는 건축물을 통해 자신의 권능을 세상에 과시했는데

위대한 도시 테베의 카르나크의 대규모 신전을 세운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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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의 주인이었던 아문라 신은 새로운 이집트 왕국의 수호신이었습니다."

 

제사장을 겸임했던 파라오들은 카르나크 신전에서 자신들의 신들을 받아들였으며

람세스가 태어날 무렵부터 이미 신전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건물은 계속해서 보강되고 헐리거나 개축되었습니다."

아문라의 신전은 그 심장부에 자리 자리잡고 있다.

그 주변으론 역사적으로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고자

신과 교감하는 새로운 통로로 상징되는 자신만의 건축물이나 입구에 탑문을 증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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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세계를 지배한 위대한 파라오들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신전 규모가 더욱 확장되었죠."

- 찰스 밴 시클렌 3세, 이집트 학자

 

"카르나크는 이집트의 왕들이 위업을 과시하던 장소로

람세스 2세가 그 전통에 따라 신전의 확장에 힘쓴 건 당연한 일이었죠."

- 캐슬린 쿠니 박사, 스탠포드 대학교

 

람세스의 부친도 자신의 위업을 남기고자 거대한 기둥이 세워진 건축물을 세웠다.

장자이자 제국의 계승자인 람세스도 이에 한몫 거들었다.

 

"세티왕과 람세스 2세의 권력 승계는 아주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람세스는 어릴 때부터 상당한 책임이 주어졌어요.

람세스는 10살 때 이미 장군의 반열에 올라섰죠."

- 켄트 윅스 교수, 테베 지도화 사업 프로젝트 책임자

 

건축 부지로 결정된 곳은 거대한 탑문 사이에 궁전 진입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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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자가 남긴 건축물들은 카르나크를 찾는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 다주식 홀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안에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들어갈 정도니까요."

 

오늘날 전문가들은 이 다주식 홀 건축 공법을 파악하고

람세스 통치 시절 웅장한 위용을 과시했던 그 본모습을 복원하고자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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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곳엔 석조 구조물 위로 웅장한 지붕이 덮혀 있었고

그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기둥을 조밀하게 세웠다.

 

"거대한 방을 건축하려면 수많은 기둥이 필요하게 마련이므로

이 다주식 홀에도 기둥이 숲을 이룰 만큼 엄청나게 많습니다."

- 찰스 밴 시클렌 3세, 이집트 학자

 

당시 이집트 건축가들이 사용 가능했던 도구라고 해봐야

원시적이고 조악한 돌 절구공이나 구리정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대역사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했다.

"당시엔 기둥을 따로따로 세운 것이 아니라

전체 건물의 토대를 먼저 건축했습니다.

기둥의 기반이나 측벽이 이에 해당하죠."

 

이 구조물은 설계상으로 134개의 기둥이 필요했고

중앙 주랑의 경우 7층 높이로 세워졌다.

 

당시 건축 공법에 대한 해법은 한 개인 무덤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3,000년 된 일종의 건축 설명서와도 같다.

벽화를 조사한 결과

당시의 고도로 발달한 공법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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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왕조 시절의 이 진흙 벽돌 제작 과정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당시 사용했던 기술이 5천년 동안 변함없이 전승됐으니까요.

 

물은 나무로 둘러싸인 웅덩이에서 퍼 올려 조달했고

이를 진흙과 섞은 후 밀왕겨를 넣어 반죽했겠죠.

그리고 이를 틀에 넣은 다음 땅에 놓고 이틀간 건조시켰습니다.

완성된 진흙 벽돌은 벽을 세우는 데 쓰이거나

이처럼 다주식 홀 건축 시 경사로를 건축하는 데 활용됐죠."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경사로의 활용 방법이 이 공사의 핵심 관건이었다.

이 벽화를 보면 경사로는 땅에 파묻힌 광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법은 카르나크 신전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경사로의 공법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당시의 건축 공법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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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엔 발판이나 기중기를 이용해 돌을 끌어올린 게 아니었다.

대신 대지 차체를 끌어올렸다.

 

"우선 모든 기둥의 기반이 되는 바닥 블록을 배치한 다음

그 속을 흙으로 채우고 양쪽에는 진흙 벽돌로 경사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릴 틀만 잡은 블록을 운송한 후 다시 바닥 블록 위에 쌓아 올렸습니다.

그 후 다시 속을 채우고 경사로를 확장한 후 전체 과정을 반복했죠.

