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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 사라진 문명 9부 - 고대문명과 위대한 건축물

송화강 2019-05-29 (수) 22:32 6년전 12393  

사라진 문명 9부 - 고대문명과 위대한 건축물

 

 

1. 5천 년 전 영국 오크니 제도,

스카라브레 신석기 취락 유적 발굴!~

고대 영국의 이교도 종족은 몇몇 창조물을 건축했다.

 

이들은 로마가 등장하기 전까지

무려 3천 년 동안 해변의 돌로 층층이 지은 스카라브레와 같은 취락

매셔위의 거대한 고분을 비롯해,

백악질 흙으로 지은 신비롭기 그지없는 언덕인 실버리 힐,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기념물인 스톤헨지를 건설했다.

 

이 종족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거대한 돌을 수백 킬로나 운송했으며

계절의 흐름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교도들이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탓에

이와 같이 웅장한 건축물을 세운 방법의 단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업적은

5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지 위에 적혀 있다.

 

이제 여러 전문가들이 이 고대 수수께끼에 대한 의문을 풀고

수천 년 전의 웅장했던 본 모습을 오늘날에 되살려 볼 것이다.

 

"이 고분에 들어가기란 힘들고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기어서 여길 통과해야만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죠."

 

지금부터 첨단 영상 기법과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영국 이교도 종족의 사라진 문명속으로 여행을 떠나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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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북쪽 끝에서 한참 벗어나 대서양과 북해가 만나는 곳에

궁벽하고 척박한 섬들이 모인 오크니 제도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선 역사의 여명기 이래로 사람들이 삶을 이어왔으며

전 세계 산재한 석기 시대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후대에 남겼다.

 

6천 년 전, 이 지역에 삶의 터전을 잡은 수렵. 채집민들은 땅을 경작하며 농부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 일상 생활에 대해선 거의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유적속에서 이들의 세계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태양년의 주기를 파악하는 환상 열석을 세웠으며

이승과 저승의 직접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무덤을 건축했다.

 

현재는 이 건축물을 세운 주인공을 '이교도'라 부르지만

스스로를 칭했던 이름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웅장한 건축물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오크니의 이교도 종족이 자신들의 믿음에 따라 이 놀라운 건축물을 세운 것만은 확실하다.

 

이 고대 기념물의 본 모습에 대한 진실은 인류의 오랜 수수께기였다.

수세기 동안 이들의 모든 흔적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850년 겨울, 거대한 폭풍이 오크니 해안을 강타하자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가 스카라브레 지역에 위치한 해변 언덕의 이끼를 벗겨 그 속살을 드러냈다.

결국 폭풍이 지나간 후 이 지역 주민들이 모래에서 솟아난 마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신석기, 혹은 석기 시대로 추정되는 이교도 취락의 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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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에리카 구트만에게는 이곳이 단순한 유적이 아닌 사라진 문명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이건 정말 놀라운 유적이예요.

고고학자들은 과거의 편린만을 붙잡고 연구하기 때문에

유적의 희미한 자취를 놓고 씨름하게 마련인데

여긴 마을 전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요.

단순히 건물 하나가 아니라

신석기 마을 전체를 찾은 것이죠."

- 에리카 구트만 박사, 고고학자

 

조사 결과 이 유적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훨씬 앞선 5천 년 전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대부분의 신석기 취락은 목재로 만들어져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오크니 제도에는 거의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집들은 필요에 따라 석재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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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밟고 있는 건 오크니 판석인데, 일종의 퇴적암입니다.

바닷속에서 얇은 층이 쌓여서 형성된 지층인 것이죠.

 

이 암석은 깨서 건축 자재로 쓰기 용이하기 때문에

섬 주변에 풍부한 자재가 널린 셈이 되죠.

결국 귀한 나무 대신 이 돌을 사용한 건 당연합니다."

 

이 취락은 열 개의 원형 가옥으로 구성되었으며

해변가의 천연돌로 세운 벽은 회반죽 없이 접합됐다.

 

"회반죽 없이 벽을 세운 공법은 꽤 효과적이었습니다.

5천 년 동안 가옥이 건재했으니 그 견고함도 쉽게 증명됩니다.

현대 가옥의 수명을 능가하는 수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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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라브레의 기본 설계 방식은 모두 동일하다.

 

가옥의 중심부는 하나 같이 난로나 화덕이었다.

그리고 벽 안쪽에 설계된 공간은 찬장라고 추측되고 있으며

양쪽의 측벽은 당시 가옥의 침대라 생각된다.

 

고고학자들도 이 가옥의 거주 인원수에 대해선 확신을 못하는 상황이지만

현대 시각에서 볼 때 이 작고 비좁은 가옥에서

식구가 많은 대가족이 한 데 어울려 생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마을이 밀집한 공동 사회라는 증거로

가옥 역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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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가옥은 돌로 덮힌 좁고 낮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집밖으로 발을 디디지 않고도 이웃을 방문할 수 있었다.

