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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한족의 기원 (김상기.이중재)

송화강 2019-05-13 (월) 14:46 6년전 12364  

 

한족(漢族)의 기원 (김상기.이중재)

 

김 상기(金庠基) 박사는 「중국고대사강(中國古代史綱)」(보문각 刊)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1)

서전(瑞典)인 안더손(J.G. Andersson)씨가 일찍이 중국정부 농상부 촉탁으로 지질조사를 하다가 1921년

하남성 앙소촌에서 유적을 발견했다.

앙소문화기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은 소위 채색 도기인데 이 시대 문화기를 채도 문화기라 한다.

이 때의 석기는 대부분이 마제석기로 신석기 시대 말기의 문화이다. 

이러한 채도문화는 화북일대에 발달하여 멀리 하투(河套:오르도스)·열하·봉천 등지에 까지 미쳤던 것이 근래

각지의 발굴로 말미암아 시인케 되었으며 또 이 채도는 토이기사탄(土耳其斯坦:투르키스탄) 방면과 남 러시아

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계통의 것으로서 서방으로부터 전파된 듯 하다.

2)

1923년에 리상(E. Licent), 샤르뎅(Chardin) 양 신부가 수원(綏遠)·영하(寧夏) 등지에서 지질조사 할 때에

하투(河套)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을 발견했는데 이 문화가 바로 구석기 시대 중기에 속하는 하투 문화이다.
  
3)

1926년에 스단스키(O. Zdansky)가 주구점에서 고인류 치아하나를 발견했는데 이것이 중국 원인(遠人)

북경종으로 밝혀졌다.

4)

1933년 주구점 산정동에서 구석기 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平ㅗ� 사람』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이 발굴

되었다. 이로써 중국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시대 연구의 근거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인종적으로 보면 한(漢)족과 중국원인(遠人)과의 관계는 미지수에 속하는 것이어니와 앙소문화기의

것은 인종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후세의 한(漢)족과 어느 정도까지 관련을 가진 것만은 의심치 못할 일이라

하나니 이러한 견지로 본다면 한(漢)족은 적어도 황하유역에서 신석기 시대의 어느 단계를 경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상고 중국문화는 황하유역에서 일어났으며 또 그 곳에서 틀이 짜이고 도야된 것이어니와 이 문화를 일으킨

한(漢)족의 기원은 아직 미지수에 속하는 것이다.

김 상기는 서양학자들이 주장하는 서방 기원설을 억측이라 말하고 그 이유로 한(漢)어가 단철도서어(單綴倒 

語)로서 서장 및 인도지나어와 관련을 가졌으므로 한(漢)족 만을 고립적으로 떼어 서쪽에서 이주해 왔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들 조상이 다른 곳에서 왔다는 전설조차 없으므로 한족은 분명히 황하유역에서 주위의 동이 제족과

끊임없는 쟁투, 혼혈 등의 민족 정제과정을 통해 성장 도야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지나족의 유래를 설명한다.

-한(漢)족은 부단히 사위(四圍)의 여러 족속과 혼혈 융합의 과정을 밟아 성장·발전을 하였던 것으로 믿나니

황하유역 일대를 터전으로 한 한(漢)족은 유사 이후에도 끊임없이 사이(四夷) 즉, 
동이·서융·남만·북적과 충돌, 교섭하는 사이에 그들을 흡수하고 또는 동화를 시켜 민족적으로 또는 영역적으로

발전·팽창의 도정을 밟아왔던 것이다. 

남만(이 南蠻도 뒤에 설명하겠지만 동이 제 족의 하나다:필자) 가운데에는 여러 종족이 있으나 묘(苗)족과

월(越:월이 있던 절강성 항주 부근은 고려도경이 증거하고 있듯이 동이족 땅이다:필자)족이 가장 저명한 것

이다. 

묘족은 지금 호남, 호북, 강서 일대에 분포되었던 족속으로서 태고 이래로 한(漢)족과의 충돌이 끊임이

없었다.