 

따라서 완공 후에는 건물이 완전히 흙에 파묻힌 형태가 되며

양쪽으로는 거대한 진흙 벽돌 경사로가 만들어졌죠."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경사로는 임시 구조물일 뿐이었지만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며 약 7도 정도 기우려진 비탈을 형성했다.

다주식 홀의 기둥들을 모두 합하면

미식 축구장 정도의 길이의 두 배에 달한다.

 

인부들은 기둥에 쓰일 2만 5천톤의 돌을 이 긴 비탈 너머로 끌어올렸다.

기둥의 원통형 받침은 너무나 거대해서 'D'자 형태로 절반씩 나누어 제작했는데

각기 십 톤에 이를 만큼 크기가 엄청났다.

 

람세스의 석공들이 이 받침돌을 완벽하게 접합한 덕분에

일부는 3,200년 동안 전혀 꿈쩍도 안 할 수 있었다.

 

피터 브랜드 박사는 고대 건축 전문가인 데니스 스탁스와 함께 이 접합 공법의 조사에 나섰다.

이 공법의 비법은 돌의 홈 속에 박힌 나무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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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단단한 나무를 구한 다음 반대쪽 홈에 맞도록 모양을 다듬습니다.

그리고 돌이 합쳐지면 나무 조각을 홈에 두드려 고정시켜요.

이로써 두 벽돌은 움직이기도 힘들만큼 완벽하게 접합되죠."

 

"결국 단순히 연결된 상태 그 이상이었군요."

 

"그렇죠. 미동도 할 수 없을 만큼 정밀하게 붙여 놓은 상태로

전체 작업 과정을 끝내면 빈틈없이 접합되기 때문에 절대로 움직일 수가 없죠."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다음은 모래를 사용해 돌을 다듬는 과정이다.

 

"돌에 거친 면이 남은 걸 보면 처음부터 매끄럽게 다듬은 건 아닙니다.

채석장에서 돌을 연마할 시간이 없었던 탓에 현장의 건축가들에게 다듬도록 했을 겁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많은 돌 블록을 생산해야 했으니까요."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일단 기둥이 세워지면

그 다음엔 경사로와 계단은 점차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경사로를 제거하면서

한층씩 아래로 계단 벽면의 돌을 다듬어 내려갔습니다.

 

사암 숫돌로 문지른 겁니다.

이는 상형 문자를 새기기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었죠."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람세스 부자는 함께 이 대역사를 관장했지만

부친인 세티왕이 세상을 떠나자

권좌에 오른 람세스는 자신의 뜻대로 공사를 진행할 수가 있었다.

 

그후 람세스는 카르나크에 다주식 홀을 시작으로

이집트 건축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대역사를 끊임없이 추진해나갔다.

파라오에 오르자

람세스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 반열에 올라섰다.

평생을 이 자리를 위해 준비해온 그는 마침내 그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람세스는 카르나크의 신전 건축을 직접 관장했다.

 

람세스 휘하의 예술가들은 공사에 참여한 왕의 모습을 묘사했다.

람세스가 직접 손에 흙을 묻혔다는 것은 믿기 힘들지만

공식적인 기공식은 그의 부친이 시작한 이 공사가

이제 람세스 자신의 기념물, 자신의 업적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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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는 두 기둥 사이의 끈으로 손을 뻗치며 신전 건축의 공식적인 사열을 시작했죠.

이어서 곡괭이를 들어 땅을 판 후 첫 번째 진흙 벽돌을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에게 신전을 봉헌하는 의식을 거행했죠."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공사에 아주 관심이 많았었던 것 같고

설계에도 관여한 바가 많았는데 역사적 자료까지 조사할 정도였어요.

신전 설계와 디자인에 정확성을 기하려고 말이죠."

 

켄트 윅스는 직접 그 기록들을 조사하며

당시 수백 명에 이르는 석공들이 21미터에 달하는

기둥들을 올리는 건축 공법을 파악하고자 노력해왔다.

 

람세스의 석공들은 기둥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각각의 표면에 정교한 이집트 상형문자까지 새겨넣었다.

 

"이 벽화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비계 사용 여부가 잘 나타나 있죠.

이 그림은 18대 왕조의 고분 벽화입니다.

 

보시다시피 인부들이 나무를 연결해 비계를 만든 후

실물보다 큰 왕의 조각상을 다듬고 제작하고 있습니다."

- 켄트 윅스 교수, 테베 지도화 사업 프로젝트 책임자

 

기둥 디자인은 한 뼘 한 뼘 공을 들여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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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계를 설치해두고

인부 한 명은 돌의 표면을 다듬고 있고

반대쪽에선 정을 이용해 세심하게 눈을 조각하고 있죠."