 

사학자 로널드 허든

이렇게 가옥을 설계한 이유를 조사하기 위해 몸을 숙인 채 마을로 들어섰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신석기 가옥에선 이런 길고 좁은 통로를 건축했습니다.

 

우선 손님에게는 남의 집을 방문한다는 생각을 일깨워 주고

반대로 적이 접근할 경우 머리를 들이밀고서 기어가기가 꺼려지게 되죠.

통로 끝에서 집주인이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있을 테니까요."

- 로널드 허든 교수, 사학자

 

이 취락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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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조사에선 땅을 파서 가옥을 건축한 것으로 추측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실제론 취락 전체가 조개무지라 불리는 오물더미를 파낸 공간에 건축된 것이다.

 

"조개무지는 한 마디로 선사시대의 쓰레기

여기엔 화덕의 쓰레기와 재, 숯을 비롯해 부엌의 오물까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쓰레기를 분리했다는 겁니다.

사람이나 가축의 배설물 같은 오물은 마을 끝에 모으고

마을의 중심부엔 비교적 깨끗한 쓰레기만 버렸죠."

- 에리카 구트만 박사, 고고학자

 

이런 철저한 재활용 방식은 실생활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오물을 활용해 가옥을 지은 이유는 뛰어난 단열 효과와 더불어

이를 점토와 섞어 사용함으로써 구조적으로 강도를 높일 수 있었죠.

 

놀랄 만큼 잘 보존된 이 가옥 유적을 통해 옛날 오크니 이교도 종족의 건축 방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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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가옥의 벽은 위쪽을 향해 좁아지는 형태로 설계되었죠.

따라서 지붕을 돔 형태로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목재나 고래수염으로 지붕을 떠받친 후

그 위에 잔디 지붕을 덮었을 가능성이 크죠."

- 에리카 구트만 박사, 고고학자

 

이로써 이 신비한 이교도 종족이 5천 년 전 가옥의 형태를 복원하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동일한 기본 구조로 설비된 가옥엔

일반적인 현대 뉴욕 아파트의 절반 크기인 약 37제곱미터의 방이 건축되었다.

출입구를 들어서면

맞은편에 돌찬장과 그 옆으로 돌침대가 보이며

중앙엔 커다란 난로가 자리 잡고 있다.

또 안쪽으로 뻗은 벽은 잔디로 덮인 지붕 들보와 맞닿아 있다.

쓰레기더미 속에 은밀한 통로로 연결된 취락은

밖에서 보면 낮은 언덕의 형태를 띄며

잔디로 뒤덮인 지붕 외엔 침입할 틈이 없다.

2. 고대인의 만남의 장, 브로드가의 거석유구!~

삶과 죽음의 매개, 사우스 로날드세이 '독수리의 무덤'!~

 

이 집들에 살았던 이교도 종족은 가장 웅장하고 미스테리한 선사 시대의 유적인

브로드가 거석유구를 건축하는데도 한몫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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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라브레 남쪽 11킬로미터에 세워진 이 거석유구는

'헨지'라고 불리는 특별한 환상 열석으로 분리되며

 

원형으로 세워진 거석을

수로와 흙담이 감싸는 형태로써

세계에서 가장 큰 헨지 유적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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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 이렇게 넓은 공간은 많은 사람이 행사를 치르던 곳 같습니다.

따라서 1년 중 특정 시기에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을 겁니다.

일종의 계절 축제인 셈이죠.

 

이를 통해 사상을 교환하고 종교의식을 행하며 물물 교환도 했을 겁니다.

또 청춘남녀들은 배우자를 찾는 기회로 활용했을 거고요.

결국 삶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거대한 만남의 장이었던 셈이죠."

- 로널드 허든 교수

 

하지만 이 고대인들이 현대적인 도구나 기중기 없이

이 거대한 브로드가 거석 유구를 건설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유적을 둘러싼 수로를 파는 데만도

무려 만천 톤의 암석을 채굴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올림픽 수영경기장 두 개를 채우기에 충분한 양이다.

이와 같은 대역사를 이룩하는 데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이 오랜 세월 땀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미스테리한 사실은 이 환상 열석을 세운 이유와 그것이 상징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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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상 열석에는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죠.

5천 년 전, 영국 제도 사람들은 원형 모양에 심취했으니까요.

지평선을 보고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큽니다.

지평선도 원형 형태니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주변 대지를 반영하며 지평선과 조화를 이루고 있죠."

- 로널드 허든 교수

 

브로드가 거석 유구는 오크니를 상징하는 기념물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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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의 돌은 섬 전역에서 채굴한 것이며

당시 각 공동체마다 자신의 마을을 상징하는 돌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돌은 27개 뿐이지만

전문가들은 한때 깊은 수로 내부에 이와 같은 돌이 60개 정도 세워졌을 거라고 추측하며

수로 너머론 3미터 높이의 흙담이 전체 지역을 둘러싸고 있었을 것이다.

