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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자료] 부여에서 온 박혁거세와 파소

송화강 2019-05-23 (목) 00:29 6년전 12216  

부여에서 온 박혁거세와 파소

 

[자료]부여夫餘, 동명東明, 신라新羅의 황도皇都


1. 북부여

북부여는 해모수가 세운 나라이니, 해모수가 일어나 명실공이 단군 조선을 계승하기 까지는 크게 세 번 변한다.


해모수가 처음 일어났던 곳은 서란舒蘭이다.

처음 북부여의 해모수가 일어난 곳은 분명히 웅심산이 있는 서란이다. 북부여기 상편에는 해모수 재위 원년 임술에 궁실을 웅심산의 난빈蘭濱에 궁실을 짓고 정사를 보았다고 하였다.


삼성기전 상편의 기록에도 임술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단군조선 고열가 단군 재위 57년 임술 4월 8일에 해모수가 웅심산으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해모수가 실제적인 권력을 거머쥐었을 때는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하면서부터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해모수가 단군 조선을 계승하여 실권을 모두 장악했을 때는 백악산에 웅거하면서부터다. 이 때 백악산을 불의에 빼앗아 의거하여 천왕랑이라 일컬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명령을 따랐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체로 북부여가 일어남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반면에 북부여기 상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악산을 점령했을 때는 해모수 원년 임술년 또는 고열가 단군이 퇴위하는 2년 계해년의 일이다.

세 번째로 해모수는 재위 8년 기사에 옛 조선의 서울 장당경에서 오가의 공화정을 철폐시키고 이들의 추대에 의하여 명실공이 조선의 단군이 된다. 이는 북부여기 상편에서 기록하였으니 이는 형식상 단군 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부여가 동명제 고두막한에게 나라를 내어 주기까지 계속해서 도읍으로 삼은 곳은 어느 곳일까?


가장 유력한 곳은 백악산 아사달이다.

북부여기 상편의 기록에 의하면 “해모수 재위 20년 신사에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7월에 새 궁궐 366칸을 지어 천안궁이라 이름 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 7월 앞에 다른 곳을 명시하지 않았음으로 천안궁은 백악산에 있는 것이 된다. 그런 까닭으로 북부여의 수도는 백악산 아사달이 된다.


반면에 북부여기 상편에는 처음 궁실을 난빈에 지었고, 명시적으로 백악산에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고 하지 않았음으로, 신궁은 서란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은 단군 해모수의 무덤이 웅심산에 있는 점에서 신빙성을 가진다. 주로 옛 조선, 북부여, 고구려 황제의 무덤은 대체로 그 도읍지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재반론으로는 처음 기두한 곳을 기리기 위해 무덤을 웅심산에 썼다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난 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북부여기 하편에서 졸본에서 기두한 동명제 고두막한이 무혈입성한 북부여의 수도가 어느 곳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북부여 하편에서도 단지 수만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와 나라 이름을 그대로 북부여라 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이런 난점을 그런 대로 정리해 주는 기록은 조대기를 인용한 고구려국본기다.


“해모수는 하늘에서 내려와 일찍이 웅심산에 있다가 부여의 옛 도읍에서 군병을 일으키니 대중들의 추대에 의하여 나라를 세워 왕으로 일컬었는데 이를 일러 부여 시조라 한다.”라 하였다.


2. 동명국

북부여를 멸망시킨 이는 고두막한이다. 고두막한은 해모수가 그랬듯 권력을 평화적으로 쟁취했다. 의병을 일으켜 한무제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큰 힘을 기른 고두막한의 강권에 못 이겨 북부여 제5대 단군 해부루가 가섭원의 동부여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고두막한의 기록에 있어 삼성기전 상편과 북부여 하권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먼저 상성기전 상편에서는 졸본에서 일어난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한 후 나라 이름을 동명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부여의 옛 도읍이란 앞서 인용한 고구려국본기와 동일한 부여고도이니 곧 백악산 아사달이다. 또한 을미년은 북부여기 하편에서 기록한 동명제가 군사를 앞세워 북부여의 도성에 들어간 해임으로 부여도성, 부여고도, 백악산아사달은 같은 곳이다.


