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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야마타이(邪馬台)국의 여왕 비미호(卑彌呼)의 선조는 가야

송화강 2019-05-28 (화) 20:17 6년전 13230  

야마타이(邪馬台)국의 여왕 비미호(卑彌呼)의 선조는 가야

 

 


<야마타이(邪馬台)국의 여왕 비미호(卑彌呼)의 선조는 가야>


반고가 쓴 한서지리지에 왜(倭)라는 나라 이름이 등장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 시기 왜국은 100여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한(漢)의 낙랑군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서기 57년) 왜(倭) 노국왕(奴國王)의 사신이 후한의 낙양을 방문, 광무제에게서 인수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서지리지에 왜국은 100여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나라 명칭은 없다. 후한서에 보면 광무제 집권기인 (서기 57년) 이들 100개국중 노국(奴國)의 사신이 낙양을 방문했다고 한다. 노국(奴國)은 삼국지에 따르면 여왕국(女王國)에 통속된 노국(奴國)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원전부터 왜국의 나라들은 한(漢)나라와 사역(使譯)이 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측 기록은 왜국의 명칭 조차도 없거니와 사신이 통하였다면 그 나라들의 풍속과 적어도 왕들의 이름만이라도 수록하는 것이 합당한 사관의 임무임에도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왜국과 중화족들의 만남은 삼국지의 기록에 따라야 할 것이다.


<삼국지 왜전>

(대방)군(郡)으로부터 왜(倭)에 도착하기까지는, 해안(海岸)을 따라 물길로 가서(水行) 한국(韓國)을 거치고 남쪽으로 갔다가 또 동쪽으로 가서 그 북안(北岸)인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기까지 7천여 리이고, 비로소 바다 하나를 건너며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삼국지에 따르면 왜국으로 가는 여정이 상세히 나왔는데, 한반도 남해안 어느 지역인지 몰라도 구야한국(狗邪韓國)에서 바다를 건너면 대마국에 도착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야한국은 삼국지 변한전에 나오는 구야국(狗邪國)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마국은 열도의 왜국과 반도의 한국(韓國)을 연결하는 중간 기착지인 셈이다.

삼국지 왜전에 왜국으로 가는 출발지를 대방군으로 보고 있다. 진수가 말하는 대방군이라함은 후한의 헌제 (서기 196년-220년) 사이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지를 나누어 설치한 대방군을 말한다. 왜국으로 가는 출발지를 왜 대방군으로 수록한 것인지, 그 이유는 삼국지 마한전에 있다.


<삼국지 마한전>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146년-189년), 한(韓),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능히 통제하지 못하자 백성들(民)이 다수 한국(韓國)으로 유입(流入)하였다. 건안(建安 196-220년)중,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지(荒地)를 갈라 대방군(帶方郡)을 세우고는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보내 유민(遺民)들을 수집(收集)하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 예(濊)를 치니 구민(舊民)들이 점차 나왔고 이후로 왜(倭), 한(韓)이 마침내 대방(帶方)에 복속하였다


공손강 이전에는 한(韓), 예(濊)가 강성하여 한나라 군현들이 통제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에 왜국과 통교를 하지 못했다는 말과도 같다. 왜국이 중화족과 통교를 시작한 것은 빨라도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한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한 이후에 통교한 왜국이 독자적으로 그 머나먼 대방군까지 사신을 보낼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추론해 보고자 한다.


<삼국지>

(위나라 명제) 경초(景初) 2년(238년) 6월, 왜여왕(倭女王)이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 등을 (대방)군(郡)으로 보내 천자에게로 와서 조헌(朝獻)하기를 청하니 (대방)태수 유하(劉夏)가 사자를 보내 그들을 데리고 경도(京都)까지 호송하게 했다. 그해 12월, 조서를 내려 왜여왕에게 답했다.