 

브로드가 거석유구는 이 섬이 그들 후손의 땅임을 강력한 메세지로 세대를 걸쳐 전달해온 셈이다.

 

또한 오크니 이교도 부족이 망자와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증거도 드러났다.

이들이 만든 무덤은 바로 잊혀진 지하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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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스코틀랜드의 오크니 제도 사우스 로날드세이에 거주하는 한 농부가

절벽 주변의 한 언덕을 파는 도중 어두운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를 발굴했다.

당시 그 방에서 농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30개의 인간 두개골이었다.

본격적인 무덤 발굴이 시작되면서 두개골의 수는 무려 342개로 급증했지만

완벽한 뼈대를 갖춘 유골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가가 고분 주변에 인간의 유골을 뿌려놓은 것이다.

그 정체를 밝히기 위해 로널드 허든이 매장실로 들어섰다.

 

"이 고분에 들어가기란 힘들고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설계된 곳이니까요.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기어서 여길 통과해야만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죠."

- 로널드 허든 교수, 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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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무덤 유적 안으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넓은 석실과 연결된 좁은방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 밑으로 작은 곁방이 연결되어 있다.

층층이 쌓인 뼈와 줄줄이 나열된 해골들은 이곳에서 발견됐다.

 

로널드는 이것을 이교도 종족이 자주 무덤에 들러 조상의 유골을 돌봤다는 증거로 믿고 있다

 

"여의치 않을 경우 어둠 속에서 망자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죠.

줄줄이 늘어선 유골에서 나오는 소름 끼치는 빛이 전부였을 겁니다.

망자와 육체적으로도 아주 친밀하게 접촉을 했는데요

말 그대로 유골을 코에 비빌 정도였죠."

 

하지만 왜 섬 주민들은 망자들과 이처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을까?

 

그 이유는 대부분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유골을 조사해본 결과 25세를 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부족 구성원은 대부분 어린이와 젊은이들이었죠.

따라서 구전이나 소문 및 과거의 이야기에 절박하게 의지했으며 이를 통해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 무덤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삶의 경험은 아주 짧았으니까요.

따라서 죽은 자의 힘이 더 강력했다는 의미죠."

 

완벽한 뼈를 갖춘 유골이 드물다는 건

무덤으로 옮기기전 따로 뼈를 따로 나누고 살을 발라내고 작업을 거쳤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매장 의식은 사람의 뼈와 더불어 발견된 물수리의 해골과 발톱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물수리가 이교도 종족의 장례 의식에 필수적인 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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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미루어 볼 때 시신을 밖에 내놓으면

거대한 물수리들이 이를 쪼아먹었을 겁니다.

결국 뼈만 남게 된 시신이 무덤으로 옮겨진 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매장 의식에 사용될 유골을 관리했는데

독수리는 전체 공동체의 상징이었을 수도 있어요.

이 섬 사람들은 독수리 부족이었던 셈이죠."

- 로널드 허든 교수, 사학자

 

오늘날 이 매장지는 '독수리의 무덤'이라 불리지만

당시 이곳은 무덤이기도 하지만 신전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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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유적 연구에선 늘 고분이란 명칭 문제가 대두됩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당시엔 이곳이 신성한 사원이었으니까요.

망자 자체가 매개체였던 셈인데

유골은 신에게로 통하는 일종의 휴대전화 구실을 했습니다.

당시엔 망자를 통해서만 또 다른 세계와 통할 수 있었죠."

 

이제 이교도 종족이 망자와 소통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던 독수리의 무덤을 복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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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은 벽 내부에 세워진 판석을 통해 세 구역으로 나뉘며, 양쪽 끝으로 방이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서쪽 끝방엔 수십 개의 해골이 쌓여 있으며

벽을 따라 더 많은 유골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고분엔 인간의 해골 사이로 물수리의 뼈도 남아 있다.

이 무덤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길게 늘어선 좁은 입구 하나뿐이다.

 

"다시 산 자의 세상으로 나오니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3. 동지와 하지, 계절의 주기를 반영한 매셔위의 고분!~

 

 

하지만 '독수리의 무덤'이 오크니 제도에서 보는 유일한 매장지는 아니다.

이곳으로부터 북쪽 30킬로 근방엔

이교도 종족의 종교 의식과 매장에 대해 더 많은 비밀을 간직한 매쇼위의 웅장한 유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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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에리카 구트만이 이곳 조사에 나섰다.

 

"정말 놀라운 유적입니다.

처음 들어와서 가장 감탄한 점 중 하나는 놀라울 정도로 발달된 고대의 석공술입니다.

스카라브레 유적의 경우는 해변에서 그대로 떼어 낸 볼품없는 판석이 전부였고

심지어 해변의 둥근 자갈도 있었죠.

하지만 이곳은 모두 조각된 거예요.

실제로 돌을 조각한 장인의 흔적을 볼 수 있죠."