북부여기 상편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동명왕 고두막한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이미 고두막한이 동명국東明國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을 전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부여기 하편에서 “원년 계유년에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불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북부여의 도성으로 들어와 나라 이름을 그대로 북부여라 하였다.”고 하였음으로 전후를 살펴 볼 때 북부여기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다만 삼성기는 해모수의 북부여와 고두막한의 북부여를 구분하기 위하여 동명국이라 하고, 그 시점은 명실 상부하게 북부여를 계승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였으니, 둘의 기록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겠다.

동명국은 북부여의 도성을 점령하였으되 이 곳을 동명국의 수도로 삼지는 않는다. 그 도읍은 계속해서 졸본이 된다. 졸본이란 삼홀의 근본이란 뜻이다. 삼홀三忽은 세 고을을 뜻하니 삼한의 세 도읍지를 뜻한다.


그리고 그 백악산은 계속해서 천제를 졸본과 더불어 나누어 올리게 하고, 그곳의 부로父老들과 단군이 회합하여 규약을 정하는 등 도읍에 준하는 예우를 한다.

3. 신라

삼성기전 상편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옛 땅은 부여의 옛 도읍이다.


“고두막한이 을미년 한나라 소왕昭王시에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고 나라이름을 동명이라 일컬었는데 이 곳은 곧 신라의 옛 땅이다. 삼성기전 상편>”


여기서 부여의 옛 도읍이란 백악산 아사달이다. 삼신오제본기에 의하면 삼신혹설에 “신新은 백白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 있어 신라는 그 단어의 머리가 백악산白岳山과 일치한다. 백악산이란 광명이 비추는 산을 의미한다. 더불어 신라는 광명이 환히 펼쳐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시본기에는 “계위소라癸爲蘇羅, 묘위신특백卯爲新特白”이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신라新羅란 “일출의 뿌리인 해亥가 개벽을 하여 묘방卯方에서 새롭게 태어나 동산東山에서 온 천하에 광명을 환히 비추는 것”을 뜻한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삼한의 민중들이 한수 이남으로 몰려든 때가 바로 도적 위만이 번한을 점령하면서부터다. 이 때 본국은 북부여 해모수 사후 모수리 단군 때의 일이다. 이 때로부터 진한의 백성도 또한 점차로 한수 이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들이 모여 새로이 나라를 이룬 것이 곧 남쪽의 진한이다. 이 때 남삼한은 번한의 유장 상장 탁이 세운 중마한의 명령을 따랐다.


다시 말해 남진한의 백성들은 원래 그 중심이 백악산에서 온 이들이다. 진한은 원래 옛 조선의 만주 일대를 가리키니, 고스란히 북부여가 되었고, 이제 그 북부여의 도읍은 백악산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백악산 아사달은 신라의 옛 땅이 되니 부여의 옛 도읍지였던 것이다.


이를 더욱 증명하는 것은 신라의 초기 국명이 진한辰韓 또는 사로斯盧였다는 점에 있다.


사로斯盧라는 것은 아사달阿斯達의 사斯와 전혀 동일하다. 이것은 곧 신라가 백악산 아사달에서 왔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그 땅에서 왕이 된 이는 박혁거세다. 원래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파소다. 그리고 그 파소의 아버지는 동명제 고두막한이다.


박혁거세가 진한辰韓을 개국한 것이 갑자년이니 이 때 나이가 13세였다. 반면에 고구려의 고주몽은 23세 때는 계해년에 개국하였으니 갑자년이면 24세가 된다.


동부여에서 골본부여로 망명 온 고추모가 고무서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골본부여 3대 단군이 되고, 박혁거세는 고주몽보다 10살 정도 어리므로 혁거세의 어머니는 고무서의 딸의 고모뻘이 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성도산 성모로 잘 알려진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고두막 단군의 딸이자 고무서 단군의 여동생이 된다. 고구려국본기에 파소는 부여황실의 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진국본기에 “시라군始羅郡이 있으며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안라安羅에는 본래 졸본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은 진한 일대에 라羅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더러 있었음을 뜻한다.


더불어 신시본기에 시라尸羅라는 관경이 보이니 고리국의 곁에는 신라新羅가 있었다.