그리하여 치우(묘족의 추장)의 전설과 순(舜)이 삼묘를 삼위(三危:감숙·돈황의 동남)에 쫓아냈다는 설화가

전하거니와(尙書 帝典) 주대에 이르러서도 호남·호북 지방에 형만(荊蠻) 또는 형초(荊楚)가(동이족인 묘족의

계통) 세력을 펴고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초(楚:초는 동이 제 족이다 뒤에 따로 설명하겠다:필자)가 일어났는데 전국시대에도 중원

(북방) 사람들은 초를 가리켜 남만(南蠻)이라 하여 심히 경시하고 모멸하였던 것이니
맹자도(膝文公篇) 초인 허행(許行:農家)을 가리켜 "남만격설지인(南蠻 舌之人:격은 때까치로 격설은 남만의

말이 때까치 처럼 알아들을 수 없다는 한인들의 비아냥 단어)" 즉, 남만의 격조( 鳥)처럼 지저귀는 사람이라

한 것으로도 당시의 사정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秦)도 서융 사이에서(지금의 섬서성 서부) 일어나 중원 사람들로부터 융적의 대우를 받았던 바 전국

시대에 효(孝)공이 일어나 부강의 실적을 올린 결과 마침내 태행산 동쪽의 여러 나라와 겨루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동남에 있어서는 산동 반도의 연안지방으로부터 깊숙이 사수(泗水)·회수(淮水) 유역에 분포된 동이

(東夷)는 본래 중국대륙의 북쪽 변두리로부터 동으로 이동할 제, 

한 줄거리는 발해의 북안지방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로 진출하고, 한  줄기는 발해의 서쪽 해안선을 타고 내려

가 산동반도·회(淮)·사(泗) 유역으로 진출 분포케 되었던 듯 하다.

이 산동 내지 강소·하남의 동부 일대에 분포된 종족을 가리켜 동이(東夷)라 하였던 바 이 동이 가운데에는 래이

(萊夷)·엄(奄)·회이(淮夷)·서융(徐戎) 등이 가장 세력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은상시대에 자주 동이와의 교섭과 충돌이 있었으며 주(周) 초에도 강태공 여상을 영구(營丘:제)에

봉할 때에 래이와 토지를 다투었고 관숙, 채숙, 무경 즉, 소위 3감(監)의 난이 일어날 때에도 

엄(奄)을 비롯한 동이가 이에 가세하여 주실을 괴롭혔으며 주공의 아들 노(魯)공 백금때에 회이(淮夷), 서융

(徐戎)이 노를 공벌하였고 선(宣)왕 때에도 대규모로 회이·서융을 주 왕실을 정벌한 일이 있는가 하면, 춘추

시대에 서언(徐偃)왕은 36국을 복종케 한 천자국이었다. 

그러나 이 중국 동부지역의 동이족은 뒷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회사이(淮泗夷) 즉, 회수 사수 유역의

동이를 모두 분산시켜 민호(民戶)로 만들어 버렸다.-


이상에서 간단히 알아본 바와 같이 김 상기의 고대 상고사의 핵심 줄거리는 임 혜상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게

짚어내고 있으며 서 량지(徐 驪�)의 사관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 상기는 지나족의 본령이 동이 제 족의 부단한 투쟁과 혼혈로 개량된 민족임을 그 윤곽만 짚어내고 있지만

뒤에 상세히 밝히겠지만 대만의 서 량지는 밝히기 어려운 지나족의 신분으로 양심적으로 상고사의 본질을 왜곡

시키지 않고 아주 상세하고도 종합적으로 모든 학문적 전거를 바탕으로 여과 없이 밝혀주고 있다. 

위에서 김 상기는 맹자가 언급한 격설지인( 舌之人:격은 때까치로 격설은 때까치처럼 알아들을 수 없다는 말)

이란 말을 언급했는데 여기에서 잠시 새 토템의 조 도등족 조이(鳥夷)를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후한서」<도상전(度尙傳)> 주(注)에 이르기를 조어(鳥語)는 말소리가 새소리와 비슷하다는 뜻이라 했다.

조이(鳥夷)는 새 잡아먹기를 잘하고 새 깃털을 옷의 꾸미개로 삼기를 좋아했다. 