- 에리카 구트만 박사, 고고학자

 

오크니 제도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 유적인 매셔위는

5천 년 전 오크니의 거대한 판석으로 지어진 것이며

그 중엔 무려 30톤이나 나가는 돌도 있다.

 

벽 가운데 있는 작은 곁방들은 1.4제곱미터의 넓이로

무덤의 좌우측과 뒷쪽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바닥 설계는 스카라브레와 유사하다.

 

"스카라브레의 가옥과 형태나 크기 면에서 유사합니다.

그뿐 아니라 일단 고분 내부로 들어서면

그 중앙 부분에 가옥의 찬장과 같은 공간이 설계되어 있죠.

또한 양쪽에 방이 있는 위치도 스카라브레 가옥의 침대가 위치한 곳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빠진 게 있는데 바로 중앙의 난로죠."

 

매셔위의 무덤과 스카라브레의 유사점은

오크니 제도 이교도들이

이승과 저승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음을 보다 잘 나타내는 증거다.

 

이교도 신앙의 또 다른 핵심은 계절의 주기였다.

 

이교도는 곧 시골 거주민을 의미하는데

이들이 대지에 의지했다는 것은 이들이 사는 자연 세계에 아주 해박했다는 의미였다.

 

이들은 계절의 전환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매년 낮의 길이가 가장 짧아지거나 길어지는

하지와 동지에 큰 의미를 부여했으며

이와 함께 일 년에 두 번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에도 비슷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관한 증거는 이와 같은 중요한 계절적 변화를 표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매셔위의 무덤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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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해당하는 동짓날이 오면

햇빛이 이 통로를 통과해 고분의 뒤편을 밝혔습니다.

신석기 기술자들이 고분을 이렇게 설계한 건

동짓날의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것이죠.

이는 이교도 부족들이 동지나 하지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 에리카 구트만 박사, 고고학자

 

이교도 종족에게 한겨울은 죽음의 시간이었다.

이 계절은 농작물을 키울 수 없는 황폐한 시기였다.

하지만 동지는 겨울의 마침표를 찍는 시기였다.

이교도 종족들은 무덤 내부에 햇빛이 들어오게 함으로써

확실하게 봄이 돌아오길 바라면서 조상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하지만 한겨울에 햇빛을 무덤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당시 매셔위의 건축가들은 무덤 통로의 위치를 정확하게 배치해야 했다.

방 구석에 세워진 네 개의 기둥에 그 단서가 숨겨져 있다.

 

무덤을 지탱하는 구조물과 하등 관계가 없는 이 수수께끼의 기둥은

선돌 유적과 비슷한 형태를 통해 그 목적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지역 고고학자인 마틴 캐러더스

이 네 개의 돌기둥이 한때 무덤 밖에 서 있던 환상 열석 유적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과거 이곳에는 일련의 거석 유적이 존재했던 곳으로 보이며

고분 건축 이전에는 환상 열석 형태였을 겁니다.

 

따라서 석실 내부의 돌기둥은 원래 환상 열석의 일부였다가

나중에 고분으로 건축되었을 가능성도 있죠."

- 마틴 캐러더스, 고고학자

 

고고학자들은 매셔위의 고분 주변에서

한때는 선돌 유적이 서 있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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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증거로 볼 때 현재 무덤 내부에 있는 네 개의 돌기둥은

한때 환상 열석의 중앙에 자리 잡은 선돌로써

동지에 햇빛이 비추었던 기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무덤은 네 개의 기둥 주위로 세워졌는데

그 입구는 석양의 마지막 햇빛이 비추는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의 흐름 속에 환상 열석은 사라지고

고분 자체만 남은 상황이다.

 

망자와의 교감은 이교도들에게 삶의 중요한 일부였음이 분명한데

이런 세심한 매장 의식은 모든 이교도 기념물 중에서도

바로 가장 신비로운 유적, 스톤헨지 이론에 새롭고 충격적인 바탕이 된다.

 

 

4.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우드헨지와 스톤헨지!~

잉글랜드 남부의 스톤헨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교도 유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 실제 목적은 학자들과 관람객들에게 오랜 수수께끼로 존재해왔다.

 

지금부터 여러 학자들이 스톤헨지의 과거 모습을 복원하는 동시에

그 존재 목적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조사해 나갈 것이다.

 

이들은 또한 스톤헨지가 사후 세계의 관문이 되었던

지금은 잊혀진 거대한 고대 의식 행사의 일부로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여부도 밝혀내고자 한다.

 

고고학자 에리카 구트만이 이곳에서 발견한 첫 번째 단서는

거석이 자리 잡기 오래전인 5천 년 전부터

스톤헨지 지역에서 장례 의식이 거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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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에 도착하면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저 거대한 일련의 돌기둥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종교의식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낮은 둑과 수로입니다.

이는 수로 끝에서 발견된 중요한 유물을 통해 입증되었는데요.