위(魏)나라 명제 집권기인 (서기 238년) 왜여왕의 사신이 대방군에 도착하자, 대방태수 유하가 사신을 인도하여 도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때 왜여왕이 비미호(卑彌呼)라고 하였다. 그러나 왜여왕 사신이 대방군에 도착한 시점이 (서기 238년) 6월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238년)에는 공손연이 바야흐로 위나라와 맞서던 때라 위나라의 대방태수는 아직 없고 왜여왕의 사자 또한 통할 수 없다. (서기 237년) 관구검의 1차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서기 238년) 정월에 공손연 토벌의 조서가 내려지고 사마의(司馬懿)의 원정군이 요동에 도착한 것이 6월이며, 요동이 함락되고 공손연이 죽은 것이 8월이므로 왜여왕의 사자가 대방군에 도착했다고 한 경초 2년(서기 238년) 6월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 명제기에 의하면, 경초 원년(서기 237년) 7월 관구검이 육로를 통해 공손연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뒤 청주, 연주, 유주, 기주의 4개 주에서 해선(海船)을 대거 건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서기 238년) 사마의의 본군이 육로를 이용하여 요동으로 진군했으므로 이 선박들은 본군에 대한 물자공급에 활용되는 한편, 선우사, 유흔 등이 이끄는 별동군이 바다를 건너 낙랑군, 대방군을 평정해 공손연의 배후를 끊는데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마한전에서는 “경초 연간에 명제가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몰래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대방군과 낙랑군)을 평정했다.”고 하였는데, ‘몰래 보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요동이 함락된 뒤에 낙랑, 대방을 차례로 평정한게 아니라 사마의가 요동을 공격하는 와중이나 그 이전에, 즉 공손씨가 아직 건재할 때에 그 전력을 분산하거나 배후를 끊으려는 등의 이유로 유흔, 선우사를 보내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보면 위나라 명제 ‘경초2년 6월’에 왜여왕의 사신이 대방군에 도착했다는 진수의 기록을 오기로 볼수는 없다.

하지만 삼국지 왜전에는 경초 2년(238년) 6월이라고 시기를 분명히 밝힌 것에 비해, 마한전에는 경초 연간이라고 두리뭉실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면 왜전에서 밝힌 (서기 238년) 6월에 왜여왕의 사신이 대방군에 도착했다는 기록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삼국지 왜전>

(위나라 제왕 조방) 정시(正始) 원년(240년),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건중교위(建中校尉) 제준(梯儁) 등을 보내 조서(詔書)와 인수(印綬)를 받들고 왜국(倭國)으로 가게 하여 왜왕(倭王)으로 배가(拜假)하고 아울러 조령으로 하사한(詔賜) 금(金), 백(帛), 금계(錦 ), 도(刀), 경(鏡), 채물(采物)을 지니고 갔다. 그러자 왜왕(倭王)이 사자를 보내 표문(表文)을 올리며 은조(恩詔)에 답사(答謝)했다.


진수의 기록에 의거하면 (서기 238년) 6월에 대방태수는 유하(劉夏)였고, 사마의 본군과 달리 대방태수 보직을 받은 유흔(劉昕)은 분명 6월 이전에 별동군과 함께 대방군으로 잠입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여왕의 사신이 대방군에 도착했을때, 대방태수는 유하이었다. 유흔의 행보는 이후 기록에 없다.

대방군에 도착한 왜여왕의 사신은 6월에 곧바로 도성으로 후송 되지는 못한 것 같다. 공손연이 8월에 참수된 것으로 보면, 왜여왕의 사신은 8월 이후에 대방군을 출발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 238년) 12월에 내린 조서를 (서기 240년)이 되어서야 대방군에서 왜국으로 보낸 것일까? 어떠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서기 238년) 12월에 위나라 명제가 중병에 걸려 드러눕자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종친과 대신들 간에 암투가 벌어졌었다. 이듬해 1월 명제가 죽고 조방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러한 위나라 내부의 권력싸움으로 인해 왜여왕의 사신들은 조서를 가지고 대방군으로 갈수 없었을 것이다. (서기 240년) 왜여왕의 사신과 함께 대방군으로 향한 인물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었다. 앞서 대방태수였던 유하는 보직이 해임 되었을 것이고, 후임으로 궁준이 부임 하게 되었다.