얼마 전 뚠황의 막고굴에서 발견된 상고시대 동이민족의 머리장식에는 새 깃털이 분명히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 적이 있다. 

또 새를 잡을 때에는 온갖 새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어 새를 그물 속으로 꾀어 잡아들이거나 활, 화살로 새를

쏘았다. 

오늘날까지 중국 동북쪽의 옛 동이족의 한 갈래에 속하는 악륜춘족(鄂倫春族:오로촌족[Orochon])과 악온극족

(鄂溫克族:에벤키족[Evenki])은 아직도 사슴을 잡아죽이기 위해 사슴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어 꾀어내고 또 새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어 새를 꾀어낸다. 

알래스카 에스키모 인들은 새총으로 새를 쏘고 또 몇 개의 긴 줄로 줄 한 묶음을 만들어 '포라(波拉)'라 부르며

낱낱의 줄 끝에 돌맹이를 동여매는데 쓸 때는 먼저 줄을 빙빙 돌린 뒤에 새를 향해 던져서 새를 감기게 한다. 

이러한 사냥의 방법에 대한 기록은 「상서(尙書)」<순전(舜典)>에 '(순)제가 말하기를 누가 나의 상하 초목

조수(鳥獸)를 순하게 돌볼 수 있겠소. 여러 사람이 이르기를 익(益)입니다. (순)제가 이르기를, 그러하다.

익이여, 너는 나의 우(虞:산택을 다스림) 관직을 맡으라.' 순이 익으로 하여금 조수를 잡게 했다. 

「한서지리지」에 이르기를 '백익이 조수를 잘 알았다' 했으며, 「후한서」<채옹전(蔡邕傳)>에 이르기를

'백예(伯 :益)는 새소리를 모두 알아들었다'고 했다. 

익(益)은 조수를 잘 길들일 뿐만 아니라 조수의 특성을 알았으며,  또한 새소리를 알아들었다. 춘추시대 노나라

의 공야장(公冶長)도 새소리를 알아들었을 뿐 아니라, 또한 나뭇잎, 띠의 대, 대나무와 뿔 따위로 피리를 만들어

온갖 새소리를 불었다. 

「상서」왕숙(王肅)의 주(注)에 이르기를 '동쪽 먼 데 있는 조이(鳥夷)를 달리 우민(羽民)이라 부른다' 했는데

조이는 새의 깃털로 옷의 장식품을 만들기 때문에 우민(羽民)이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손작운(孫作雲)의 「설우인(說羽人)」에도  이 습속이 설명되어 있다.「원화성찬(元和姓纂)」에 이르기를,

'조속(鳥俗)씨는 백익(伯益)이 순임금을 섬기며 조수를 기른 공이 있어 조속씨 성을 사성했다' 했다. 

양관(楊寬)의 「상고사도론(上古史導論)」에 이르기를, '백익은 전설 속에서 현조(玄鳥:은상의 시조 설의

어미 간적과 관련된 그 현조임을 기억)의 후예로 조수를 잘 길들였으며, 그의 후예에 또 새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는 이가 있었다. 그와 새의 관계는 이처럼 밀접하다'고 했다. 

고힐강(顧詰剛)의 「상서연구강의(尙書硏究講義)」에 또 이르기를, 익(益)은 연(燕)이고, 또 현조이다. 현조

(제비)는 본디 동방 민족이 숭배하는 신령스러운 새로 신화속에서 조수의 우두머리라 하였다. 

「사기」 <진본기>에 이르기를 '대비(大費)가 대렴(大廉)을 낳았는데 그가 조속씨(鳥俗氏)이다.

대렴의 현손이 맹희(孟戱)·중연(中衍)인데 새의 몸에 사람의 말을 했다.

상(商) 왕 태무(太戊)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들에게 수레를 몰게 했다' 했다. 

율곤 이중재는 삼묘족이 본래 동이족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苗族과 한民族


묘족(苗族)이란 최초의 사람 즉 씨앗인 사람을 말하며, 혈족(血族), 일족(一族)이란 뜻이다.
약균(若菌)에 의해 인간이 생겨났다고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서는 밝히고 있다.

