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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삼국시대의 왜 - 그들은 바다를 건너왔나

송화강 2019-05-28 (화) 20:23 6년전 14705  

 

 

삼국시대의 왜 - 그들은 바다를 건너왔나


중국의 전국시대에 편찬되었다고 하는 중국 最古의 지리서『山海 』에 倭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개국은 거연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다. 왜는 연에 속한다.” <蓋國在鉅燕南倭北 倭屬燕>

 

 

이때의 燕은 물론 전국시대의 연이다. 개국(개마고원)은 연의 남쪽, 왜의 북쪽에 위치하며 왜는 燕에 속한다고 했다. 개마고원은 한반도 북쪽에 있다. 일본열도의 북쪽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왜는 한반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개마고원 남쪽의 한반도가 연에 속한다고 한 것이지 바다건너의 일본열도가 연에 속한다고 한 것이 아니다. 아마 당시 중국인들에게는 한반도의 동해바다에 일본열도가 있다는 인식조차 없었을 것이다.

한편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편찬된 漢書 지리지에는 燕의 영역에 관한 서술 가운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낙랑 海中에 왜인이 있다. 1백 여국으로 나뉘어 있으며 歲時에는 낙랑군에 찾아와 조공한다.”

 

 

낙랑 海中이란 낙랑군(평양)과 바다뱃길로 통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일본의 역사가들은 이것을 기원전후에 일본열도의 왜인이 낙랑군(중국)과 통교한 첫 기록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井上秀雄은 이 왜인을 남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山尾幸久는 이에 대하여 이 왜인의 거주지를 일본열도로 보는 것이 자명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반도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어쩐지는 역시 의문이 남는다, 라고 하였고 直木孝次郞도『일본의 역사 1』(小 館)에서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왜의 奴國(=倭奴國)에 관한 기사가 있다. 상기의 漢書 지리지의 서술과 함께 일본사 역사책의 첫머리에 늘 인용되는 단골메뉴이다.

 

 

“建武中元 2년(AD57) 왜의 奴國이 (후한에) 조공했다. 使人은 스스로를 大夫라고 칭했다. 奴國은 왜국의 極南界이다. 광무제가 인수를 수여했다.”

 

 

당시 北九州에는 30여개의 소국들이 있었는데 奴國은 그 가운데 가장 큰 나라였고 지금의 후쿠오카에 있었다. 九州의 최북단에 위치했던 그 奴國을 후한서는 왜국의 極南界라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왜국의 본거지는 남한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 광무제가 수여했다고 하는 金印이 1784년 후쿠오카 교외의 논에서 한 농부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그 금인은 지석묘 안에 있었다고 한다. 지석묘(남방식)의 분포와 왜의 영역, 奴國王의 出自 등을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三國志는 280년대에 晉의 陳 에 의해 쓰였다. 3세기의 現代史인 셈이다. 삼국지 왜인전에는 北九州 30국 연합의 맹주인 邪馬台國(야마타이국)으로 가는 길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왜인은 대방군의 東南大海에 있다. 왜로 가는 길은 대방군에서 뱃길로 한국(마한)의 해안을 따라 남으로 가고 동으로 가면 그 北岸 구야한국(김해)에 이른다. 여기까지의 거리가 7천 여리. 여기서 바다 1천 여리를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산이 험준하고 숲이 깊으며 짐승이 다니는 것 같은 길밖에 없다. 1천여호의 민가가 있다. 良田이 없어 사람들은 해산물을 먹으며 배를 타고 남과 북으로 가서 곡식을 사온다.....”