여기엔 가축의 해골이나 항아리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죠."

 

많은 고고학자들은

수로에서 발견된 이러한 많은 양의 해골들을

이교도들이 죽음과 관련해 사용했다고 믿고 있는데

 

스톤헨지의 발굴 조사를 통해

거석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화장 의식의 장소로 활용된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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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처음 세워진 청석은

32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웨일스 프레셀리 언덕에서 공수해온 것이었는데

 

고고학자 마이클 피츠는

이곳이 이교도 부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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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은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이죠.

그리 커 보이지는 않지만 시기와 기술 면에서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유적으로써

아주 먼 곳에서 의식 장소까지 수송을 해 온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거석의 원산지에 관한 것인데

이 종교 의식 장소에 신비로운 힘을 행사했다고 보여집니다.

 

일단 이 돌의 원산지인 웨일스 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석양이 지는 방향과 일치합니다.

 

이 방향 자체가 망자 및 조상에 관한 상징적인 의미를 띄는데

조상들이 사는 곳이 곧 해가 지는 곳이라는 뜻이죠."

- 마이클 피츠, 고고학자

 

웨일스에서 청석을 들여온 것은

스톤헨지와 사후 세계와의 연결을 상징적으로 시사했다.

그러나 청석이 들어온 지 200년이 지나자

이곳에선 특별한 조짐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스톤헨지에 거대한 규모의 재건 공사가 시작되면서

청석은 재배열되고 그 주위로 싹슨석이라 불리는 거대한 돌로 원형 석조물을 만들었다.

그동안 몇 킬로미터 근방에선 동일한 목적에 따라 우드헨지가 나무로 지어지고 있었다.

이제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두 개의 헨지가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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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우드헨지는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과거 168개의 나무가 서 있던 정확한 위치엔 튼튼한 콘크리트 기둥이 새로 세워졌다.

 

"100개가 넘는 거대한 떡갈나무 그루터기가 있었을 땐

아마 인공 숲 같은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나무 기둥 자체가 중요한데

껍질을 벗기거나 조각한 것도 있었고 색칠을 하거나 장식을 달기도 했죠.

기둥에 매달린 것도 있었을 겁니다."

-마이크 피츠, 고고학자

 

고고학자들이 현장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젠 고대 이교도 종족이 무려 4천 년 전에 세웠던 우드헨지의 본 모습을 복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우드헨지의 기둥 배열이나 원의 크기는 스톤헨지의 경우와 유사한 점이 많으며

주변이 수로와 둑에 둘러싸인 점도 동일하다.

 

하지만 우드헨지에 관한 중요한 단서는

일출과 일치하도록 배열된 그 입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우드헨지에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가축의 해골과 거석과의 연관성을 볼 때

아마 목재 기둥은 삶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나무와 돌은 각각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죠."

-마이크 피츠, 고고학자

 

이교도 부족에게 나무는 살로 덮인 육신처럼 따뜻하고 살아있었으며

돌은 오래전에 죽은 유골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결국 우드헨지와 스톤헨지는 각각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듯 하다.

 

의식적인 면에서 우드헨지와 스톤헨지는 연결되어 있었는데

사학자 로널드 허든은 이곳이 한때 일련의 장례 절차에 사용되었을 거라 믿고 있다.

 

이교도들은 우드헨지에서 일출을 시작한 후

근처의 에이번 강 유역을 따라 스톤헨지로 향했을 것이다.

 

"여기 에이번 강과 같은 

신석기 기념물의 핵심적인 요소였죠.

 

물은 어디서나 존재하는 물질이니까요.

또한 특이한 성질을 지닌 물질이기도 했죠.

 

사람을 이어 주기도 하고 떼어 놓기도 하며

삶과 죽음을 동시에 선사하며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니까요.

아마 삶과 죽음에 관한 이런 본질이 고대 기념물의 핵심적인 의미였을 겁니다."

- 로널드 허든 교수, 사학자

 

이교도들의 의식 행렬은

에이번 강을 따라 스톤헨지까지 뻗어 있는 의식 행사용 대로까지 이어졌다.

 

현재 이 대로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로널드는 한때 이 길을 따라 선돌이 서 있었을 거라 추측하고 있다.

 

"과거 스톤헨지로 이어졌던 대로의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죠.

오래전에 그 흔적이 사라졌으니까요.

하지만 에이브버리와 멀지 않은 이런 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 그 모습과 관계없이 종교적인 기능만 놓고 생각하면

이 대로는 일종의 종교적인 관문으로서

인간이 실제로 삶을 영위하는 세속적인 세상과

초자연적인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 로널드 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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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로는 목적지에 도착하기전에 서쪽으로 급격하게 꺽이는데

석양이 지는 스톤헨지쪽으로 의식 행렬을 인도한다.

 

일출 무렵 우드헨지에서 시작한 장례 의식은

석양 무렵 스톤헨지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듯 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영국의 이교도들은 조상의 세계로 새롭게 들어서는 망자를 축하해 주었을 것이다.