왜여왕의 사신과 위나라 사신들이 여왕국으로 가는 여정을 살펴보면 선박을 이용하여 대방군을 떠나, 백제의 서쪽 해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남해안 어느 지역인지 몰라도 가야의 하나인 구야국(狗邪國)을 경유 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머나먼 항해루트를 보면 반드시 백제와 가야의 강역을 거쳐야 한다.

(서기 238년)에 백제의 상황을 보면 (서기 234년) 구수왕이 붕어하고 아들인 사반왕자가 왕위에 올라야하는데, 고이와 진씨 세력들의 쿠데타로 인해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고이왕은 분서왕의 맏아들인 사반과 그 추종세력을 잡기위해 (서기 236년)과 (서기 238년)에 각기 친정하였다. 고이왕은 사반과 추종세력들을 몰아내고 (서기 240년) 진충을 좌장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맡겼으며, (서기 242년)에는 숙부 질(質)을 우보로 삼는 등 친정체제를 구축한다. 따라서 이 당시 왜여왕국과 백제와의 통교는 없었다고 보아야한다.


왜여왕국이 대륙의 나라와 교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나라는 가야(가라)로 보아야한다. 삼국사기에 “(서기 59년) 여름 5월에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라고 하여 탈해이사금 당시 왜국과 최초로 통교한 사실이 수록 되어있다. 탈해이사금 집권기의 왜국이라함은 쿠슈지역의 왜국으로 추정되며, 이 당시 왜국은 수십개의 나라로 분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은 탈해이사금 시기 매우 번성하였다. 그러나 사로국의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로국 남쪽에는 가야라는 큰 세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탈해이사금의 사로국은 (서기 77년)에 드디어 남쪽 여러 가야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공격은 전면전이 아니라 가야 공격의 거점 확보가 주요한 목적이었다.


(서기 87년) 파사이사금 시기에 이르러서야 사로국은 지금의 낙동강 동남쪽에 위치한 가야 소국들을 공격하였다. (서기 96년)까지 이루어진 가야 공략으로 낙동강 동남쪽 가야 소국들은 사로국에 귀부하게 된다. 그러나 낙동강 서쪽에는 가야국중 가장 큰 세력인 금관국이 있었다. (서기 102년) 사로국 북쪽의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강역을 다투다가 파사이사금에게 해결을 요청 하였으나, 파사이사금은 이를 어렵게 생각하여 금관국 수로왕에게 자문을 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수로왕이 사로국 6부의 하나인 한기부가 지위 낮은 사람으로 연회를 주관하였다고 노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고 돌아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로국과 금관국은 심각한 상태에 접어들었다. (서기 115년) 지마이사금은 친정하여 낙동강을 드디어 건넜다. 그러나 가야군사의 습격으로 퇴각하였고, 이듬해 그 당시에는 대규모인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야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자연재해로 퇴각하게 된다.


결국 지마이사금의 2차에 걸친 금관국 공략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금관국의 도성이 포위되는 등 금관국은 사로국의 군사력에 대해 매우 위협을 느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와 왜국의 관련 기사를 한줄도 수록하지 않았기에 정황으로 살펴보면, 지마이사금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금관국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수군을 이용하여 사로국의 변경을 공략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121년)에 “여름 4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였다.”라는 것과 (서기 122년) “서울 사람들이 "왜나라 군사가 크게 쳐들어온다."고 말을 잘못 퍼뜨리고는 다투어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숨었다. 왕이 이찬 익종 등에게 명하여 타일러 말렸다.”라는 기사를 보면 금관국과 왜국이 긴밀한 사이였다는 것을 짐작 할 수가 있다. 이러한 금관국의 사로국 흔들기는 성공하여 (서기 123년)에 사로국과 왜국이 화해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사로국과 왜국은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아래 놀라운 기록이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173년) 여름 5월에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삼국지 왜전에 보이는 왜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기록에 등장한다. 삼국지 왜전에는 (서기 238년)에 관련기사가 수록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는 이보다 65년이나 앞서 비미호가 등장하고 있다. 지마이사금 이후 사로국과 화친관계에 있었던, 왜국의 입장에서 그동안 사로국과 물품을 비롯하여 많은 인적교류가 있었음은 자명하다. 왜여왕국 비미호가 (서기 173년) 아달라이사금에게 사신을 보내온 이유가 궁금하다. 대체 왜국에서 무슨일이 일어난 것일까?