처음 나라를 칭하여 조선朝鮮이라 하고 혹은 삼한三韓이라고 했는데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그 관경이었다. 신시본기>


위 신시본기에 나열된 나라들은 모두가 한반도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고례를 제외한 조선, 마한, 진한, 번한, 고리, 시라, 옥저, 예맥은 모두가 한반도 안으로 들어온 국명들이다. 지명을 더듬어 보면 옛 고리국의 수도는 지금의 서요하 위에 있는 임황이니 지금의 내몽고 파림좌기巴林左旗다.


그리고 주몽 평락 11년 갑오에 고구려에 멸망당한 북옥저는 해성의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동부여는 통하 가섭 연안에 있는 분릉 땅에 있고, 북부여는 웅심산 근처 서란에 있다. 맥貊은 서융과 섞여 살던 동이족을 일컬음이고, 예濊는 원래 구려하 서쪽의 좌원坐原일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시라尸羅의 지명이 동요하 동쪽 일대의 땅을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시라尸羅가 신라新羅일 가능성은 크지만 역사 속에서 좀 더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파소婆蘇는 눈수嫩水에서 도망쳐 지금의 함흥인 동옥저에 이르고 다시 지금의 경주慶州 일대인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으로 도망갔으니 이곳이 훗날 신라의 수도가 된 금성金城이다.


혹 반론反論으로 신라新羅의 수도 서라벌徐羅伐은 북부여의 도읍지였던 서란舒蘭의 벌伐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전북부여前北夫餘의 도읍은 모두가 서란 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 외 중론中論으로 나을촌那乙村의 나을那乙이란 단군세기에 판적을 주관하는 이를 나을이라 하였음으로, 이 나을촌은 나을의 후예들의 촌락으로 진한의 후예가 옳다는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미 정론으로 북부여의 수도는 백악산 아사달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중론은 정론에 반하지 않은 것이며, 반론만이 필자의 의견과 배치된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북부여의 역사가 그 만큼 소략되고 멸실됨이 심함이니 존중하고자 하며, 훗날 우리 민족이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내몽골 일대를 모두 되찾았을 때 반드시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돌이켜 보면 파소가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을 받은 것은 그가 삼한을 호령하는 고두막한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 힘으로 그의 아들 박혁거세는 남진한왕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곧 신라의 기원이다.

[한단고기]가 전하는 박혁거세의 출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공주가 혼인전에 임신을 하여 왕이 내쫓자, 부여를 떠나 낯설고 물 설은 진한(나을촌)으로 가서 아이를 낳았으며, 소벌도리라는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키워 장성하자, 6부 촌장들이 합의하여 신라왕에 추대했다."

이에대해 '삼한비기(三韓秘記)' 구지(舊誌)에는 "박혁거세의 생모는 본래 부여제실(扶餘帝室)의 여자(공주)다"고 했다. 즉, "사로(斯盧: 신라)의 시왕(始王)은 선도산(仙挑山: 경주) 성모(聖母)의 아들인데, 옛 부여 제실(왕궁)의 여자 파소(婆蘇)가 남편없이 처녀 잉태하여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 흑룡강성에 인접한 강, 송하강의 지류)로부터 동옥저에 이르러 또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내을촌(柰乙村)에 이르러… 거서간(임금)이 되고,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진한 또는 사라(斯羅: 신라)라 칭하였다." 

또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壇實記)'에는 "부여제실의 여자 동신성모(東神聖母)인 파소(婆蘇)가 남자와 혼인하지 않은채 잉태하여… 진한 땅에 와서 혁거세를 낳았다… 계림서악(鷄林西岳)에 성모사(聖母祠)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성모는 지선(地仙)이 되고 혁거세는 천선(天仙)이 되었다고 한다.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의 처녀 잉태설을 연상케 한다.


부여공주가 아이를 임신하여 왕궁에서 내 쫓으니 동옥저를 걸쳐 배를 타고 진한가서 박혁거세를 낳았는데, 성장하여 진한6부 촌장들이 왕으로 삼았다는 것이요. 진한은 한반도 남부지역의 마한통치하에 있던 번한,진한 중에서 진한을 의미하는 것이요..번.진한은 진시황의 침략으로 인하여 잡혀가 진시황의 노역을 하던 진조선 유민들이 노역을 피하여 마한지역으로 와서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 터를 잡고 개국한 나라요. 