- 켄트 윅스 교수, 테베 지도화 사업 프로젝트 책임자

 

원시적인 도구가 고작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람세스의 야망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람세스 치하는 철기 시대 이전이라

석공들은 무른 구리류의 도구로 돌을 조각해야 했다.

 

데니스 스탁스는 고대 석공들의 공법을 파악하는데는

당시 석공들이 사용했던 그 도구로 작업 방식을 재현해보는 게 최선이라고 믿고 있다.

 

"작업 방식은 돌 표면에 도안의 윤곽을 그린 후

중앙을 정으로 파내며 마무리했죠."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데니스에 따르면 비록 고대 이집트가 고도로 정교한 문명을 자랑했지만

일부 복잡한 작업에선 이런 수석 도구와 같은 석기 시대 장비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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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구는 워낙 단단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구리 정보다 도안의 윤곽을 다듬는데 훨씬 더 용이합니다."

- 켄트 윅스 교수, 테베 지도화 사업 프로젝트 책임자

 

모든 기둥과 벽의 장식도 이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집트 상형문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메세지까지 담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다주식 홀이 그림과 비문이 복잡하게 얽힌 곳이라 생각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속에도 체계가 있습니다.

 

그림 속의 신은 항상 신전 내부에서 밖을 쳐다보고 있으며

왕은 신을 영접하기 위해 밖에서 신전 내부로 접근하는 형태를 띠죠."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신전의 벽엔 람세스와 당시 이집트 민족, 그리고 신들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이는 곧 람세스의 권능이 신성한 힘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기둥이 있는 신전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성스러운 신의 보금자리 같은 느낌이 들죠."

- 캐슬린 쿠니 박사, 스탠포드 대학교

 

이제 수십 년간의 조사와 최신 컴퓨터 영상 기법을 바탕으로

처음 지어졌을 당시 이곳의 본모습을 재현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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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풍상에 지친 이 돌위엔 생생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오늘날 이집트의 신전은 대부분 단조로운 형태를 띠지만

고대에는 화려한 색깔로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람세스의 건축가들이 사용했던 천연 안료는 오늘날에도 룩소르의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데

과거와 마찬가지로 식물성 기름에 천연 안료를 혼합한 형태다.

 

"고대 이집트에선 오늘날보다 색상의 종류가 훨씬 적었고

기본적으로 6가지 색상만을 사용했습니다.

적색 노란색, 녹색, 청색을 비롯해 흰색과 검은색이 전부였죠."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가장 값비싼 안료는 청색과 녹색이었습니다.

이런 청색으로 치장된 무덤이 상상되시나요?

 

실제로 이런 종류의 안료를 사용한다는 것은

곧 최상급의 자재를 쓸 만큼 부자라는 뜻이죠."

- 캐슬린 쿠니 박사, 스탠포드 대학교

 

"신전 벽의 안료가 대부분 희미해진 게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3천 년 전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화려하게 치장된 곳이었으니까요."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당시 이 다주식 홀의 건축과 장식에 수많은 시간과 자금이 투입되었지만

이집트의 특권 계층이나 사제가 아니면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신전의 외부까지만 출입이 가능했죠.

축제 때는 특별히 첫 번째 안마당까지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신전은

공개적인 참배 장소가 아니라

신의 개인적인 보금자리였으며

백성을 대표하는 파라오만이 신전에서 제물을 봉헌할 수 있었다.

이로써 파라오는

모든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했다.

베일에 싸인 다주식 홀의 내부는 웅장한 외벽 뒤에 숨겨져 있었다.

또한 신전의 벽 자체도 람세스의 위대함을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이 구역의 신전을 세우는데 사용된 7천톤의 돌은 특수한 한 종류로만 국한됐다.

"테베 주변에는 보다시피 엄청난 규모의 석회암 언덕이 있지만

신전 건축에 사용된 돌은 석회암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이집트인들은 사암을 선호했는데

가장 가까운 채석장은 남쪽으로 무려 100km나 떨어져 있었죠."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당시 사암은 거의 실실라에서 채굴했다.

여기서 카르나크까지는 배를 통해 3일 걸렸다.

스탁스가 이 과정을 체험했다.

 

당시 파라오들은 돌만 있다면 어디든 찾아나섰다.

 

"테베의 새로운 신전 건축에 사용된 엄청난 양의 사암을 고려할 때

실실라에서는 매일같이 채굴 작업이 계속 되었을 겁니다.