사람은 본래 바다에서 생겼다. 즉 바다에 있던 작은 곰팡이 균에 의해 사람이 생겨났다. 이 곰팡이 균이 점차로

얽혀 무리를 지었고, 다시 큰 무리로 형성되어 갔다.
그 약균에서 성인(聖人)이 태어났다. 
성인은 서인(庶人)을 낳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淮南子 墜形訓卷四 65쪽).

역대신선통감에서는 오황로(五黃老:水精子 赤精子 黑精子 靑精子 黃精子)가 태초에 태어나 만물이 생기고

인간이 탄생했다고 적고있다(歷代神仙通鑑卷一).

묘족은 이상과 같이 어두운 암흑 시대에 탄생되었으므로 씨족, 또는 씨의 종족이란 뜻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럼 묘족은 언제 어디서 출현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사기 권일(史記卷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남만(南蠻)은 삼위산(三危山:감숙성 돈황현 남)에 살던 삼묘족이 옮겨와 변한 것이다. 삼위산은 서쪽에 있는

산이다. 
괄지지에 의하면 삼위산은 그 산에 있는 봉우리에 연유되어 삼위라고 했는데, 비우산이라고도 한다.

감숙성 사주(沙州) 돈황의 동남 30리에 있다.
  신이경에 의하면 광활한 서쪽 지방에 얼굴과 눈 손발이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형상으로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있으나 능히 날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탐하거나 음란하거나 무리함에 빠지지 아니했는데,

그들을 묘민이라 했다.

  또한 산해경 대황북경에 의하면, 흑수의 북쪽에 날개 달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묘민이라 했다.

이들이 변해 서융이 되었다. 

  곤( :요임금 숙부로써 치수에 실패)은 우산에서 죽임을 당했다. 마융이 말하기를 극( )은 주(誅)를 말한다.…

(史記卷一 漢太史令司馬遷撰五帝本紀第一)

묘족은 위 문장에서 보는바와 같이 곤륜산 끝머리에 있는 돈황에 묘족들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고지족이다. 지금은 광서성(廣西省)의 상수(湘水) 검강(黔江) 일대의 오지에 살고있는 묘인들을 일컫는다.
  고지족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묘족(苗族), 요족( 族), 여족(黎族), 만족(蠻族), 이족(夷族), 북족( 族), 동족( 族), 요족( 族), 힐로(  ),

노이(怒夷), 라라(  ), 출이, 중가(仲家), 용가(龍家).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구려(九黎)와 삼묘(三苗)의 후예들이다. 

  지금 중국의 복건성과 절강성에 흩어져 살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이며, 물가나 산중에 흩어져

살고있는 이들도 역시 상고 때의 그들의 후예들이다. 한(漢)나라 때 산을 넘어왔으므로 태서인(泰西人)이라

하는데, 모두 깊은 산중이나 계곡의 동굴 등에 살았으므로 고지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음은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 있는 삼묘족(三苗族)에 대하여 찾아보기로 한다. 묘족(苗族), 여족(黎族),

또는 구려(九黎), 삼묘족(三苗族)에 관해서는 문헌이 방대하다. 일일이 찾아 기록하려면 책을 한권 써야 할 것

같지만 본문에서는 간략하게 묘족의 발생과 시조(始祖), 그리고 한民族과의 연관성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附九黎三苗. 苗民謂九黎之君也. 九黎之君於小昊氏衰. 而棄善道. 上 蚩尤重刑. 必變九黎言

苗民者. 有苗九黎之後. 顚頊代小昊誅九黎. 分流其子孫爲居於西裔三苗. 至高辛之衰. 又復九

黎之惡. 堯興又誅之. 堯末又在朝.(林惠祥著 中國民族史 上 第五章 荊吳系 漢族來源之三 附

九黎三苗 本文 100쪽)

  구려와 삼묘를 보자면, 묘민은 구려군을 말한다. 구려군은 소호(小昊:黃帝의 아들)가 쇠할 무렵 선도를 포기

했으므로, 본보기로 치우는 중벌을 받았다.