스톤헨지 건설은 천 년이 넘게 이어졌지만 이곳의 환상 열석은 겨우 몇 년만에 짧은 세월에 세워졌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거석이 쓰러지거나 제거되었지만

이젠 몇 천 년 전 이교도들이 장례 의식에 사용했을 거 같은 스톤헨지의 본 모습을 복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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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의 중앙엔 두 개의 거석 위에

상임방 돌을 앉은 삼석탑 다섯 개가 편자 모양으로 서 있고

그 주위를 19개의 작은 청색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 뒤로는 유명한 싹슨석 석조물이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는데

위로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삼임방 돌이 올려져 있었다.

5. 거대한 인공 언덕 '실버리 힐'은 신호대?

에이브버리 환상 열석과

웨스트 케네트 롱 배로우 신전의 관계!~

 

당시 스톤헨지와 우드헨지는 이 지역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톤헨지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근방엔 오래 동안 모든 생명을 거부한 또 다른 기념물이 서 있다.

고고학자들의 추산으로 인부들이 1,800만 시간을 소요하며 만든 거대한 인공 언덕, 바로 실버리 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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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장 큰 인공 언덕인 실버리 힐.

영국의 이교도들이 거의 4,500년 전 만든 이 언덕은 높이가 36미터를 넘는데

이집트 일부 피라미드보다 더 높고 역사도 깊다.

 

하지만 정말 피라미드처럼 이 언덕도 신비한 비밀을 담고 있을까?

 

"고대의 거대한 흙무더기 하면 떠오르는 것이 매장된 보물이라

실버리 힐에서도 수백 년 동안 보물찾기가 이어졌죠.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수의 굴을 파고도 보물은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로널드 허든 교수, 사학자

 

수백 년간 유적을 팠지만 매장된 유물이나 보물은 발견된 적이 없었고

결국 백악질 토양 위에 세워진 튼튼한 언덕에 불과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실버리 힐의 존재 이유는 수수께끼지만 그 건축 공법에 대한 실마리는 조사가 가능하다.

 

"신석기 시대 기준으로 봤을 땐 고도의 기술적 위업입니다.

금속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뿔로 만든 곡괭이로 땅을 파고

소의 어깨뼈로 만든 삽을 사용해야 했죠."

- 에리카 구트만 박사, 고고학자

 

고고학자들의 추산으론 700명의 인부가 10년간 땀을 흘려 공사에 전념해야

25만입방미터에 달하는 백악질 토양의 언덕을 조성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이 공사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눠졌을 것이다.

 

"첫 번째 완공 시점에선 높이가 5미터에 불과했지만

두 번째 보강 공사를 통해 높이를 36미터까지 끌어올렸으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인 셈이죠.

게다가 사면의 경사도 심해서 주변의 낮고 둥근 언덕에 비해 뾰족한 형태가 크게 도드라집니다."

- 에리카 구트만 박사

 

하지만 언덕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흙과 잡석만 쌓아 올려서는 이런 언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경사면을 따라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런 원뿔 형태를 유지하는 데는 세심한 기술이 필요하죠."

- 에리카 구트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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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리 힐이 완벽한 원형은 아닐 수 있어도

9개 면으로 이루어진 다각형 면으로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백악질의 외벽은 최적의 안정성을 고려해

내부로 60도를 이루며 기우려졌고

이는 다시 언덕 중앙으로부터 뻗은 방사형 벽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의 공간은 백악질의 잡석으로 채워졌다.

언덕이 일련의 단구조로 건축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로는 이와는 별개의 공법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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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나선형 구조일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이 흙무더기가 나선형 구조라는 고고학적 증거도 나온 상태이며

여길 오르다 보니 그 방법이 가장 쉬운 공법이란 생각도 들어요.

확실히 계단 보다는 경사로를 통해 건축 자재를 옮기기가 더 쉬우니까요."

- 에리카 구트만 박사

 

나선형 구조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구현할 수 있었다.

 

"당시엔 나선형을 예술적인 상징으로 믿었으므로

언덕의 정상까지 길을 따라가면 나선형으로 걷는 셈이 되는 거였죠."

- 로널드 허든 교수

 

나선형 길은 언덕을 세우기에 보다 용이했으며

동시에 종교 행렬에게도 더 적합한 형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교도 종족이 이렇게 높은 언덕을 세운 까닭은

실버리 힐과 주변 풍경의 연관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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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변에는 세계 최대의 에이브버리 환상 열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실버리 힐은 웨스트 케네트 롱 배로우의 신전이라는

이교도들의 핵심 유적 두 곳과도 인접해 있다.

 

현재 사학자 로널드 허든은

실버리 힐이 각각 다른 곳에 위치한 유적들에서

동시에 의식을 치루기 위한 신호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조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 이론에 대한 조사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이다.

