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자명고 - 낙랑군과 낙랑국을 말하다자명고 - 낙랑군과 낙랑국을 말하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뱃놀이 했을 피서산장 여의호와 낙랑왕 최리가 머물렀을 상제각
좀 더디게 전개되고 있어 지루한 면이 있고,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많은 요소가 삽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자명고라는 사극이 일반인들에게 고구려의 정복군주 대무신왕과 낙랑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고, 많은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사극을 만들면서 모든 것을 역사적 사실만으로 채우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가능하면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그려졌으면 하는 바램은 있다.
대무신왕은 고구려의 3대왕으로서 2대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유리왕의 장자로서 다물후 송양의 큰딸이 유리왕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도절은 일찍 죽었고, 유리왕의 계비 화희가 낳은 둘째아들 해명은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로 도읍을 옮기려 할 때 그를 반대하다가 유리왕으로부터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이때까지도 원비였던 모본호족의 딸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아들을 낳게된다.
대무신왕은 호동왕자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옆을 떠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총애하였다고 하는데, 그 어머니인 갈사왕의 손녀가 언제까지 살다 죽었는지는 역사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극 자명고에서는 갈사왕의 손녀가 일찍 죽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고, 낙랑군 태수를 "폐하"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작가가 호칭에 대하여 잘 모르고 글을 썼음을 알게 해 준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폐하라는 말은 오직 "황제"를 부를 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고, 제후인 왕은 "전하"라고 불렀고, 주(州)에는 지금의 도지사와 같은 자사가 있었으며, 그 아래 군(郡)에는 지금의 군수와 같은 태수가 자리한다.
태수는 중급관리 정도에 해당한다.
덕흥리 고분벽화에서 지금의 도지사 격인 유주자사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사람들이 바로 태수급의 사람들이다.
따라서 전제왕조 시대에 태수를 황제와 동격인 "폐하(陛下)"라고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다른 호칭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자명고에서는 지명을 한반도 내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낙랑군과 낙랑국은 한반도에 있었던 군과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북경 동북쪽인 하북성 승덕시에 위치했었다.
이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사서의 기록들이 있어 그를 알 수 있는데, 지금 갈석산은 한반도 평양 부근에 있는 산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진황도 창려현에 있고, 만리장성 역시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아닌 북경 부근에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 바로 낙랑군의 치소였고, 낙랑국의 왕성이었다.
그리고 이때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은 북경에서 북쪽으로 모전욕장성을 넘어 백하하류 탕하구 부근에 위치했었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 대무신왕은 국내성의 동쪽에 위치했으며, 옛 고조선의 왕검성을 차지하고 있는 낙랑을 차지하려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왕검성을 차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왕검성은 고조선 2천여년 간의 도읍으로서 옛 고조선의 단군들은 그곳에 도읍하고 천하를 호령했고, 위만도 고조선의 준왕으로부터 그곳을 빼앗아 도읍으로 하고 왕위에 올라 동이의 제왕 노릇을 했던 곳이며, 위만조선이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후에는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랑군의 치소가 되었던 곳이다.
왕검성을 차지한 자가 바로 동이의 제왕으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대무신왕은 옛 왕검성을 차지함으로써 동이의 제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마침 중국에서 전한이 사라지고 왕망의 신나라가 서게되고, 다시 신나라가 없어지고 후한이 서는 혼란한 시기가 되었고, 그 혼란을 틈타 낙랑군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최리가 그 땅을 차지하고 국호를 낙랑국이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 범장의 북부여기를 보면, "임신 원년(B.C.169)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삼백석을 해성에 바쳤다. 이에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B.C.195)의 겨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기록의 정확성에 대하여 논란이 있지만 "낙랑왕 최숭"이 언급되고 있고, 위만이 고조선의 왕검성을 쳐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오른 기원전 194년과 시기적으로 일치하고 있어 혹시 이 최숭이 최리의 먼 선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즉 고조선 때 낙랑지역의 제후였던 최숭은 위만조선이 서자 위만조선에 협력함으로써 그 제후의 위치를 유지했으나,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자 최숭의 후손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혼란기를 틈타 최숭의 먼 후손인 최리가 다시 그 낙랑땅을 차지하고 낙랑국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 최리는 왕검성을 차지함으로써 동이의 제왕이 되려는 고구려 대무신왕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지 못했던 것이고, 또 대무신왕의 맏왕비는 어떻게 하든 호동을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호동을 모함하여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출처 : 역사 천재들의 모임 | 글쓴이 : 윤여동 http://blog.daum.net/3002kumsukangsan/8450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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