신라의 기원이 되는 진한에 대하여 [후한서-동이열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 , 次有殺奚, 次有邑借.[1] 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 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 倭 馬韓 從市之. 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飮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 

이를 해석하면,

"진한(辰韓)은 늙은이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도망한 사람들로서, 고된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한반도= # =광개토태왕 군대의 깃발 문양)에 건너가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름하는 것에 나라를 일러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적을 구(寇)라 하고,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며, 서로 일컬을 때는 도(徒)라고 하는 등 진(秦)나라의 말과 비슷한 까닭에, 혹은 이름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즉, 신라는 진시황제에 붙잡혀 노역을 하다가 탈출한 만주지역의 단군조선(진한)유민들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한반도 지역의 종주국이였던 마한에게 지금의 경상도 지역을 이양받아 정착하여 6씨족으로 출발한 진한에서 시작하며, 부여제실의 딸(공주)이 남편모르는 아이를 임신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사자, 동옥저를 걸쳐 배를 타고 진한에 도착하여 낳은 박혁거세를 시조로 삼았으며, 중국한족에게 패하여 한반도 동남부지역으 유입된 흉노족(황남대총 유물들과 흉노석상이 증명) 김알지 세력이 유입되어 석씨 왕조를 일본으로 몰아내고 왕권을 찬탈한 이후 김춘추가 무열왕이 되어 당나라와 연합으로 고구려.백제를 공멸시킨 이래로 경순왕까지 이어진 나라다.

고추모와 박혁거세는 아무런 혈연.친척관계도 아니다!신라는 지금의 경상도 지역 6개 씨족에서 출발한 진한의 후신으로 시조는 바로 박혁거세다. 

[한단고기]가 전하는 박혁거세의 출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공주가 혼인전에 임신을 하여 왕이 내쫓자, 부여를 떠나 동옥저를 거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나을촌)에 도착하여 아이를 낳았으며, 소벌도리라는 사람이 박혁거세를 알아보고 데려다 키웠으며 장성하자, 진한6부 촌장들이 합의하여 신라왕에 추대했다. 

파소의 아버지는 골본부여를 개국한 동명성왕 고두막한이다. 고두막의 손자사위가 되는 고추모에게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고추모부인의 고모님이 되는 것이다.

박혁거세가 진한辰韓을 개국한 것이 갑자년이니 이 때 나이가 13세였다. 반면에 고구려의 고주몽은 23세 때는 계해년에 개국하였으니 갑자년이면 24세가 된다. 

동부여에서 골본부여로 망명 온 고추모가 고무서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골본부여 3대 단군이 되고, 박혁거세는 고주몽보다 10살 정도 어리므로 혁거세의 어머니는 고무서의 딸의 고모뻘이 된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성도산 성모로 잘 알려진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고두막 단군의 딸이자 고무서 단군의 여동생이 된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 파소는 부여황실의 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소婆蘇는 눈수嫩水에서 도망쳐 지금의 함흥인 동옥저에 이르고 다시 지금의 경주慶州 일대인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으로 도망갔으니 이곳이 훗날 신라의 수도가 된 금성金城이다. 진한인들은 서라벌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흉노족(경주 김씨족)이 권력을 잡은 다음에 자신들이 떠나 온 지역인 중국의 금성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걸 신라사관론자들이 구분을 못하고 중국지역에서 신라가 개국했다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흉노족 김왕망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개국한 신나라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15년후에 다시 한족에게 권력을 빼앗긴 흉노족들이 바로 한반도 진한.번한지역으로 들어와 신라와 가야를 개국한 김씨들인 것이다.

혹 반론反論으로 신라新羅의 수도 서라벌徐羅伐은 북부여의 도읍지였던 서란舒蘭의 벌伐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를 근거로 前 북부여北夫餘의 도읍은 모두가 서란 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 외 중론中論으로 나을촌那乙村의 나을那乙이란 단군세기에 판적을 주관하는 이를 나을이라 하였음으로, 이 나을촌은 나을의 후예들의 촌락으로 진한의 후예가 옳다는 주장도 일견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파소가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을 받은 것은 그가 삼한을 호령하는 고두막한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 힘으로 그의 아들 박혁거세는 남진한왕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곧 신라의 기원이다.

출처 : 한국사랑 | 글쓴이 :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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