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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화] 선(仙)-선의 기원

송화강 2019-05-13 (월) 15:10 6년전 12013  

 

선(仙)-선의 기원

 

옛 중국의 지리서에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는 그네들의 동쪽에 '불사국(不死國)'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사국'이란, 말 그대로 죽지 않는 나라라는 뜻이다. 고대 중국인들이 그들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서 이상적인 낙원을 상상했다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사의 전설의 무대가 굳이 동방이었던 이유는 그곳의 무엇인가가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인(仙人)이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전국시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에서 이러한 불사의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동방 불사국 전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진시황 시대부터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따르면 발해 가운데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여러 선인(仙人)과 불사의 약이 모두 그곳에 있다고 한다. 진시황은 선인과 불사의 약을 구하기 위해 서불(徐 )과 수천명의 남녀 어린아이를 삼신산을 찾아 동해(우리의 서해)로 보냈다. 서불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후에도 진시황은 포기하지 않고 선인을 찾기 위해 갈석(碣石)으로 사람을 보내기도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는 약간 다른 기록이 있는데 진시황이 선인을 찾기 위해 서불을 보낸 곳은 동해에 있는 단주(亶州)라는 곳이라고 한다.

 

위의 글은 서기전 199년에서 195년 사이의 일로서 중국에 전하는 선인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위 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선인과 관계된 지역이 모두 고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과 제는 당시 가장 동방에 있었던 나라들로서 이 지역은 원시 시대부터 만주, 한반도 지역과 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연나라는 주(周)의 제일 서쪽 변방에 자리하고 있었고 제나라가 자리하고 있었던 산동반도는 75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개의 커다란 섬에 불과했던 곳이었다. 그러던 것이 황하의 퇴적으로 4500년전에 이르러서야 오늘날과 비슷한 반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 두 지역은 황하 지역 문화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바탕과 일찍부터 있었던 고조선 지역과의 교류가 연, 제 지역에서 동방 불사국에 대한 전설이 성행했던 이유일 것이다. 진시황이 선인을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는 갈석은 고조선과의 국경지대였다. 그리고 <괄지지>에 나오는 단주라는 지역은 자리하고 있는 위치나 단(단군檀君)의 땅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한반도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선인과 불사약이 있다고 생각한 곳은 고조선(古朝鮮)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방에는 선인이 있고 이들은 불사약을 먹어 죽지 않는다는 생각은 그 후에 중국의 도교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들은 불사약을 얻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삼국 양진 남북조(三國 兩晉 南北朝)시대에 크게 유행했는데 불사약이라는 것의 성분이 중 금속과 같이 인체에는 지극히 해로운 것들로서 수많은 이들이 약을 복용하다가 숨지곤 하였다. 결국 불사의 영약은 영영 만들어내지 못했으나 수없이 행한 화학실험의 결과로 과학이 발전하는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선인으로 알려진 가장 앞선 인물은 단군 임검(檀君 壬儉)이다(역사책에는 왕검(王儉)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王儉은 壬儉의 잘못이라는 주장이 있다. 王과 壬은 모습이 매우 비슷할 뿐 아니라 임검이 임금이라는 우리말과 통하므로 위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임검이라고 쓰는 것이 이 글의 내용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므로 위와 같이 쓰려 한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高句麗 本紀) 동천왕조(東川王條)와 사공 조연수(司空 趙延壽)의 묘지명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단군과 선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은 이름이 아니라 국가 지도자의 호칭이다. 단군이란 종교적 제왕이라는 뜻이 들어있는데 종교적 권위가 강했던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하겠다. 구체적으로 하늘이라는 뜻으로 무(巫)당(무는 한자이고 뒤의 당은 우리말이다. 이런 예로 '꼭두각시'가 있다)의 당이나 무당의 다른 이름인 단골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인은 종교적 지도자라는 뜻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있다.