 

 

진수는 구야한국 즉 금관가야를 ‘倭의 北岸’이라고 했다. 금관가야도 왜라는 것이다. 한편 삼국지 韓 은 3세기의 왜의 지리적 위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韓은 대방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과 서는 바다이고, 남은 왜와 접하고 있다.”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변진 독로국은 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弁辰....其瀆盧國 與倭接界>

 

 

삼한은 남쪽으로 왜와 접해있고 변진의 독로국(동래)도 왜와 접해있다고 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바다로 떨어져있는 것을 서로 接해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왜는 일본열도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지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삼국지 韓 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建安 中(205년경)에 公孫康은 낙랑군의 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낙랑군에서 분리하여 대방군을 만들고 遺民을 모았다. 그리고 군사를 일으켜 韓. 濊를 쳤다. 이후 韓과 倭는 마침내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

“변진에서는 철이 생산된다. 韓. 濊. 倭가 모두 이것을 가져간다. 시장에서는 철을 사용하여 물건을 매매하는데 중국에서의 화폐와 같다. 또 철을 낙랑군. 대방군에도 공급한다.”

 

 

여기에는 倭가 韓. 濊와 함께 기술되어 있다. 나는 이 왜도 ‘한반도의 왜’라고 본다. 일본열도의 왜가 아니다. 韓을 쳤는데 일본열도가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또 위의 문장은 변진의 철이 낙랑군. 대방군을 포함하여 한반도 전역에 공급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철을 생산하지 못했으므로 일본열도에서도 물론 사갔겠지만 위의 문장에서의 왜는 한반도를 가리킨다고 본다.

 

 

일본학자 井上秀雄은 3세기의 중국인들은 한반도남부를 왜의 주 거주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사서에는 5세기에 이른바 왜의 5왕이 등장하는데 井上秀雄은 이때부터 왜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이 일본열도로 바뀐다고 한다. 그는『고대조선』(NHK)에서 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그런데 일본에서는 고구려와 대립했던 倭는 일본이며 야마토(大和)조정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중국에서 사용된 왜의 용법에 관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왜는 일본뿐만 아니라 후한시대에는 내몽고 방면과 남방의 이종족도 가리키고 있으며, 남한에도 왜인이 있었다고 중국인들은 보고 있다. 3세기에도 중국의 지식인은 왜인의 확실한 주거지는 남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삼국지 왜인전은 진기한 기사로서 당시의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가 일본열도만을 가리키게 되는 것은 5세기 이후의 일로, 이때의 왜국은 北九州의 倭奴國(후쿠오카)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중국에서는 九州지방을 ‘왜’라고 했으며 야마토조정은 ‘왜’라고 하지 않고 ‘일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신라에서 사용된 왜는 3세기 이전 중국에서 사용된 남한의 왜를 지칭하고 있다. 적어도 신라인들은 7세기 중반까지는 왜를 육지로 접하고 있는 임나지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를 ‘일본’이라고 보고 ‘야마토조정’이라고 보는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은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보이는 왜를 모두 ‘일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더욱이 그 기사의 내용이 왜를 ‘일본’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정부의 기관이 있었다고 설명해왔다. 왜가 고구려 광개토왕의 5만의 대군과 수차례에 걸쳐 싸우고 또 5세기에만도 17회나 신라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와, 해류가 거센 대한해협을 대군을 渡航시키는 방법 등이 당시의 北九州의 왜국이나 畿內의 야마토조정에 있었을까? 임나일본부와 같은 史料에도 없는 허깨비를 조작하지 말고 우선 각각의 사료에 의거하여 신라인이 사용한 ‘왜’(임나지방의 별명)를 재검토함과 동시에 고대의 일본사. 한국사를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井上秀雄의 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적어도 5세기 이전에는 한반도남부의 주민을 왜라고 불렀다고 생각한다. 그 후 왜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꾸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왜는 순전히 일본열도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래서 三國史가 저술될 무렵에는(나는 그것을 고려 초라고 생각한다) 이미 왜가 한반도남부였다는 기억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은 왜가 일본열도라는 것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이 삼국사기를 기술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왜에 관한 기사들, 예를 들어 대기근으로 1천 여 명의 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신라로 왔다는 것, 昔于老 에서 우로가 왜의 사신에게 왜의 왕을 생선을 굽게 하고 그 왕비를 부엌때기로 삼겠다고 한 농담이 화근이 되어 양국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 朴堤上 에서 신라와 고구려가 서로 짜고 왜국을 치려한다는 백제인의 참언을 듣고 왜왕이 병을 신라의 국경에 보냈으나 고구려군이 쳐들어와 왜병을 모조리 죽였다, 라는 이야기 등에 나오는 왜는 도저히 일본열도의 왜라고 볼 수 없다.