아마 그 기간이 5백 년은 되겠죠."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전문가들은 강가의 실실라 이외에

이집트 사막 깊은 곳에서도 채석장을 발견했으며

이와 관련해 카르나크까지 수송로를 밝히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곳은 고대 이집트의 수송로 중에 가장 잘 보존된 구역일 겁니다.

(현재 위치는 여기 같아요.)

네, 그럴 겁니다.

흥미롭게도 이곳 채석장에서 시작되는 모든 수송로가

한결같이 여기 이 지점을 향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 퍼 스토레미르 박사, 보존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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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채석장은 나일강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강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죠.

아마 일단 돌을 쌓아 놓은 후

강 수위가 최고조에 달하면 배에 실어 수송했을 겁니다"

- 엘리자베스 블록샘 박사, 런던 대학교

 

"강까지 끌고 가서 배에 싣고 나일강의 범람에 맞춰 운송해

카르나크나 룩소르 등 여러 곳에서 하역을 했죠.

수천 명이 1년 내내 정신 없이 바빴을 겁니다."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람세스의 수송선들은 50척의 배로 돌을 운송했는데

이 배들은 나일강의 범람을 고려해 바닥이 평평해야 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양의 돌을 실어날랐다.

 

"람세스 시절의 선적 기록을 조사한 결과

게벨 실실라 채석장에서 돌을 수송하는 배마다 선장이 있었고

각 수송선마다 5~7개의 돌 블록을 실어 날랐습니다."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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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의 범람이 최고조에 달하면

곧 바로 신전까지 수송이 가능했다.

 

"이건 람세스 3세가 통치한 지 28년째의 범람 기록으로

3천 년 전 나일 강이 매년 이 수위까지 범람했음을 나타내죠."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석재는 특별히 건축된 운하를 통해

공사 현장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운송됐다.

하지만 인부들은 다시 그 돌을 석공들의 작업장까지 운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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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스탁스는

당시 이집트인들이 석재를 좀더 원활하게 운송하기 위해

회반죽을 윤활유처럼 사용했을 거라 믿고 있다.

 

"회반죽을 윤활제처럼 바르면 미끄러지듯 쉽게 쌓을 수 있죠."

 

하나씩 쌓은 벽돌이 모여 웅장한 다주식 홀을 둘러쌓다.

그리고 내부 성소로 이어지는 통로도 완공됐다.

이제 3천 3백 년만에 아문라의 사제들에게만 개방되었던 신전의 내부가 복원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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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신에게 가까워지는 셈입니다.

신전은 바로 신의 보금자리니까요.

신전 내부의 성소는 뱃머리에 숫양의 머리가 달린 아문라 신의 황금 배가 채우고 있었죠."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제사장을 겸임했던 왕은 매일같이 신을 모시는 성소를 방문해

신에게 의복과 음식을 바치며 성유를 붓고 법문을 읽어 신을 깨우고 새 생명을 선사받았죠.

그런 후에 신성한 자세로 성소의 문을 닫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채 성소를 떠났습니다."

- 캐슬린 쿠니 박사, 스탠포드 대학교

 

람세스가 카르나크에 남긴 것은 당시에도 모든 면에서 인상적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2.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

라메세움의 카데시 전투 기록,

그리고 아부심벨, 신의 반열에 오르다!~

 

 

람세스 2세는 카르나크에 다주식 홀이 완공되자

3.2km 근방으로 눈을 돌려 다시 한 번 역사에 길이 남을 야심찬 계획에 착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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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 신전으로 가는 길엔 스핑크스가 줄줄이 서 있다.

 

매년 람세스는 이 길을 따라 참배 행렬을 이끌고

신이 이집트에 선물한 가장 큰 선물을 경축하러 나섰다.

바로 나일강의 범람이었다.

이집트의 대지를 풍요롭게 만드는 나일강 범람의 경축 행사는 '오페트 축제'라 불렸다.

 

"이 의식은 경건한 분위기로 시작되지만

주말이 되면서 점점 열광적으로 치달아 카니발과 같은 흥겨운 축제로 변모하죠."

- 켄트 윅스 교수, 테베 지도화 사업 프로젝트 책임자.

 

"이때가 되면 다들 술에 취해 흥겹게 즐기며 성적으로도 아주 자유분방해집니다.

이 축제는 아문라 신이 스스로 재창조하도록 도움으로써

다음 해에도 이집트 인에게 축복을 내리길 바라는 행사입니다."

-캐슬린 쿠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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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는 건물을 세울 때마다 늘 전대 파라오들과 경쟁을 했다.