<삼국지 왜전>

남쪽으로 가면 야마일국(邪馬壹國)에 도착하는데, 여왕(女王)의 도읍이며 물길로는(水行) 10일, 뭍길로는(陸行) 한 달이 걸린다. 관리에는 이지마(伊支馬)가 있고 그 다음 (관리)는 미마승(彌馬升), 그 다음은 미마획지(彌馬獲支), 그 다음은 노가제(奴佳 )라 하며, (호구수는) 약 7만여 호(戶)가 있다.


비미호가 다스리는 나라의 명칭은 야마일국(邪馬壹國)이라 한다. 야마일국이 처음부터 여왕이 다스렸던 것은 아니다. 후한서 동이전에 “영초 원년(서기 107년) 왜국왕 수승(帥昇)이 후한에 사자를 보냈다.”라고 하여 수승이라는 남자왕이 야마일국을 다스렸던 것이다.

삼국지 왜전에 “본래 그 나라는 또한 남자가 왕이 되어 7-80년을 지낸 뒤에 왜국(倭國)에 난이 일어 여러 해 동안 서로 공벌(攻伐)하니 이에 함께 여자 한명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비미호가 야마일국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 했음을 알수가 있다. 삼국사기 기록 (서기 173년) 왜여왕 비미호라고 하였으니, 비미호가 여왕으로 등극한 시기는 (서기 173년) 이전 일것이다. 비미호가 야마일국의 왕으로 추대 되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이른바 왜국대란이었다.


왜국대란의 시기는 후한서에 따르면 환제,영제 연간(146년∼189년)에 대란이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아달라이사금 5년(서기 158년) 왜인이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면 왜국에서 대란의 전조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라고도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왜국대란이 무슨 이유로 일어났는지는 문헌기록에 자세하지 않다. 여기서 왜국대란의 원인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서기 238년) 왜여왕 비미호 사신이 대방군에 도착한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 더 나아가서 가야와 왜국과의 친연성을 알수가 있기 때문이다.

2세기초 왜국의 여러 소국들은 통일적인 정치체제가 없었을 것이다. 지마이사금 당시 금관국이 사로국을 흔들기 위해 왜국을 끌어들인점을 놓고보면 왜국과의 인적교류가 많았을 것이며, 일부 가야인들중에는 왜국 조정에 출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왜국의 여러 소국들은 저마다 가야와 사로국과의 교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후 부(富)를 축적한 소국과 그렇치 않은 나라들간에 알력이 생겼을 것이고, 이것이 왜국대란이 일어난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왜국의 여러 소국들은 비미호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은 것일까?


<삼국지 왜전>

그녀의 이름은 비미호(卑彌呼)라 하는데, 귀도(鬼道)를 행하여 뭇 사람들을 능히 미혹하고 나이가 이미 많으나 남편은 없고 남동생이 있어 치국(治國)을 보좌하였다. 왕이 된 이래로 그녀를 본 사람이 적었고 계집종 천명에게 시중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명이 있어 음식을 공급하고 (비미호의) 말을 전하면서 출입하였다. 거처(居處)하는 궁실(宮室)에는 누관(樓觀), 성책(城柵)을 엄히 설치하였고 늘 병기를 지니고 수위(守衛)하는 자가 있었다.


비미호가 여자로서 왕이된 이유는 바로 “귀도(鬼道)를 행하여 뭇 사람들을 능히 미혹하고” 즉 신성(神聖)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부족사회에서 (神聖)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절대 권력자가 갖추어야할 제1의 덕목이다. 비미호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미호가 직접적인 통치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남편은 없고 남동생이 있어 치국(治國)을 보좌하였다.”라는 구절을 통해 알수가 있다.

그런데 비미호의 출신배경에 대해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문헌기록 어디에서도 찾을수가 없다.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설화로 추측할 뿐이다. 아달라이사금 4년 (서기 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를 따고 있는데, 바위 하나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그후 바위가 또한 세오녀를 업고 일본으로 갔다는 설화이다. 시기적으로 비미호가 사신을 보낸 (서기 173년)과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모두 아달라이사금 제위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서기 158년)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하였다. 왜인이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서기 172년) 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삼았다.