  구려가 변해 묘민이 되었다. 묘는 구려의 후에 생겨났다. 
  전욱의 대에 이르러 소호가 구려를 죽이자, 그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서쪽으로 간 후손들을 삼묘라 한다.
  고신씨(高辛氏:요임금의 아버지)가 쇠퇴할 무렵 다시 구려가 일어나 악행을 일삼자 요(堯)가 일어나 그들을

주살했다. 그러나 요(堯) 말기에 다시 흥기했다.


삼묘(三苗)와 삼위산(三危山)의 관계에 대해서는 요전(堯典), 산해경(山海經), 우공(禹貢), 한비자(韓非子),

관자(管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여형(呂刑), 무봉림(繆鳳林) 등 많은 사서(史書)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묘족(苗族)의 시조는 누구인지 고찰해 보기로 한다.

  신시개천경(神市開天經) 본문에 놀라운 글귀 한 대목이 있다.


下視三危太白. 三危山名. 非今外興安嶺也. 又非今文化九月山也. 乃今支那甘肅界燉煌縣所

在之三危山也. 本黎苗祖盤古. 初降之地是也.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았다. 삼위산은 지금의 흥안령이나 문화구월산이 아니다. 감숙성 돈황현에 있는 삼위산

이다.  여묘(黎苗)의 조상은 반고한인(盤古桓仁:有神氏 渾沌氏 盤古氏 桓仁氏 桓因氏 등으로 호칭했다)이다.

그가 처음 내려온 곳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71쪽을 참고해보기로 한다.


犬戎國. 春秋時夷國. 亦名 夷. 又名昆夷在今陝西鳳翔縣北. 漢書注引山海經. 黃帝生苗龍.

苗龍生融吾. 融吾生弄明. 弄明生白犬. 白犬有二牝牡. 是爲犬戎.


  견융국(犬戎이란 白犬의 대명사이다. 백견은 본래 氷夷라 했으며 馮夷 또는 河伯이라 한다)은 춘추 때의 이국

(夷國)이다. 견이라고도 하며 곤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 북쪽에 있었다.

  한서에서 산해경을 인용해 이르기를, 황제는 묘룡을 낳았고, 묘룡은 융오를 낳았으며, 융오는 농명을 낳았다.

농명은 백견을 낳았는데, 백견의 무리들이 모여 견융국이 되었다.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十干十二支之神將與空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君謂之諸 是謂盤固可汗也.

십간 십이지의 신(神)과 더불어, 공공씨, 유소씨, 유묘씨, 수인씨 등은 모두 삼위산에서 나무집을 짓고 살거나 동굴

속에 살았던 군장들이다. 이들 견이( 夷)들의 수장은 한국(汗國)의 시조하고 할 수 있는 반고(盤固)이다.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7쪽에는 이전원(伊甸園:에덴 동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伊甸園. 依創世紀說本來就吊方. 而塔里木盆地. 事實上恰該便是伊甸園所在的東方. 中略.

焉耆之東.

이전원은, 창세기설에 의하면 본래 동방에서 유래되었다. 즉 탑리목분지이다. 실재적으로 이전원은 동방에

있었다…언기의 동쪽이다.

언기는 전술한바와 같이 신강성의 천산산맥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언기(焉耆)가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가르는 지점이라는 뜻이다.

언기의 동쪽은 조선의 땅이었다. 하지만 서쪽도 그 옛날 한국(汗國 桓國 韓國)이었음을 잘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묘족(苗族)의 최초 시조는 반고한인(盤古桓因)이다.
  환인(桓因)의 묘족은 삼묘(三苗)로 나누어진다. 
  한(桓)·한(韓)·한(漢)이다. 삼묘(三苗)의 한(桓)·한(韓)·한(漢)은 후에 한(汗)으로 글자가 바뀌어졌다.

신라의 거서간(居西干)·마립간(麻立干)이라든지 몽고의 성길사한(成吉思汗:칭기스칸)이 그러하다.

