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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단군성조를 찾아서

송화강 2019-05-07 (화) 12:33 6년전 12748  

단군성조를 찾아서


(1)단군은?-(2)단군과 고조선-(3)고조선의 출현-(4)단군신화와 고조선-(5)허구와 역사

-(6)민족사의 기원-(7)단군고토의 수복을 위하여-(8)북한의 단군릉-(9)일본의 역사왜곡


 (1) 단군(檀君)은 누구인가 ?


환인(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농경 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바람, 비, 구름을 각각 주관하는 부하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곡식, 생명, 형벌 등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가지를 주관하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 그곳에 살던 곰이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곧 단군 왕검이다.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삼국유사 中에서>


웅녀와 결혼한 신의 아들이 우리의 시조라는 단군신화. 고조선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통치 이념 및 역사 의식 등을 담은 고대사적 사료로 무궁한 가치를 지닌 단군신화는 유사 이래 민족공동체에 대한 선조의 열망을 수용하면서 민족 자긍심의 상징으로 작용해 왔다.


단군신화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에 전하는데, 각각의 구체적인 내용은 책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중에서 단군신화를 담고 있는 현존의 기록 중 가장 오래된 책인 『삼국유사』의 것이 가장 고졸한 모습을 띠고 있다. 오늘날 일반인이 익히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은 바로 『삼국유사』에 실린 것이다.





 (2) 단군과 고조선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군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세력이 강한 군장은 주변의 여러 사회를 통합하고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갔다.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단군왕검(檀君王儉)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한다(B.C.2333).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단군의 건국에 관하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나타나고 있다. 천신의 아들이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하는 단군 건국의 기록은 우리 나라 건국 과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홍익인간의 이념을 밝혀주고 있다.  이것은 또 고려, 조선, 근대를 거치면서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마다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였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군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로까지 발전하였다고 보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의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 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지역과 거의 일치[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 짓는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나 미송리식 토기 등이 나오는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한편, 동이족의 분포는 고대의 한민족이라 할 수 있는 예, 맥, 부여, 고구려, 북옥저, 읍루 등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하고 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요소는 후대로 가면서 새로이 첨가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된 속성의 하나로서,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단군의 기록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사유 재산의 성립과 계급의 분화에 따라 지배 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의 사회 생활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는 것도 새로운 질서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진적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여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단군은 제정 일치의 지배자로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즉, 각 부족 고유의 신앙 체계를 총괄하면서 주변 부족을 지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조선은 초기에는 요령 지방에 중심을 두었으나. 후에 와서 대동강 유역의 왕검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고조선의 발전과 관련하여 기자 조선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사서에는 주(周)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대를 B.C. 12세기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 조선을 조선의 발전과정에서 사회 내부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또는 동이족의 이동과정에서 기자로 상징되는 어떤 부족이 고조선의 변방에서 정치 세력을 잡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조선은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세력이 약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B.C 3세기경에는 부왕(否王), 준왕(準王)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相), 대부(大夫), 장군(將軍)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하를 경계선으로 하여 중국의 연(燕)과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  위만의 집권


  중국이 전국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안배하여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하여 왔다.  그 중 위만은 무리 1000여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처음에 준왕에게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거주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며, 그 뒤에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 때 위만은 그곳에서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 [위만은 입국할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나라에서 살던 조선인으로 생각된다.  위만은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를 사용함으로써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이 더욱 성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예(濊)나 남방의 진(辰)이 중국 한(漢)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한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한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의 무력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완강하게 대항하였으나, 마침내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B.C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드디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313)


 고조선의 사회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 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상처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하게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사회에서는 생명과 사유재산을 중히 여기고 보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은 당시 사회에 권력과 강제력에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을 수치로 여겨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아 문을 걸어 둘 필요가 없었다고 하며, 여자는 정절을 귀중하게 여겼다고 하는 데에서 가부장제적인 가족 제도가 확립되었음도 알 수 있다.