또한 룩소르 신전엔 이미 웅장한 열주가 존재했다.

3천 년의 풍화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한 이 벽화 속에는

람세스의 웅대한 포부가 드러나 있다.

12미터의 거대한 조각상을 비롯해

이보다 높은 오벨리스크는 각각 하나의 화강암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아침마다 가장 먼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건축물이다.

이는 곧 고대 이집트 제국을 통치하는 왕과 신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알려진 대로 람세스의 건축가들은 왕의 야심찬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제 고고학자들의 과제는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증거를 분석하며 그 성공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오벨리스크를 건축할 견고한 암석으로

람세스의 건축가들은 붉은 화강암을 선택했는데

가장 가까운 채석장도 남쪽으로 160킬로나 떨어져 있었다.

바로 아스완이었다.

 

"천연 화강암은 튼튼하고 훌륭한 석재로 이집트의 경우 아스완에서만 채굴할 수 있죠."

- 피터 브랜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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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쯤 완성한 오벨리스크는 훌륭한 증거 중 하나인데

수백 명의 인부들이 몇달 동안 작업한 후 그대로 버려진 것이었다.

 

"이 엄청난 크기의 오벨리스크

길이만 장장 40미터에 달하며 폭은 2.7미터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쯤 오면 인부들이 판 굴이 나타나는데

이는 돌을 밑으로 내리고 오벨리스크의 밑을 파기 위한 거죠.

전체 길이를 따라 땅을 파고 나면

몇 개의 지지대만 남겨 놓죠."

두 번째 커다란 난제는 거의 800톤에 가까운 하나의 돌덩어리를

원시적인 도구만을 사용해 제거하는 작업이었다.

 

"이 뾰족한 부분은 화강암을 깨는데 아주 유용하죠."

 

수개월간 매일같이 암석을 깍은 석공들은 돌을 내리칠 때 오는 충격을 견디어야 했다.

 

"손으로 깍기가 힘들었겠군요."

"그야 물론이죠."

"두 암석이 부딪힐 때 발생하는 엄청난 충격을 견뎌야 했으니까요."

 

실험 결과에 따르면

100명이 쉴틈없이 일을 해도 일주일에 겨우 2.5센치미터를 없앨 정도였다.

그리고 오벨리스크의 강한 시각적 효과는

기하학과 균형미에 좌우되기 때문에 정밀한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좋습니다. 줄을 팽팽히 당겨요."

 

암석의 기반에서 꼭대기로 모아지는 네 개의 가장자리를 만들기 위해

당시 장인들은 단순히 고정된 막대자에 연결된 줄을 이용해 이를 측정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정확히 딱딱 들어맞아요.

줄 바로 밑에 걸치는 걸로 봐서 측정이 정확했어요."

- 데니스 스탁스, 고대 기술 전문가

 

절단 작업이 끝나면 800톤이 넘는 오벨리스크를 제자리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는 특별히 제작된 거대한 수송선으로 나일강을 따라 운반된다.

룩소르에 도착한 오벨리스크는 신전으로 이송된다.

그런 다음 임시로 세운 벽과 모래를 사용해 제자리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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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들은 거대한 경사로 위로 오벨리스크의 밑둥을 끌어올린 후

모래로 가득 찬 저장고에서 서서히 모래를 배출하면 오벨리스크가 천천히 밑으로 기울어지죠.

그 이후에 하단의 좁은 홈에 닿으면 인부들이 오벨리스크에 줄을 묶어 최종 위치에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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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람세스가 자신의 이상처럼 완공된 웅장한 위용의 입구를 지켜본 광경을

3,300년이 지난 오늘날에 되살려볼 수 있게 되었다.

 

람세스는 과거의 위용을 무색하게 만들며 신전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와 같은 작업은 나라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람세스는 나라 전체에 동서남북을 불문하고 신전을 세웠으며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창출해냈죠.

경제적으로 아주 번영을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 캐슬린 쿠니 박사

 

람세스는 역사에 자신의 위업을 남기는데 만족하지 않고

제국의 남쪽 관문으로 눈을 돌려 아부신벨이라는 새로운 신전을 건축했으며

바로 이곳에서 자신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람세스는 당시 이집트 남성의 평균 수명의 무려 세 배 가까운 67년 동안 제국을 통치했다.

그의 제위 기간 동안 석공들은 끊임없이 공사에 전념하며

제국 전체에 걸쳐 세워진 벽과 기둥 및 조각상에 람세스의 이름과 이미지와 새겼다.