  한은 최초로 일(一)에서 시작되었다. 
  일(一)이란 하늘 천(天)이며, 태극의 본체다. 그러므로 태극은 일(一)이며 하늘이다.
  태극(太極)에서 일(一)로, 그리고 간(干), 후에 천(天)으로 발전됨을 알 수 있다.

  천(天)은 건(乾)·간(幹)과 통용한다. 
하늘을 지칭하는 글자를 통칭하는 것이 한(汗)자이다. 사서(史書)에 한(桓)자로 나오는 것은 별로 없다.

한(韓) 아니면 한(漢)이며, 그후에 나온 것이 한(汗)이다.

  한자(漢字)는 한 일(一), 두 이(二), 석 삼(三)에서 음양(陰陽) 배합, 오행(五行)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수·목·화·토·금(水木火土金)의 순서는 옥편을 이루는 뿌리와 같다. 그런 뜻에서 출발한 것이 한民族의 사상이다.

  한인씨(桓因氏) 때부터 목덕왕(木德王)이라 별칭한 것은 최초로 시작되는 인간의 정사(政事)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묘족(苗族)에서 삼묘(三苗)로, 삼묘(三苗)에서 구이(九夷)로 갈라져 나갔다. 구이(九夷)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한다.

  해동역사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東夷有九種. 曰 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後漢書>

  동이에는 아홉 종족이 있었다. 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중국 동북(東北) 쪽에 구이(九夷)가 있었다.
  상고시대에는 견이( 夷)·우이( 夷)는 우이(于夷)에 속했으며, 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

현이(玄夷)·남이(藍夷)는 풍이(風夷)에 속했다. 그리고 양이(陽夷)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海東繹史 卷第一世紀一東 總紀 韓致奫著).


단군조선 제1기 제1대 반고한인으로부터 44대 62씨 5,038년간은 평화시대였다.

단군조선 제2기는 25대 101씨를 거치게되는 1,468년간은 전화의 소용돌이가 심한 시대였다. 변화의 조짐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 파란이 많았고 사람들의 이동이 심한 복잡한 사회구조로 변해가던 시대였다.

단군조선 제3기로 접어들자 요(堯, 이름은 放勳 또는 中華)임금의 등극으로 사회가 안정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하(夏)나라 때 흉노(匈奴)·북적(北狄)·북융(北戎)이 잇따라 생겨나게 되고, 사회는 또다시 혼란의

조짐이 나타났다.

은(殷)나라 때에 이르러 36국이란 나라가 도처에 진을 치게 되었다. 그리고 주(周)나라가 들어서자 약 2백 국

이라는 소국(小國)이 난립하게 되고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묘족(苗族)은 삼묘(三苗)로, 삼묘(三苗)는 다시 구이(九夷), 구이(九夷)에서 팔적(八狄)·칠융(七戎)·육만(六蠻)

으로 갈라지면서, 인구의 팽창은 가속화 되었다. 그에 따라 한民族의 조상인 묘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묘족은 일(一)자 성에서 갈라져 많은 성씨를 타고 내려왔으며, 복희씨 때에 이르러 성씨는 희(姬)

씨로서 40개 나라 이상 뿌리를 이어 내려왔다. 그리고 희(姬)성의 형제 나라가 15국이었으며 제후국은 70여개

국이었다. 이외에도 소왕국은 1천8백국이라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같이 본다면 한인(桓因)의 나라 한국(桓國) 즉 정통국(正統國)ㅇ[사브타 한웅(桓雄)이었던 유소(有巢)한웅

으로 이어지면서 묘족의 뿌리는 한없이 뻗어나왔다(역대신선통감 제4 제8절 참고)

묘족의 맥을 이어준 사람은 황제(黃帝)였다. 
황제가 용묘(龍苗)라는 사실은 역대신선통감에 잘 나타나 있다. 용묘의 시조는 반고한인이다. 
대대로 선(禪)을 통한 사람이 대통을 이어 내려오는 것이 상례였다. 왕의 아들이나 군신(君臣)이 아닐지라도

선(禪)을 통한 사람이면 대권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묘족은 한民族의 선조이며, 한민족의 뿌리는 묘족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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