  한의 군현이 설치되어 억압과 수탈을 가하게 되자, 토착민들은 이를 피하여 이주하거나 단결하여 한 군현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 군현은 엄한 율령을 시행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법 조항도 60여 조로 증가하였고, 풍속도 각박해졌다.

  

  

  

   (3) 고조선의 출현 (민족사화의 이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실린 단군 신화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천제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세상에 뜻을 두거늘, 환인이 내려다 보니 삼위산과 태백산이 <홍익인간> 사상을 펴기에 알맞는 곳인지라 천부인 3개를 주고 환웅을 지상에 보내어 인간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와 그 지역을 신시라 이르니 이 사람을 환웅천왕이라 부른다. 환웅천왕은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 . 명 . 병 . 형 . 선 . 오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였다. 그때 같은 동굴 속에 살던 곰 1마리와 호랑이 1마리가 환웅천왕을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환웅은 영험한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고 그것을 먹고 햇빛을 100일 동안 보지 말도록 하였다. 곰은 그것을 지켜 37일만에 여자가 되었으나 호랑이는 지키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그 후 곰녀가 신단수 아래서 잉태하기를 기원하므로 환웅천왕이 사람으로 가장하여 그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후에 호를 단군왕검이라 칭하고, 중국의 요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개국하여 국명을 조선이라 일컬었다."


위의 단군신화 내용에서 몇 가지의 사실을 밝혀볼 수 있다. 먼저 사상적인 면을 보면 전체 줄거리가 하늘 . 땅 . 사람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하늘의 환인, 땅의 곰, 사람의 단군이다. 그리고 이 3가지 요소를 환웅을 통해서 결합시키고 있다. 이것은 한민족이 하늘 . 땅 . 인간의 삼위일체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단군신화가 위 3요소 가운데 하늘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져 있는 것은 한민족의 중심사상이 하늘을 숭배한 것이었음도 알게 한다. 한민족은 옛부터 스스로를 <천손족>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하늘을 숭배했던 종교사상에서 연원한 것이었다.

단군신화는 인간의 출현에 대한 설명도 하고 있다. 인간인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지상의 곰의 교합에 의하여 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출현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과 동물의 교합에 의한 것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신에 의한 창조론과 동물로부터의 진화론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것은 한민족의 합리적인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단군신화에는 한민족의 종교사상 . 정치 사상 . 사회 사상도 압축해서 나타나 있다. 그것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이다. 또 한민족의 의약에 대한 관심도 나타나 있다.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먹도록 권한 쑥과 마늘은 한민족이 오랫동안 약재로 전승 . 사용해 온 것이다. 이 내용에서 한민족은 먼 옛날부터 쑥과 마늘을 중요한 약재로 믿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도 담고 있다. 신화는 시간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확장하여 단군신화를 시대에 따라 나누어 보면 환인시대, 환웅시대, 환웅과 곰녀의 결혼시대, 단군시대 등 4단계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한민족의 사회발전과정과 동일하다. 이해의 편의상 맨 나중의 단군시대부터 살펴보자.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했으므로 단군시대는 고조선시대로서 국가사회 단계이다.   환웅과 곰녀의 결혼시대는 부락 연맹체 사회 단계이다. 고대에 각 부락들은 대체로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다. 부락들이 연맹체를 형성할 때 그들의 수호신들도 연맹을 맺게 되는데 가장 강한 부락의 수호신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종교적 . 사상적 중심이 된다. 환웅과 곰녀의 결혼은 하늘을 숭배하던 부락과 곰을 숭배하던 부락이 연맹체 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들의 수호신이 상징적으로 신화상에 남은 것이다. 실제로는 호랑이숭배 부락을 포함한 많은 부락들이 연맹체를 형성했겠지만 신화의 내용이 압축되는 과정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하늘숭배 부락과 곰숭배 부락의 수호신만이 신화상에 남고, 다른 부락의 수호신들은 탈락되었던 것이다. 이 부락연맹체사회의 중심이 되었던 세력은 하늘을 숭배했던 환웅 부락이었다.