 

하지만 곧 이어 그는 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테베에 위치한 나일강 서안에 자신의 창제전인 라메세움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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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에 걸쳐 완공한 이 창제전엔 내부에 주랑이 건축되어 있었으며

그 입구엔 땅에 쓰러진 람세스의 조각상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형태는 이 조각상과 유사했지만 대신 규모는 몇 배나 더 웅장했다.

고대 조각상 중 가장 거대한 조각상으로 손꼽히는 이 걸작은 길이만 어림잡아 20미터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체 조각상의 무게는 천 톤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자유의 여신상보다 15배나 무거운 것이다.

라메세움은 파라오가 영원한 안식을 취할 장소로 건축한 석재창제전이다.

하지만 증거를 보면 람세스는 단순히 전통을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 벽화에는 정치와 종교에 걸친 람세스의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람세스는 자신의 뜻대로 역사를 다시 쓰고 있었다.

 

벽화에는 람세스가 치루었던 가장 유명한 전투도 묘사되어 있다.

바로 카데시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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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시 전투는 람세스 2세가 즉위하고 5년 뒤에 발발했는데

당시 적수는 람세스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히타이트 제국이었죠.

두 제국은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에서 맞붙었는데 이집트에겐 거의 재앙과도 같았죠."

-캐슬린 쿠니 박사

 

"람세스 2세가 카데시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기록은

적이었던 히타이트 제국의 문서에서 발견된 내용입니다.

전투 이후 두 제국은 강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로선 기껏해야 비기는 상황이었죠."

- 켄트 윅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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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벽화는 람세스의 압도적인 승리를 기리는 동시에 거인으로 묘사하고 있어

람세스 주변의 적은 시체거나 완전히 죽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벽화는 진실을 호도하고 있지만

당시 이집트 백성들에겐 단순한 선전 문구 이상의 파급 효과를 과시했다.

 

"람세스는 카데시 전투의 결과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포장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강력한 암시를 주입시켰습니다."

-캐슬린 쿠니 박사

 

람세스는 원하는 바를 돌에 새기면 설사 진실이 아니라해도 그대로 이룬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라메세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람세스는 곧 역대 파라오들이 감히 시작도 못했던 일을 착수한다.

그 자신의 위치를 파라오인 동시에 살아있는 신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람세스는 이 포부를 이루고자 아부심벨의 석벽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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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심벨은 거대한 조각상과 함께 돌에 새겨진 특별한 신전으로 아주 대담한 작업이었죠."

 

람세스는 이집트 신전의 끝에 거대한 신전을 세우고자 하는 일생 최대의 야심찬 계획에 착수했다.

 

"왕을 기리는 신전을 멀리 변방에 건축한 이유는

제국의 신인 아문라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서였죠."

- 찰스 밴 서클렌 3세, 이집트 학자

 

전문가들은 람세스가 이곳에 세운 진정한 위업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노력해왔다.

람세스는 기존의 건축 양식과는 달리 아부심벨 암벽에 그대로 신전을 조각함으로써 말 그대로 전인미달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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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현장으로 수송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바로 조각해버린 것이다.

당시 석공들은 사암을 깍아 상상을 초월하는 파라오의 조각상 네 개를 완성했는데

각각 그 높이만 무려 21미터에 달했다.

이 조각상은 인근의 누비아족에게 두려움을 주고자 건축된 것이다

 

"누비아족은 이집트의 주요 금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로서는 금광의 통제권과 아프리카와의 무역로가 아주 중요했죠.

흑단과 상아, 노예 무역 등을 위해서 말이죠."

- 켄트 윅스 교수

 

그리고 줄줄이 연결된 방과 절벽 내부로

45미터나 파고 들어간 신전의 내부 구조도 유례가 없을 만큼 웅장했다.

일 년의 이틀 동안은

왕실의 천문학자들과 건축가들의 지식이 빚어낸 드라마틱한 무대가 펼쳐졌다.

햇빛이 줄줄이 늘어선 신전의 모든 방들을 통과한 후

람세스와 더불어 다른 세 명의 신을 묘사한 조각상이 자리한 내부의 성역을 비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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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람세스는 스스로에게 자신의 이상을 입증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가장 위대한 파라오에 그치려 하지 않았다.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역사에서 보기 드문 왕으로

죽기 전부터 스스로를 신으로 승격시켰습니다."

- 켄트 윅스 교수

 

"고대 이집트의 기준에서 람세스가 기적에 가까운 나이까지 장수했고

위대한 업적까지 남겼으므로 백성들이 람세스를 신의 화신으로 믿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죠."

