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이순신 리더쉽 [6]- 독사 머리 치듯 여진족 최고 수뇌부를 부수다毒蛇 머리 치듯 여진족 최고 수뇌부를 부수다 선조 16년(1583년) 1월에 함경도 육진(六鎭)에서 니탕개의 난이 발발하자, 당년 38세의 훈련원 무관 이순신은 새로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종2품)에 임명된 무장 이용의 요청으로 그의 군관(참모 장교)이 되어 전쟁터에 갔다. 그가 육진에 도착한 3월,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겨울인 1월 하순에 침공한 니탕개 군대가 2월 중순까지 경원성과 관내 진보 네 군데 성을 모두 공격했으나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북병사 이제신이 육진 군사를 동원해 기습전으로 적의 본거지를 치자 적군이 흩어져서 공격을 멈췄기 때문이다. 5월 5일 육진 순시 중에 조그만 종성진 성에 들어가 있던 신임 북병사 김우서가 2만여 기 적군의 갑작스러운 포위 공격을 받을 때, 아무도 돕지 않았다. 다행히 노련한 김우서는 하루 종일 계속된 적의 세찬 공격을 잘 막아냈다. 이튿날 적군의 재공격 때는 싸울 무기가 없어서 무기고에 방치돼 있던 새 무기 승자총통을 꺼내 조선군 전쟁 사상 최초의 총포전을 벌여 방어에 성공했다.
/이철원 기자
전쟁터의 아군 내분도 큰일인데, 더 큰 문제가 조정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병조판서는 율곡 이이였는데, 전쟁터에 보낼 군량과 군사를 모으기가 너무나 어렵자 타개책을 냈다. 서얼과 천인이라도 전쟁에 나가 싸우거나 곡식을 내면 벼슬길을 허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게 하거나 면천(免賤)해준다는 정책이었다. 그건 양반의 기득권을 크게 해치는 것이기에 큰 반대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다른 길이 전혀 없어서 고통스럽게 마련한 궁여지책이었다. 선조도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자 대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벼슬아치가 벌 떼처럼 들고일어나 이이를 극렬하게 공격하고 탄핵했다. 선조가 그걸 막느라고 극력 노력했지만 결국 이이는 6월 23일에 병조판서직에서 교체됐다. 이때 받은 극심한 고통과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그는 7개월 뒤 사망했다. 대규모 외적의 침공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조정과 전쟁터 모두 분열과 증오로 맹렬하게 뒤엉켜 있던 그때, 이순신이 일어섰다. 그대로 두면 나라가 크게 무너질 위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 위기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보기에 해결책은 하나였다. 전란의 종식이다. 모든 것이 전쟁 때문에 발생한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그 문제들도 같이 해결될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대처 방식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상대는 뛰어난 기동력을 지닌 유목민 전사들이기에 전투에서 불리하면 말달려서 새 떼처럼 흩어졌다. 조선군의 뛰어난 무장이라도 한 전투에서 죽인 적군은 기껏 졸개 몇 명 내지 몇십 명 수준이었다. 적군은 늘 대규모 인해전술을 펼치기에 적군 최고 수뇌부에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고, 졸개 몇십 명씩 죽여서는 끝이 없었다. 이순신은 적군의 최고 수뇌부를 부수기로 작정했다. 독사를 죽일 때 머리를 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듯 적군의 최고 수뇌부를 부수는 것이 적군 와해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니탕개 군대의 최고 수뇌부는 대추장들인 '니탕개, 우을기내, 율보리' 3인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순신은 제2인자인 우을기내를 최우선 공격 대상으로 정했다. 정공법으로는 생포가 불가능해 편법을 쓰기로 했다. 선조 16년 7월 초. 군관급 무장 몇 명을 동원한 이순신은 극비리에 거사에 들어갔다. 경원진 부속 진보인 건원보 앞에 복병을 묻어두고 우을기내의 지인인 여진족으로 하여금 우을기내를 그곳까지 유인해 사로잡았다. 생 포된 우을기내는 즉시 북병사 김우서에게 보내졌고 북병사는 급히 그의 머리를 베어 도성으로 올려 보냈다. 선조는 기쁨을 금치 못하고 그 머리를 동소문 성문 밖에 내걸어서 백성이 구경하게 했다(선조실록, 선조 16년 7월 10일). 우을기내의 머리, 그것은 전란의 공포와 피해에 시달리던 백성에게 전란의 종식이 가까웠다는 큰 희망과 기쁨을 주는 찬란한 신호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07/20170207033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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