환웅시대는 부락사회 단계이다. 부락사회는 농경을 기초로 하여 정착생활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짐은 앞에서 이미 밝혔다. 단군신화의 환웅에 관한 내용은 농경사회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환웅이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물 등 360여 가지의 일을 관장했다는 것이다. 환웅이 관장한 업무에 곡물이 맨 먼저 등장한 점은 당시가 곡물을 매우 중요시한 농경사회에 진입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풍백 . 우사 . 운사는 기후와 관계가 있는 것인데 농경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람 . 비 . 구름 등을 신으로 섬겼다. 따라서 풍백 . 우사 . 운사의 등장도 당시가 초기 농경사회였음을 알게 한다. 초기 농경사회는 바로 부락사회였던 것이다.


환인시대는 무리사회 단계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인시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그를 천제로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그 사회성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부락사회 이전 단계는 무리사회 한 단계밖에 없다. 그러므로 환인시대는 무리사회에 해당될 수밖에 없다.


이상의 보듯이 단군신화는 환인시대는 무리사회 단계, 환웅시대는 부락사회 단계, 환웅과 곰녀의 결혼시대는 부락연맹체사회 단계, 단군시대는 국가 사회(고조선) 단계로서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를 고고학 자료와 연결시켜 보면 환인시대는 1만년 전 이전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환웅시대는 1만년 전 후부터 6천여년 전까지의 전기 신석기시대, 환웅과 곰녀의 결혼시대는 6천여년 전부터 4천3백여년 전(서기전 2천3백여년)까지의 후기 신석기시대, 단군의 고조선시대는 서기전 2천3백여년 전부터 서기전 2세기 말까지가 된다. 단군신화는 실로 한민족의 종교 . 사상 . 의약 . 역사적 체험을 총합적으로 담고 있는 민족사화인 것이다.


단군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고조선은 단군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므로 환인 . 환웅 . 환웅과 곰녀의 결혼 등에 관한 내용은 고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의 사회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대부분은 고조선 이전의 시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종래에는 단군신화의 전체 내용이 고조선시대의 사회상을 말해 주는 것으로 잘못 파악하여 고조선을 실제보다 훨씬 낮은 사회 단계였던 것처럼 인식하였다. 예를 들면 환웅이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물 등을 관장한 것은 그 사회가 초기 농경사회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므로 고조선은 초기 농경사회, 즉 고고학적으로는 신석기시대에 해당된다고 보는 견해가 그 예다. 이것은 단군신화를 시간적 관념이나 전후관계에 대한 분석 없이 해석함으로써 일어난 잘못이었던 것이다.




  (4)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산물


단군신화를 이해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과연 그것이 고조선 대에 형성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단군신화가 고려 후기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이들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의문의 출발점은 『삼국유사』가 13세기에 쓰인 사서라는데 있다. 고조선이 기원전 2세기에 멸망하였으니 양자간에는 무려 1500여 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으며, 단군신화를 담은 내용 중에는 후대의 것으로 판단되는 것도 적지 않다. 가령 '환인(桓因)'은 산스크리트어[梵語]의 'Sakrodevendrah'라는 말을 한자로 음역한 '釋帝桓因陀羅'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고대 인도 신화에 많이 등장하는 명칭으로 이후 불교 신앙체계에 수용, 수미산 도리천에 거주하며 사방을 진호(鎭護)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4세기 이후이므로 단군신화도 그 이후에 성립되었다는 추정이 일단 가능하다.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조성된 단군릉. 동명왕릉, 왕건릉과 더불어 북한이 3대 성역화 작업으로 조성한 것으로, 개건 연대를 상징하는 1994개의 화강석을 다듬어 9개의 단으로 쌓아올렸다. 주위에는 단군의 네 아들상을 비롯, 여러 가지 조각상이 서 있어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한편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데는 단군신화가 들어 있는 『삼국유사』 이전의 기록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은 물론이다. 그런 면에서 한때 중국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 집안 사당에 있는 전한(前漢) 대의 화상석 그림이 단군신화와 흡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단군신화는 이미 기원전부터 있어왔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 주장은 특히 산동성 지역이 상고(上古) 시기에는 동이족의 거주지였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크게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그림은 단군신화와는 무관한 중국신화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삼국유사』 이전의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 단군신화는 고려시대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까.