-캐슬린 쿠니 박사

 

람세스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아직 최후의 과제가 남아 있었다.

백성들의 눈에 람세스는 살아있는 신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 위대함에 어울리는 무덤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

 

자신의 무덤을 세우는건 파라오의 전통이었다.

권좌에 오른 순간부터 무덤 건설은 시작된다.

람세스는 평생의 신조에 맞추어

과거의 모든 파라오들보다 훨씬 크고 후세에 길이 남을 무덤을 건설하고자 했다.

전통적으로 왕가의 무덤판은 나일강 서안에 위치한 '왕가의 계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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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보면 서쪽과 동쪽 제방은 곧 이승과 저승의 경계나 다름없죠."

- 켄트 윅스 교수

 

람세스 2세 시절, 왕가의 계곡은 이미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왕족의 매장지였다.

람세스의 무덤 건축도 이 전통적인 매장지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람세스는 80대까지 살면서 거의 70년 가까이 통치를 계속 했다.

따라서 스스로 영면을 취하기에 앞서 수많은 왕족을 묻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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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 윅스는 왕가의 계곡 지도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웅장한 규모의 지하 석실을 발견했다.

이 석실들은 '5호 고분'이라 명명됐다.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 고분은

람세스가 자신의 아들들을 묻은 곳이었다.

 

"우리가 발견한 그 고분엔 125개가 넘는 석실이 있었고

곳곳마다 람세스 2세의 치하를 뜻하는 상징물로 가득했습니다.

가족의 무덤치고는 설계와 규모 및 기능적으로 상당히 독특했죠.

아들을 묻는 애통함으로 힘들게 완공한 탓에 5호 고분이 특이한 구조를 띠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람세스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취하길 원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선 특별한 석공 집단이 필요했는데

석공들은 이 고분의 돌에 자신만의 흔적을 남겼다.

 

이 기록의 해독을 통해 역사가 간과했던 석공들의 세계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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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공들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남겼습니다.

이 중 대부분이 '오스트리카'라는 기록인데

자신의 일상적인 기록으로 빚문서에서부터 쇼핑 목록까지 다양하죠.

이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신변잡기를 석회암에다 새긴 겁니다.

이는 고고학자나 사학자들에게 중요한 사료죠.

모르고 있었던 고대 이집트의 일상사에 관해 알려주니까요.

 

여기는 카하와 그 아내인 투하의 집입니다.

널찍한 거실도 보이고 곡식을 가는 절구를 갖춘 부엌도 있습니다.

집의 규모가 상당한 데는 다 이유가 있죠.

카하는 초기 람세스 왕가의 주요 인물이었으니까요.

세티왕과 람세스 2세 시절 큰 규모의 건축 공사를 관장했었죠."

- 캔트 윅스 교수

 

당시 석공들은 열흘을 주기로 절벽을 따라 여행을 하면서

왕가의 계곡에서 고분 건설에 참여했다.

 

"당시 석공들은 열흘 동안 일하고 나면

최소한 람세스 2세 시절에는 이틀간 휴식을 취했습니다."

- 캐슬린 쿠니 박사

 

캔트 윅스는 당시의 경로를 추적 중이다.

당시 건축가들의 과제는 미로처럼 얽혀있던 왕가의 고분과 통로 사이에서

역대 파라오들을 능가하는 웅장한 고분을 원했던 람세스 2세의 이상대로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규모의 공사 부지를 찾는 일이었다.

 

"파라오가 고분을 짓는 목적은 모두 동일했습니다.

새로운 제국에서 왕의 다음 생애를 향한 안전한 여정을 보장하는 거죠."

 

부친의 장례식을 주도한 람세스는 영원한 안식을 위해 화려하게 고분이 봉인되는 의식을 주제했다.

고분의 벽을 뒤덮고 있는 여러 이미지는 람세스의 가슴에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세티왕이 결정한 고분 전체의 내부 장식은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된 부조 형식이었죠.

따라서 입구부터 매장실까지 고분 전체가 부조와 비문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 켄트 윅스 교수

 

람세스는 부친의 고분을 완공한 건축가에게

자신의 고분 건축도 맡기면서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도록 지시했다.

이 공사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내부 공사 시작 이전에 터널 작업부터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인부들은 매일 4시간씩 2번 일을 했는데

일정 길이의 램프 심지가 타는 시간으로 작업 시간을 측정했죠.