또 자비왕5년(462) 조에 왜인이 活開城을 습격하여 1천 여 명의 양민을 잡아갔다든지 이듬해에는 良城을 습격했다는 기사에서의 왜는 육지와 연속된 지역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원시적인 통나무배로 1천 명을 납치해갔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미리 여분의 배를 준비해 왔다고 볼 수도 없다. 삼국사기는 삽량성을 국경지역이라고 했는데 삽량성(양산)이 일본열도와의 국경이 될 수 없다.

또 신라본기에는 흘해왕 시절, 왜왕이 신라의 王女를 며느리로 삼겠다고 청혼을 해서 아찬의 딸을 보냈는데 그 후 왜에서 또 청혼을 해왔으므로 이를 거절했더니 왜왕이 단교를 통보해왔다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의 왜국도 일본열도의 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밖에 신라인들은 浦上八國도 ‘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대마도는 전답이 적었기 때문에 그 주민은 배를 타고 한반도남부와 北九州로 가 곡식을 구했다고 한다. 이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곡식뿐만 아니라 금관가야와 北九州 사이의 중계무역도 했을 것이다. 그런 관계로 그들은 특히 금관가야사람들과는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야의 요청에 의하여 가야의 신라공격에도 적극 가담했으리라고 본다. 그들은 단독으로 신라를 습격하여 식량 등을 약탈할 때도 있었겠지만 그 경우 규모는 매우 작았을 것이다.

 

 

신라는 5, 6세기까지 금관가야를 맹주로 하는 가야제국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따라서 당연히 신라-가야의 충돌기록이 많아야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가야와의 전투기사보다 왜와의 전투기사가 압도적으로 많다. 왜를 일본열도의 주민이라고 생각하는 한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바다건너 왜의 공격이 가야의 공격보다 다 많을 수 있단 말인가. 일본열도의 왜가 渡海의 어려움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렇게 빈번하게 신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었을까?

 

 

초기의 신라는 가야연맹에 종속적 위치에 있었다고 중국의 역사서는 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는 늘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왜왕이 신라왕가에 청혼을 했다는 것도 가야가 종주국의 입장에서 신라의 왕녀를 인질로 요구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 기억이 신라인의 머릿속에 남아있고 후세에 承되어 수많은 왜인의 습격이 역사서에 기술된 것이라고 본다. 6세기 이후 신라본기에 왜의 기사가 사라지고 그 대신 가야의 기사가 많아지는데 이것은 6세기 이전의 기사가 진흥왕 때의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할 때 민간의 막연한 전승을 採錄하여 기술한 것에 연유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하는 ‘왜’를 남한의 주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 아니다. 5세기 전후에 수천 명의 대군이 수차례 바다를 건너와 고구려군과 싸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에 속하지 않는 남한의 소국들(경상남도 및 전라남북도)을 일괄적으로 왜라고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왜에 대한 당시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반적인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일본을 일본열도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自明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가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낸 왜, 신라가 미사흔을 볼모로 보낸 왜도 과연 그것이 일본열도의 왜를 가리키는 것인지 자못 의심스러운 것이다.

 

 

*** 이 글은 井上秀雄의 저서 외에 鈴木英夫, 鬼頭淸明, 木下 仁 등의 논문을 참조하였습니다. 이들은 조금씩 의견은 다르지만 모두 井上秀雄의 삼국사기의 倭 =가야 설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 글쓴이 : 귀거래사

 

 

http://blog.daum.net/gusan0579/8016544?categoryId=21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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