 (5) 허구와 역사


단군신화가 고조선 시기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그 내용 또한 그대로 사실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군신화가 완전한 허구도 아니다. 그 속에는 신화가 형성된 시기의 역사적 상황이 투영되어 있고 당시 사람들의 집단적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상황과 사람들의 의식의 일면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점은 단군신화와 같이 오랜 기간 구전되어 오다 훗날 문자로 정착한 경우에는 전승 과정에서 후대의 요소가 첨가된다는 점이다. 가령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해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국가의 형성은 최소한의 객관적 조건으로 농업 경제와 청동기문화가 어느 정도 성숙된 다음에 가능하다.

그런데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그런 객관적 조건이 마련된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기원전 10세기를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오히려 기원전 2333년이란 연대는 중국신화에 전하는 성군으로 문명을 열었다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가 건국되었다는, 즉 우리가 중국 못지 않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청동기시대 제사장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청동팔주령(왼쪽 아래)과 청동거울(오른쪽 아래) 및 비파형동검(위). 단군은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청동기시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제사장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단군이 하늘신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났고 천수백 년을 살았다는 것을 황당무계하다고 일축하는 이해방식도 옳지 않다. 그 속에 반영된 당시인들의 관념과 삶의 일면을 시대상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단군신화는 고조선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골격이 형성되고 기능했던 만큼 그 내용도 일차적으로는 고조선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신화의 유형을 셋으로 나눈다. 첫째는 천지만물의 형성 등 자연현상을 위주로 구성된 신화이다. 둘째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위주로 한 신화이다. 자연과의 투쟁, 문명의 개시 등에 관한 신화류가 그것이다. 셋째는 인간 관계와 사회 문제가 중심인 신화이다. 크게 보면 이러한 세 유형의 출현 시기가 순차적인 면을 지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단군신화의 주된 부분은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요체는 하늘신이 웅녀와 결합해 낳은 이가 고조선을 건국하고 그 자손들이 왕위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즉 고조선 왕이 정통성과 존엄성의 근저를 신성한 핏줄에서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럴 때 천손인 왕은 자연히 반은 인간, 반은 신인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내세워지게 되며, 단군신화는 이와 같이 고조선 왕실의 신성한 내력을 밝힌 일종의 '본풀이'라고 할 수 있다. 성주 무가(巫歌)의 구조와 단군신화의 그것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지적은 그런 면에서 유의되는 바이다.


신성한 왕실의 내력을 밝힌 단군신화는 각지의 족장층이 참석한 가운데 신왕의 즉위식과 제의(祭儀) 및 연희를 통해 재현되어 행해졌을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왕의 휘하에서 일정한 통제를 받는 동시에 강한 자치력을 지닌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왕이 집전하는 제사 의례에 이들 집단의 장들이 참가하는 것은 곧 왕의 권위에 귀속함을 서약한다는 의미였다. 아울러 의례를 행할 때 각지의 사람들이 참집(參集)한 가운데 상호교류와 물자교환 등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와 왕실의 신성함을 내세우는 의례에 참가함은 주민들간의 정서적 일치감을 함양하는데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단군신화는 일종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정치,사회적 통합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6) 민족사의 기원 - 배달국(倍達國)


동서 4대문명권은 본래 약 1만 년 전의 환국(桓國)으로부터 분기해 나간 것이다.  환국(桓國)의 문명은 세계 각 지역의 고대 문화 생성과 그들의 뿌리 문화와 깊은 상호 연관성이 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환국(桓國) 말경에 환인(환국의 통치자)은 '서자부(庶子部)의 수장(首長)인 환웅에게 인간을 널리 구제하라는 명(命)을 내리시어 동방의 태백산(백두산:三神山)으로 파견하였다.(일연, '삼국유사', '고조선기' 참고)