첫 번째 심지가 다 타면 점심 시간이었고

두 번째 심지가 다 타면 퇴근할 시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건축가들은 숙련되고 훈련도 잘 받았지만 여전히 실수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왕가의 계곡에 매장실이 워낙 많았던 탓에 기존의 고분을 침범하는 예가 있었다.

 

"기존의 고분을 뚫게 되면 어떻게 했을까요?

경우에 따라 다양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고분을 새 고분과 연결시키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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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아주 인상적인 터널 구조 중엔 우연히 고분이 연결된 경우도 있었다.

람세스는 지하로 길게 연결된 터널 끝의 웅장한 석실 속에서 영면을 취하길 원했다.

 

이 매장실은 완공된 그대로 람세스가 죽기까지 반세기를 기다렸는데

람세스가 죽은 후 3,200년 동안 지진과 홍수 등을 겪으면서

지붕이 일부 무너졌고 벽을 칠한 일부 장식도 지워졌다.

람세스가 직접 기초를 설계한 매장실의 일부만으로

이제 왕이 최후의 안식을 영위했던 고분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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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상징이 고분 전체에 새겨져 있었고 지붕은 별빛이 총총한 밤하늘로 장식되어 있었다.

각 벽면엔 수호여신 이시에스가 파라오의 석관을 보호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매장실의 중앙엔 여러 겹으로 쌓은 석관이 람세스의 고분에 걸맞도록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영차! 영차! 좀 더 힘을 내요..."

 

데니스 스탁스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돌을 절단해

석관을 제작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자 노력해왔다.

 

"이 견고한 화강암은 이집트에서 가장 자르기 힘든 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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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탁스는 이집트인들이 무른 구리정으로 암석을 절단한 방식을 알아냈다.

"이 돌은 시간당 약 1센치미터의 비율로 암석을 절단했는데

이는 완전히 절단하는 데 여러 날이 걸린다는 뜻이죠."

 

이 톱엔 톱니가 없어 모래를 연마제로 사용했기 때문에

노동 집약적이긴 해도 효과적인 절단 방식이었다.

 

"자루 주위를 로프로 감고...."

 

관의 내부를 파내는 작업은 한층 더 어렵다.

 

데니스는 람세스 이전 시대의 비문에 관한 연구를 통해

당시 석공들이 사용했던 독창적인 공법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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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 윗면의 형태를 이와 같은 직사각형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주변을 따라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야 했습니다.

석관 내부 공간의 윤곽을 표시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석관의 중앙에 다시 구멍을 뚫은 다음 구멍 사이의 모든 바위를 깨뜨립니다.

이런 작업을 네다섯 번 반복하면 관의 밑부분까지 도달하게 되면서

파라오가 누울 공간이 마련되게 되죠. "

 

이 과정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그래도 람세스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

장수 기록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람세스는 90세 나이에 이 석관에 눕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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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는 통치 기간만으로도 신과 같은 반열에 올랐습니다.

세티왕의 통치 기간을 기억할 백성들은 아마 땅에 묻혔을 테고

권좌에 오른 람세스를 지켜봤던 사람도 모두 죽었을 테니까요. "

- 피터 브랜드 박사, 멤피스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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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라로 보존된 람세스 2세의 시신은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3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또한 람세스가 이집트 전체에 남긴 건축물도 여전히 건재하다.

 

"람세스는 이집트 전체에 위업을 남겼죠.

따라서 이집트의 어딜 가더라도 람세스의 이름이 새겨진 돌이나 조각상을 최소한 한 개는 볼 수 있습니다."

 

람세스의 건축물이 건축학자, 고고학자, 사학자들을 매료시키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람세스는 역사상 가장 많은 건축물을 남긴 왕으로 손꼽힙니다.

흥미로운 건 람세스의 놀라운 장수 기록뿐 아니라

통치 기간 동안 엄청난 수의 노동력을 확보한 후 나라 전역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죠."

- 캐슬린 쿠니 박사

 

카르나크 신전의 다주식 홀,

자신을 위해 건축한 무덤 및 절벽을 뚫어 만든 아부심벨 신전.

이 모든 유적은 람세스가 건축한 위대한 이집트 제국의 증거다.

하지만 람세스의 업적을 그대로 다시 소생시킬 수 있을 때만이 그 진정한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사라진 문명을 보고, 늘 평온하세요!~~^^

 

 

 

 

 

 

 

 

 

 

 

 

 

 

 

 

 

 

 

 

 

 

 

 

 

 

 

 

 

 

 

 

 

출처 : 권민서의 역사앞에서 | 글쓴이 : 민서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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