 

"이 이론이 맞는다면

에이브버리의 모든 주요 지점에서

실버리 힐의 정상이 보여야 합니다."

- 로널드 허든 교수

 

고고학자 에리카 구트만은 이 이론을 실험하기 위해

웨스트 케네트 롱 배로우로 향했다.

 

한때 50여 명의 유골이 발견된 이곳은

영국 제도에서 가장 잘 보존된 고분인 동시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유적은 미식 축구장과 같은 길이이며 혹은 그 절반이다.

 

"이곳은 웨스트 케네트 롱 배로우입니다.

로널드가 보이는지 살펴보죠.

바로 저기서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게 보입니다."

- 에리카 구트만

 

다음 목적지는 한때 나무 기둥으로 뒤덮혔던 신전으로

종교적인 유적치고는 이외 별 다른 건축물을 찾아보기 힘들며

새로 벌목한 나무를 의식에 따라 새로 심은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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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바로 신전인데

방금 하늘에 비친 로널드의 윤곽을 확인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실버리 힐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로널드가 언덕 배경에 가렸을 거란 사실이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그 모습이 확실히 보입니다."

- 에리카 구트만

 

마지막 목적지는 세계 최대의 환상 열석이 자리 잡은 에이브버리로

거대한 평원을 이룬 98개의 거석이 두 개의 작은 원을 감싸고 있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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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대로라면 실버리 힐의 깃발이 보여야 하지만

열석 내부에선 깃발이 가려진 상태다.

에리카가 높은 열석의 외부 둑에 올라서야만 깃발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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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둑의 정상에선 로널드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입니다.

실제로는 하늘에 비친 윤곽이 보이는 것인데

보시다시피 실버리 언덕은 지평선 위로 솟아 있습니다.

이곳 주변의 언덕보다 고도가 높은 거죠.

로널드의 이론대로 신호대였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 에리카 구트만

 

실버리 힐이 세 곳의 다른 유적에서 보인다는 사실은

매년 특정 시기에 맞춰 동시에 진행된 일련의 의식의 중심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에이브버리와 웨스트 케네트 신전에서는

실버리 힐의 진행 상황을 보고 의식을 시작했을 것이다.

의식의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로널드 허든은 자신의 이론에 힘을 실어줄 또 다른 증거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제게 떠오른 또 다른 생각은

백악 재질의 실버리 힐을 그대로 활용했다는 겁니다.

 

햇빛이나 달빛 아래서 언덕이 빛나게 되면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였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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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론이 맞다면 고대 실버리 힐의 모습은 지금처럼 온통 잔디로 뒤덮힌 상태가 아니라

나선형 길이 난 하얀 백악으로 빛나는 인공 언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언덕 위에 서면 수 킬로미터 밖이 보였을 것이다.

 

아주 웅장한 언덕인 실버리 힐은 영국 이교도의 최대 유적으로 살아 남았지만

당시 이교도들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잉글랜드 남부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웅장한 유적인 메이든 성은

수세기 후 로마 침략군에 함락 당한 채

고대 영국 제도에 존재했던 이교도 세계의 종말을 지켜보게 된다.

 

 

6. 영국 이교도들의 최고 요새 메이든 성과 그들의 최후,

고대 최강 부대 로마군의 침략과 승리!~

 

잉글랜드 남부의 메이든 성은 유럽에서 가장 큰 언덕 요새로써

맨해튼의 열 개 블럭에 상당하는 넓이를 자랑한다.

이 거대한 이교도 요새는 난공불락처럼 보였지만

결국 고대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는 로마군에겐 결코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오늘날엔 무너져 내린 흙벽만이 남은 상태다.

 

하지만 메이든 성은 소렌지 시절부터 로마군에 함락되던 철기 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던 이교도 종족들간의 전리품이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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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토목 공사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깊은 수로로 이어지는 웅장한 성벽을 비롯해

이쪽의 거대한 성벽까지 건축했으니까요.

 

수로에서부터 따지면 성의 높이가 무려 22미터에 달하므로

엄청난 대역사를 통해 완공했다는 뜻이 됩니다.

덕분에 이 사면으로 진격하는 일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적의 입장에서는 말이죠."

- 에리카 구트만

 

일반적으로 성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그 입구지만

메이든 성은 적 공격에 대비한 놀라운 방어 시설을 구비했다.

 

"저곳이 언덕 요새의 서쪽 입구인데

복잡하게 얽힌 언덕이 즐비한 형태입니다.

 

성으로 접근하는 적의 입장에선 더욱 혼란스럽기 그지없겠죠.

결국 복잡한 미로와 같은 지형 속으로 적을 이끌어

공격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였습니다."

- 에리카 구트만

 

이제는 메이든 성의 방어 시설을 다시 복원해 볼 수 있고

왜 이곳이 영국 이교도 문명의 최고 요새라 여겨지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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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동심원을 이룬 세 개의 둑이 메이든 성을 감싸고 있다.