원시의 미개생활을 하던 동방 땅의 인간을 널리 구제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던 환웅은, 환인께서 종통계승의 신권(神權)의 상징으로 내려 주신 천부인 3개와 동방 문명 개척단 3천 명을 이끌고, 동방의 태백산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제1대 배달 환웅은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통합하여, 3천 명의 문명개척단과 함께 수도를 신시(神市)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여 새 나라를 건설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토템 사상에 의해 족호(族號)를  나타낸 것임>

이 때 환웅 천황은 신교신앙을 기반으로 신시에서 배달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에게 천경신고(天經神誥 :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다.(북애자, '규원사화', '태시기' 참고)


홍익인간의 한민족 개국이념도 본래 환인이 환웅에게 동방문명 개척 시에 내려준 것인데, 환인·환웅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고조선 단군의 개국이념으로 둔갑하여 국민 다수가 그렇게 세뇌되어 알고 있는 것이다.

환웅 시대의 실존 역사를 가공의 신화로 취급하는 것은 세뇌된 식민사관의 중독(中毒)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의 학계에 보고된 다음의 자료만 살펴보아도, 고조선 이전의 배달 역사의 실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중국의 요녕성지역에서 대규모로 발굴된 홍산문화 유적에서 지금까지 황하유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대형 제단, 여신묘, 적석총군, 석관묘, 빗살무늬토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서기전 4000-3000년경의 이 홍산유적을 중국학자들은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연결시켜 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 요녕성 일대는 중국 정사(正史)에서 동이(東夷)라고 하는 지역으로, 고대에는 한민족의 활동 영역이었다.  이 유적들이 만들어진 연대인 오천 년 전은 요녕성 지역과 황하유역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화권, 정치권이었다. (1986. 8. 1, 조선일보 중에서)


지금까지 중국 황하문명의 전유물처럼 인식해온 갑골문화는 본래 황하유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발해 연안 북부에서 기원하였다.(서기전 3500년경) 동북아의 빗살무늬토기와 석묘(적석총, 석관묘, 지석묘 등) 문화의 기원지도 발해 연안이다.  최근에 서기전 2000년경의 최고(最古)의 악기가 발해 연안에서 잇따라 발견되어, 동방에서 가장 먼저 예악(禮樂)이 발생해 민족음악으로 성장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동북아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발견되는 곳 역시 발해 연안 북부이다.  이 지역은 고대에 동이족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은 마땅히 발해 연안을 중심으로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동방 문화의 주인공이 당당히 우리'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이형구, '한국고대문화의 기원' 중에서)

 

이와 같이 고고학적 유물 발굴의 성과로 인해, 환웅의 배달국 건국 사실이 실존 역사로 입증되고 있다.  요녕성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한민족이다.

  

한민족의 민족사의 실제적 첫출발은 배달의 환웅시대부터이다.  때문에 우리 민족을 배달 민족이라 부르는 것도, 이 환웅천황의 배달 건국을 수천년 동안 기려왔기 때문이다.  이 배달의 역사 시대는 1565년간(서기전3898-2333) 모두 18세의 환웅천황이 통치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고조선의 시조 단군성조는 배달의 말기 기원전 2370년에 태어나 38세 되는 기원전 2333년에 배달국 말기의 혼란을 바로 잡고 아사달에서 천제로 추대되어 제위에 오르셨다. 따라서 올해(1998, 무인년은 단기 4331년이다.(행촌 이암, '단군세기' 참고)


최근에는 단군세기의 천문기록 특히 제13세 단군인 흘달천제(屹達天帝) 50년(서기전 1733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 모인 '오행성(五行星) 결집현상'에 대한 기록이 사실임이 과학적으로 밝혀져 이 사료가 허구가 아님이 입증되었습니다.(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박창범·표준연구원 천문대 라대일 박사, 1993. 9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기록의 과학적 검증','한국상고사학보' 제14호, pp.95-109 ; 1993. 9. 30 '시사저널' 참조)  따라서 47세의 단군의 기록은 비록 부분적인 기록 내용에 문제는 제기되고있으나, 고조선사의 전체 기틀을 알 수 있는 정사기록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습니다.