(서기 173년) 여름 5월에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 설화로 비미호를 사로국 출신으로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앞서 밝혔듯이 왜여왕국이 대륙의 나라와 교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나라는 가야(가라)로 추정한바 비미호의 출신지는 가야 이주민일 아닐까 싶다. 지마이사금 당시 금관국 공략 이후 가야 집권계층 사이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일부 가야인들중에는 왜국으로 건너가서 정착하였을 것이며, 구도(仇道)와 구수혜(仇須兮) 처럼 사로국에 귀화하여 조정에 출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집권계층의 일탈로 인해 여러 가야국은 점차적으로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로국이 강성해질수록 여러 가야국들은 점차로 백제와 왜국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나해이사금은 (서기 201년) 가야국이 화친을 청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야국들에 대하여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였다.


비미호가 사로국에 사신을 보내 두 나라간에 이어온 우호를 다지고, 더불어 교역 파트너인 여러 가야국에 대한 압박을 중지 할 것을 요청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나해이사금 집권기인 (서기 209년)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교역문제로 인해 가라(加羅)를 공격하였다. 이때 나해이사금은 태자 우로(于老)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비미호 입장에서 가야와의 교역을 통해 여러 소국들의 왕권을 안정시켜야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사로국의 가야국 압박 조치는 더 이상 두고 볼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서기 233년) 조분이사금 당시에 금성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나해이사금 태자였던 우로에게 격파되었다. 사로국 공략에 실패한 왜여왕 비미호는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여야 했다. 그 방법은 가야국을 통해 알게된 중화족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다. 가야국의 사람을 길잡이로 하여 (서기 238년) 비미호는 머나먼 대방군으로 사신을 보낸다. (서기 240년) 우여곡절 끝에 위나라로부터 왜왕으로 배가(拜假) 받는다.


<삼국지 왜전>

정시 8년(247년), (대방)태수 왕기(王 )가 (임지인 대방군의) 관부에 도착했다. 왜여왕(倭女王) 비미호(卑彌呼)가 구노국(狗奴國)의 남왕(男王) 비미궁호(卑彌弓呼)와 평소 불화하였으니, 왜(倭)의 재사(載斯), 오월(烏越) 등을 (대방)군으로 보내 서로 공격하는 상황에 관해 진술했다. 그리하여 (대방군에서) 새조연사(塞曹 史) 장정(張政) 등을 보내 조서(詔書)와 황당(黃幢)을 받들고 가서 난승미(難升米)에게 배가(拜假)하고 격문을 반포해 그들을 깨우쳤다.

비미호가 죽자 무덤을 크게 만들어 지름이 백여 보(步)였고 노비(奴婢) 백여 명을 순장( 葬=殉葬)했다. 다시 남왕(男王)이 즉위했으나 국인들이 불복하여 다시 서로 주살(誅殺)하여 이때 죽은 이가 천여 명에 달했다. 다시 비미호(卑彌呼)의 종녀(宗女)인 일여(壹與)가 13살의 나이로 왕이 되니 나라 안이 마침내 안정되었다.


(서기 244년)부터 (서기 246년)까지 위나라와 고구려간에 대 전쟁을 하였는데, 고구려는 대패하였다. 동천왕을 끝까지 추격하여 큰 공을 세운 왕기(王 )는 (서기 247년) 대방태수에 임명되었다. 이때 비미호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구노국(狗奴國)의 남왕(男王) 비미궁호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비미호는 사신을 대방군에 보내 위나라의 권위를 내세워 비미궁호를 굴복 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비미궁호에게 비미호는 죽는다. 비미호가 죽자 일시적으로 비미궁호가 왕위에 있었으나, 소국들이 불복하여 서로 왕위를 두고 대란이 있었다.

결국 소국들은 비미호의 종녀(宗女)인 13살의 일여(壹與)를 왕위에 올린다. 일여가 왕위에 오른후에나 비미호의 무덤이 조성 되었을 것이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 글쓴이 : 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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