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이순신 리더쉽 [7]- 지도자로선 결격 사유인 선조의 이중인격지도자로선 결격 사유인 선조의 이중인격
[이순신 리더십] [7]
이순신이 극소수 군관급 무장들과 결행한 '우을기내 생포작전' 때 함께 거사한 무장으로 이박, 김여필 등의 이름이 기록에 나타난다. 추적해 보면 그들은 선조로부터 이순신처럼 큰 특혜나 인정을 받은 일이 없기에 주동자는 이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작전의 결말은 어떠했던가. 선조의 성품을 고찰할 때 크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상당히 우스운 일이지만 그가 늘 염두에 두고 매우 신경을 쓴 것이 '역사'였다. 그가 역사에 자신의 모습으로 기록되기를 원한 것 중 하나가 '아주 의로운 임금'이었다. 그래서 7월 10일에 우을기내의 머리를 받은 그는 7월 11일에 '역사'를 의식한 명령을 급하게 내렸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적의 괴수(魁首)를 잡아 죽인 것은 아주 다행이다. 그러나 그 처사가 의(義)에 합당하지 않다. 꾀어내어 같이 말하고 술을 주어 마시게 하고 위협해서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하니, 비록 병모(兵謨)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매우 좋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앞으로도 죽여야 할 자가 한 사람만이 아님에랴. 앞으로는 그와 같은 일은 꾀하지 말라고 하유하라'고 하다."(우성전 '계갑일록')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 명령은 본심이 아니라 선조의 치명적 결함인 이중인격적 인품의 발현이었다. 겉으로는 '의로운 명령'을 내렸지만, 내심으로는 누군가 똑같은 작전을 써서 적의 괴수를 더 잡아 오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오직 그런 작전만이 적의 수뇌부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처럼 만만한 곳인가! 임금이 "앞으로는 속임수를 써서 적의 괴수를 잡지 말라!"고 명했는데 굳이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우을기내 생포작전'같이 위험한 거사를 할 자가 대체 어디 있으랴! 선조는 그 명령을 내린 뒤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할 수 없이 이번에는 본심을 담은 새 명령을 함경도 순찰사에게 내렸다. "우을기내를 유인해 체포한 방식으로 니탕개를 잡아 죽이는 작전을 실행하라!" 순찰사 군관 박홍진과 회령 판관 윤구수가 뽑혀서 작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인에는 성공했으나 생포 단계에서 니탕개가 눈치채고 달아나자 선조는 그들을 처벌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선조는 이순신을 크게 주목하게 됐다. 대의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되면 개인적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강력하게 치고 나아가는 이순신의 담력과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눈부셨다. 그런 신하라야 통치에 큰 도움이 된다. 이때부터 선조는 훗날 통제사 임명 때까지 계속 이순신을 감싸고 특혜로 대우했다. 선조가 우을기내 사건을 얼마나 생생하게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 드러난 것이 정유재란 때였다. 1597년 1월, 요시라의 반간계에 속은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을 숙청하고 원균을 새 통제사로 임명하기로 작심하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때 대뜸 내놓은 이야기가 바로 14년 전 우을기내 사건 때 일화였다. 선조는 말했다. "이순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계미년 이래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그는 속이는 자라고 한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 선조 특유의 어법 중 하나가 매우 증오하거나 숙청하고 싶은 신하가 있으면 실은 잘 알면서도 "나는 그가 어떤 자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건 다른 신하들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 신호였다. 그때도 선조는 그런 어법을 쓰면서 이순신을 중죄인으로 몰아갔고, 이순신은 다음 달에 파면과 동시에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와 옥에 갇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14/20170214032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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