단군성조는 고조선의 전 영토를 삼한(三韓:진한, 번한, 마한)으로 나누어 진한(만주)은 단군 천제가 직접 통치하고, 마한(한반도)과 번한(요서, 북경일대)은 부단군격인 왕을 두어 다스렸다.

단군조선시대의 천문 현상 기록



동방문명을 선도(先導)한 고조선 문화의 생생한 증거들은 너무나 많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과 연구결과에 의하면, 고조선 강역인 만주지역의 청동기 문화 개시연대는 서기전 2400년경으로 밝혀져, 고조선은 초기부터 이미 국가사회에 진입해 있었음이 명확히 입증되었다.


갑골(甲骨)문화는 본래 동방 동이족이 창조하고 계승 발전시킨 동이문화이다. 동이족의 활동지역인 발해연안 북부에서 최초의 갑골(서기전 3500년경)이 출토되는 등 초기 갑골은 주로 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갑골은 중국 고대왕조 중에서 전형적인 동방 동이계열인 은(殷)나라에서 많이 숭상했다. (이형구, 『한국 古代文化 기원』 참고)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는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족이 창시한 것이다(中國曆法創始於東夷 : 『中國史前史話 246쪽)"라고 하여 동이 조선족이 책력법을 창시하였음을 명확히 밝혀 주고 있다. 천자(天子)사상과 천자제도 또한 동방조선족이 창시한 것이다. 이것은 고대에 동방 조선이 천자의 나라(天子國)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짓없이 전해주는 기록이다. (동한(東漢)의 채옹(蔡邕), 『독단(獨斷)』 상권 참고)

  구소련학자 「유 엠 푸진」의 연구결과를 보아도 고조선은 고도의 독자적인 선진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문명국가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유 엠 푸진의 저서는 이미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

 

미궁투성이의 古朝鮮을 새로운 시각으로 체계화한 학술서적으로 『古朝鮮』이 소련에서 출간되어 한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고있다. '소련과학원 시베리아분원 역사언어 철학연구소'가 최근 내놓은, 문제의 『古朝鮮(13 × 20.5cm 330면)은 한국, 중국, 일본, 소련의 고조선 연구와 최근의 고고학 발굴을 총정리한 것으로 북한학자들의 도식화된 유물사관도 비판 해 눈길을 끕니다.  고조선의 고분가 문화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해온 「유 엔 푸진」이 쓰고 고고학자 「아 페 아클라드니코프」가 감수한 이 『고조선」은,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지역으로 확대해 설정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국가형태를 갖춘 고대국가가 성립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푸진의 고조선 연구는 광범위한 문헌자료의 고증과 고고학 발굴성과를 종합한 것으로 고대사 무대를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확대해 조명한 것이 특색이다. 한국학계보다 고조선을 광범위하게 다룬 푸진의 『고조선』은 소련의 한국고대사 연구를 결산한 것이다.

푸진의 『고조선』에 따르면 고조선 초기의 주요 문화유적이 용천군 신암리, 영변의 세죽리, 개천의 묵반리, 만주 무순의 대호반, 요동반도의 쌍택자(雙宅子), 의주군 미송리 등에서 발굴되었다.


고조선 문화의 특징을 비파형 단검문화'라고 단정한 푸진은 요동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부지역을 지배한 고조선은 1천 년 간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기술했다. 푸진은 낙랑의 일부세력을 제외하고는 한사군(漢四郡)도 현재 한국의 국경밖에 존재했다고 주장해 국내학계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1982.11.11, 『경향신문』 중에서)




  (7) 단군조선의 고토(古土) 수복을 위하여 


서기전 37년에 요동에 세워진 고구려국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이다. 이 나라는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과 그 집단에 의해서 건국되었는데 이들이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추모왕(주몽)을 포함한 건국 주도세력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옛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동에서 재건된 후 어떻게, 어떤 의지를 가지고 영토를 확장했을까?