 

우리말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말에 '센'이나 '세이'라는 말이 있는데 모두 무당이라는 뜻이다. 경상도에서는 무당을 '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땅재주꾼을 '아우구산이'라고 하고 줄타는 사람을 '어름산이'라고 한다. 또 무당 가운데 신내림이 잘 되는 사람을 '샤안'이라고 한다. 무당과 광대패를 '사당' '화랭이'라고부르기도 하는데 '사당'은 '사니당'의 준말로서 '사니'란 역시 '선'과 통하는 것이다. 사실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샤먼'이라는 말도 원래 만주말에서 무당을 뜻하는 것으로서 역시 '선'과 소리와

뜻이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만주인들이 원래 우리 겨레와 혈연이나 문화 역사적으로 매우 관련이 깊은 겨레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선인'은 '선'을 이룬 사람이라는 뜻인데 '단군'이라는 말처럼 우리말의 소리를 그대로 두면서 뜻이 어울리는 한자로 표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는 일찍이 선인은 우리말 '선비'의 소리를 적은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일부에서는 고조선의 종교가 곧 단골교(巫敎)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무를 금기시하던 학계의 풍토를 생각한다면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무를 곧 고조선 종교와 사상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 열국 시대의 기록을 보면 무와 선이 결코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를 보면

스승무당(師巫)과 함께 선인(先人, 仙人)이 존재하고 있는데 스승무당은 고조선의 단골(巫)의 전통을 이은 것이고 선인은 물론 선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선과 단골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앞선 시기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농경과 목축을 바탕으로 하여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평등한 사회가 계속되었다. 사유재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재산은 씨족 공동체 소유였다. 이 시기에는 씨족 구성원 모두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평등하였다. 당시의 종교는 만물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조상숭배나 자연숭배 또는 자연시조숭배(토테미즘)등이 있었다. 물론 원시적 형태의 단골도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석기 후기에 일어난 인구증가와 그로 인한 농경지의 감소 등으로 일어난 경제 위기는 최초의 불평등 사회를 낳았다. 경제 위기는 재산사유화를 촉진시켰고 이 때문에 빈부와 신분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 전쟁의 발생을 들 수가 있다. 전쟁은 지도자의 권위를 빠르게 강화시켰다.

 

이 시기에 종교적 권위자도 출현하였다. 그 전에는 모두 신 앞에 평등하였으나 이제는 보통 사람들 보다 신에 가까운 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이나 점을 치고 이를 풀이하는 점복인, 그리고 신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단골(무당)등이었다. 이제 사람들이 신을 만나고자 할 때에는 이들을 거쳐야만 했고 이들의 권위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종교와 정치는 사실 구분이 어려우며 실제로 정치 지도자가 종교 지도자를 겸하기도 하였고 서로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권력을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매우 높은 신분이었으나 후에 정치 권력이 강화되면서 그들의 권력을 정치 지도자에게 빼앗기거나 정치 지도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제사장이나 점복인들은 단골과 달리 근본적으로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신분 분화 과정에서 종교적 의례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를 세습하고 있을 뿐 이었으므로 단골처럼 신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능력은 없었고 다만 종교의례를 통해 신의 뜻을 간접적 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제사장류의 사람들은 간접적이나마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신을 위하여 의례를 발전시키고 여러 자연 현상에서 신의 뜻을 읽어내야만 했다. 게다가 이러한 것들은 교육을 통하지 않으면 후대에 이어질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후손들에게 자신들이 익힌 바를 전해주어야만 했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일들을 단골이 겸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이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모두 위와 같은 이들의 성격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단골은 그들의 특수한 능력으로 치병이나 예언 등의 일에 치중하게 되었고 제사장류의 사람들은 비록 본질적으로는 종교 행위였지만 그 사회의 모든 문화를 정리하고 발전시키며 후대에 전하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곧 선인의 뿌리였다. 선인은 고조선의 건국 이후 더욱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었을 것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와 <화랑세기>에 따르면 화랑은 원래 신을 받드는 제사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선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또한 김대문이 <화랑세기>에서 어질고 충성스런 신하와 빼어난 인재, 훌륭한 장군과 용맹한 병사가 모두 화랑에서 나왔다 함은 화랑이 단순히 종교 집단에 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인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선인과 단골은 모두 고대에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던 신분이었다. 이들은 모두 단순한 종교 지도자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겨레의 다양한 정신적 유산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발전시키고 후대에 전수하였다. 그러나 선인은 단골에 비하여 종교적 기능이 약했으며 그 때문에 지식인적 성격이 강 하였다. 때문에 이들을 우리 겨레 최초의 선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산해경>

 

김영주, <신기론으로 본 한국미술사>, 도서출판 나남

신채호, <조선 상고사>

윤내현, <고조선 연구>, 일지사

윤내현,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 삼광출판사

조흥윤, <무와 민족문화>, 민족문화사

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이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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