또 백악과 흙으로 세운 마지막 둑 위엔 목재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울타리 꼭대기를 따라 만들어진 통로는

군사들이 적을 감시하고 언덕 요새의 주요 방어 수단인 투석기를 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입구 양쪽에 세워진 두 개의 감시탑

성문으로 공격하려는 적에 맞서 방어 능력을 강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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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3년, 로마군이 침범할 당시 메이든 성의 주인은

잉그랜드 남서부의 대부분을 장악했던 주민은 듀로트로계스 부족이었다.

 

광부와 철공업자의 이 부족 연합 세력은

자체적으로 동전을 발행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과시했지만

이에 맞서는 로마군은 고도로 훈련된 당대 최강의 부대로써

기술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발리스타라는 석궁을 사용했는데

인근에 있는 도르세 카운티 박물관엔 이 무기의 위력을 보여주는

이교도 전사 두 명의 유골이 전시되어 있다.

 

"철기 시대 전사들이 묻힌 수많은 무덤 속에서

머리에 심한 칼자국이 있는 10개의 유골이 발견됐는데

그중에는 척추에 발리스타의 화살이 박힌 유골도 있었죠."

- 에리카 구트만

 

하지만 화살이 메이든 성의 군사들에게까지 다다르려면 세 개의 거대한 성벽을 넘어야 했다.

발리스타의 사정거리를 조사하기 위해 사학자 로널드 허든은 복제품으로 실험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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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군단이 보유한 발리스타가 몇 개나 됐을까요?"

- 로널드 허든

"각 군단마다 60기의 발리스타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이런 발리스타 60기가 언덕 요새를 공격한 셈이죠."

- 데이비드 리차드슨(로마사 협회)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기 전까지

발리스타는 당시로선 가장 복잡한 무기로 평가됐다.

기본 구조는 발리스타의 활 시위를

한 쌍의 윈치로 잡아 당긴 후 민을 톱니바퀴로 고정시키는 방식인데

이로써 사람의 힘보다 수 배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화살을 걸고 발사했다.

 

발리스타의 화살 속도는 시속 177킬로미터가 넘었으며

사정거리는 400미터에 달했다.

 

"눈이 못 쫓아갈 만큼 화살 속도가 빠르군요."

- 로널드 허든

 

로마 침공군은 이 발리스타를 이용해

이교도 수비병들의 투석기가 미치지 못하는 거리에서

메이든 성으로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투석기의 사정거리는 눈에 보일 정도로 뻔하지만

로마군의 발리스타는 투석기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공격이 가능했죠.

따라서 높이와 거리를 자랑하던 이 성벽도

로마군의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 에리카 구트만

 

심지어 울타리 감시탑 꼭대기에서도 로마군의 진지가 어슴푸레 보일 정도였는데

사정거리가 겨우 180미터에 불과했던 투석기는

발리스타의 사정거리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쳤다.

 

로마군의 발리스타는 성벽과 목재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넘은 후

메이든 성의 심장부까지 화살을 쏟아부었고

이교도 수비병들은 난데없는 화살 공격에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서기 1세기 중반에 이르자

남아 있던 50여 개의 언덕 요새마저 로마 침공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영국 이교도 문명은 완전히 막을 내리고

모든 로마 제국에서 의해 유입된 사람들과 사상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하지만 로마군의 침공 이전부터 이교도 스스로가 변화하면서

상당수의 기념물과 거주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혀진 기억에 불과했다.

 

스카라브레 석기 시대 취락

브로드가 거석유구 및 독수리의 무덤은 이미 수세대에 거쳐 버려진 지 오래였다.

 

매셔위의 유적과 우드헨즈에서 여름과 겨울의 분기점을 측정하던 건축 기술은

종교의 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고대 최고 유적 스톤헨지마저도 여행객들의 호기심 거리로 전락했으며

중세 이래로 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복잡한 수수께끼로써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동안 수수께끼의 실버리 힐과 웅장한 요새인 메이든 성

로마군이 자신들의 신전과 거주지로 개조해 사용했다.

 

이교도 문명의 유적이 서서히 폐허로 변해가고

여기에 사용된 지식과 상징성마저 사라졌지만

수세기가 흐른 오늘날 우리는 이 사라진 문명을 다시 발견하고 있다.

 

 

- 사라진 문명, 고대문명과 위대한 건축물을 보고

(늘 건강에 유의하세요!~~)

 

 

 

 

 

 

 

 

 

 

 

 

 

 

 

 

 

 

 

 

 

 

 

 

 

 

 

 

 

 

 

 

 

 

 

 

 

 

 

 

 

 

 

 

 

 

 

 

 

 

 

 

 

 

 

 

 

 

 

 

 

 

 

 

 

 

 

 

 

 

 

 

 

 

 

 

 

 

 

 

 

 

 

 

 

 

 

 

 

 

 

 

출처 : 권민서의 역사앞에서 | 글쓴이 : 민서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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