우선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행인,해두,개마,구다,조나,주나 등의 나라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그 후 계속해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 유역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였다. 이렇게 줄기차게 지금의 요서 서부로 진출하던 고구려는 미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 사이에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을 난하 서쪽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요서지역'은 원래 단군조선의 영토였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원래는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토 수복이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던 시기에 백제는 어떤 활동을 하였을까?

그 시기에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북경과 톈진(天津) 지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활동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고,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과 중국의 단군조선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소망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그 위광이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미침으로써 일단 성취되었다.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최인호(崔仁浩; 1945∼) 씨의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왕도(王都)의 비밀」을 제작촵방영했는데〈제4부 정복의 길〉에서 표현했듯이,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단군조선의 영토 수복에 그 목표가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과 그 거수국인 옛 고구려의 단순한 영토 수복에만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알아보자.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였다. 오늘날의 극동(極東)이라는 말과 같은 뜻을 지닌 말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쪽 국경이 이동하면 요동의 위치도 변하였던 것이다.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요하(遼河)는 오랫동안 만리장성 부근 난하를 가르켰다. 그런데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오늘날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또는 요수(遼水))의 동쪽을 지칭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여러 문헌에는 지금의 '난하( 河)'가 요하(요수)로 기록되어 있고, ≪사기≫에는 난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碣石山) 지역이 요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고대의 '요하'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였고, 고대의 '요동'은 '난하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곳은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으로서 고대에 중국 영토 가운데서 가장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당시의 서한의 요동군은 지금의 난하 하류유역에, 즉 요서 서부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가 진출한 요동군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라, 중국 북경 근처였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가장 강성했던 시기의 고구려 영토가 북경 근처가 아닌, 요령성 요양시 지역을 흐르는 지금의 요하(遼河)까지였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대의 '요동'을 지금의 지명과 동일한 곳으로 잘못 인식한 결과가 빚어낸 오류인 것이다.


그리고 현행 국사 교과서는 단군조선의 영토도 축소되어 있는 상태다. 단군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  - 윤내현 단국대 부총장 겸 사학과 교수 제공>  




  (8) 북한의 '단군릉'


 북의 '단군릉'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북의 단군릉에 대한 주장은 서로 엇갈리고 있다.

먼저 고구려시대의 무덤인데 단군릉으로 잘못 전해왔으며 연대측정에도 착오가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와 북한에 있는 단군릉은 엄연한 우리 민족의 시조인 존재했던 단군의 무덤이라는 견해(단군릉에서 고구려시대의 못이 발견되었다고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으로 고구려 시대 사람들이 능을 발견하고 수리 작업 과정에서 못이 들어갔다고는 생각하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단군릉 발굴에 대한 북한측의 견해는 학문적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인 면을 더 보이고 있다.

북한이 단군조선이 붕괴 된 후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을 간과한 채,《삼국사기》에서 "평양(平壤)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댁(宅)이다"라고 해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본다.

또한《삼국유사》〈고조선〉조에서 단군조선의 도읍 가운데 아사달이나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아사달이나 평양이라는 지명은 한 곳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평양성, 아사달은 요령성 심양 동남 본계시(本溪市) 지역,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하류 유역에도 있었다.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생명의 젖줄이기도 한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있는 천지(天池)의 물은 두갈래로 흘러 재중동포들이 살고 있는 중국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송화강(松花江)을 이루고, 북한 땅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압록강을 이루는데 단군조선을 건국한「국조 단군」의 묘가 있다면, 백두산부근이나, 송화강 주변, 또는 만주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사달]은 무슨 뜻을 담고 있는 명칭일까.

「아사달」은「국조 단군」이 나라를 처음 열었을 때의 첫 나라이자 도읍지 명칭으로「아침의 나라」,「출발의 땅」,「최초의 땅」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9) 단군 조선과 일본의 역사왜곡


일제의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한 자료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이나 일본 본토는 물론 심지어는 남양군도로까지 한국인을 학병, 징병, 강제노역(징용), 일본군 강제 위안부(정신대)로 강제 동원하였던 장본인이자, 특히 일제 지도층의 명령아래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에 앞장섰던 장본인이 바로 조선총독들이다.


≪조선총독10인≫이라는 책자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현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는 됐으나 일제 통치는 총독부 건물이 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 이하 일제 관리들이 장본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은 일왕의 대리권자로서 한국(조선)의 제반통치행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장본인이자,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처단 제1호'의 인물이었다. 조선총독은 행정,입법,사법,군사통수권까지 장악한 채 한국을 포괄적으로 통치했는데 형식상 일본총리하에 있었으나 한국통치와 관련해서는 대부분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조선총독이었다.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가 편찬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를 비롯, ≪제헌국회사≫, 일제강점기 때 군수를 했던 문정창 씨의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30여년 동안 '단군조선' 관계 사료를 수집촵정리한 이상시(李相時; 1932∼) 변호사가〈조선일보〉1985년 10월 4일자 11면 머리기사로 폭로한「일제의 한국고사서 대량분서」의 기사와「일제의 한국상고사 말살실태와 단군실사」라는 (표제의) 논문집,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우리 상고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는 저서에 잘 나와 있다.

 이상시 변호사는 "검사시절의 수사경험을 살려 한국상고사에 관한 한-중-일 문헌을 철저하게 비교 분석했다"고 말했다.<조선일보사 제공>  


조선일보 1986.8.17특히 서희건(徐熙乾; 1944∼) 현 조선일보 80년사사(社史) 편찬실장이〈주간조선〉에 1985년 10월 20일자부터 1986년 10월 26일자까지 총 51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연재한「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와〈조선일보〉의 광복 41주년 '특별기획'으로 1986년 8월 15일부터 말일까지 11회 연재한「국사교과서 새로 써야 한다」에 잘 나와 있다.  조선일보 1986년 8월 17일자 3면  <조선일보사 제공>  


1985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있던 서희건 씨의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를 장기 연재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고 격려를 해 준 분들이 안병훈(安秉勳; 1938∼) 현 조선일보 부사장(편집인), 조병철(曺秉喆; 1935∼) 전 주간조선 주간(전 조선일보 편집국장대우), 이남규(李南圭; 1936∼) 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이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1906년에 설치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바꾸고, 1910년 10월 1일 관보(官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하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였고, 한국민의 민족운동을 압살했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촵군촵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웠다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씨의 저서인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년사≫는 밝히고 있다.


사료 수집기간과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을까.

사료 수집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촵말살하기 위해 마련한,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 편수회 사업 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만 권, 그 뒤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4천 9백 50종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사학자이면서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촵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의 우리 고사서 인멸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한 전초작업이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현재 단군조선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같은 사서 등을 중심으로 남겨 놓았을 것이다.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초대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조선반도사」편찬을 담당시켰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촵분서한 이외에 한국사 왜곡을 위해 '근거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놓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1915년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사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왜곡편사계획'을 수립했음이 분명하다.


이완용과 권중현 등을 고문으로 앉힌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6년 1월 중추원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편사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감독을 의뢰하였다.


≪조선사 편수회 사업 개요≫ 4∼7면을 보면, 한국사료의 대량 분서와 한국사의 왜곡편찬 배경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새로운 사서(즉 왜곡된 역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요, 또한 편찬사업의 근본정신이다."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으로 각 도청촵군청촵경찰서 등 위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벌린 제2차 '사료수색'에서는 '역사'와 '전통문화예술', '인물' 등 압수범위도 오히려 늘어났다.


헌병경찰제도로 무단통치를 강행했고,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말살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 전임하고, 그 뒤 3촵1항쟁을 철저히 탄압했던 제2대 총독에 이어,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교활하게도 한국사람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소위 '교육시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라고 1922년 총독 사이토가 '조선사편수사업'을 지휘하며 말하기도 했다.  


http://www.korearoot.net/root/danwa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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