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고 굴절돼 곰,호랑이 신화로 격하된 것일까?
두 가지 악의惡意가 그 생생한 역사를 짓밟고 지워버렸다.
하나는 한민족의 정신마저 지배하려 한 일제의 야욕이고
다른 하나는 왜곡된 역사를 통해 자기 지위와 이권을 유지하려는 식민사학자들의 탐욕이다.















일제는 식민지 문화정책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왜곡하고 나중에는 아예 우리 역사에서 송두리째 들어냈다. 그 바람에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한 이후 단군조선의 역사는 그저 신화로 이야기되고, 한민족사는 이른바 위만정권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축소, 서술됐다.


더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그렇게 왜곡된 단군신화론 나아가 위만정권 이후 2000년으로 쪼그라든 한민족사가 마치 진실인 양 이 땅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후세들의 뇌리에 뿌리를 박았다.
그들은 이른바 실증사학을 앞세우면서 일제가 남긴 식민사학의 해독을 이 나라에 퍼뜨려 왔다. 한민족의 진정한 뿌리, 진정한 역사를 외치는 목소리들을 억눌러 왔다. 그 때문에 나라가 광복된 지 70년이 넘었어도 우리 역사는 광복되지 못했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한낱 신화로 부르게 된 것은 한민족의 뿌리와 전통을 지우려 한 일제의 역사조작 결과다. 더더욱 개탄스럽게도 우리 강단사학자들이 실증사학을 앞세우며 조작된 '신화론'을 고착시켰다.

고려 때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의 건국이 요임금 50년, 경인庚寅년이라 쓰여 있다.
당시에는 실재하던 '고기古記'라는 역사책을 그대로 인용한 대목에서 나온다.
고려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를 요임금 즉위 원년인 무진년이라 했다.
'단군세기'에서도 당시 전해지던 '고기古記'라는 역사책을 그대로 인용해 단군왕검의 재위 원년을 무진년으로 말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고기古記'의 판본이 여럿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한민족이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대략 BCE 1500년에서 1300년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학자들은 청동기시대 상한上限 시기를 BCE 2000년경으로 보았는데, 1980년대 중국 요령성 건평현 우하량에서 청동기를 주조한 흔적과 유물이 발굴되면서 그 연대가 10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단군조선은 분명히 청동기시대에 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이 신석기시대에 건국되었다는 것은 맞지 않다.
단군조선보다 앞선 배달국 치우천황이 이미 금속 무기를 만들었다는 역사 기록을 감안해도 단군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건국된 것이 분명하다.








단군조선의 건국에 대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행촌 이암선생의 '단군세기'다. 이암은 '고기(古記)'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단군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熊이요,
어머니는 웅씨 왕의 따님이다. 그런데 단군왕검은 일찍이 14세에 웅씨국의 비왕裨王(한 지역을 맡아 다스리는 군왕)이 되었다.
'단군세기'에서는 이 나라를 대읍국(大邑國)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배달국에서도 중심이 되는, 큰 세력을 가진 나라로 보인다.
대읍국에서 통치 경험을 쌓은 단군왕검은 38세에 아사달에서 백성들의 추대로 천제의 아들, 곧 천자天子가 되었다. 그는 이처럼 왕의 자리에 오른 직후 이전까지 아홉 갈래로 갈라졌던 구이족(九夷族)을 하나로 통일했다.

단군왕검이 배달국을 계승했다는 것은 '삼국유사'의 단군조선 건국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실제로 '단군세기'에 남겨진 기록, 곧 '왕검이 신시 배달의 법규를 되살렸다'는 대목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단군조선이 당당하게 실재한 국가였음을 증명하는 기록 중에는 갑골문도 있다.
갑골문에 따르면 은나라 제22세 왕인 무정武丁(BCE 1325∼BCE 1266년)은 수많은 정벌전쟁을 벌였는데 지금의 섬서성과 산서성 서북 일대에 살던 북방족인 귀방鬼方을 공격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도 그대로 쓰여 있다.
"제21세 소태단군 47년(BCE 1291년)에 은나라 제22세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켜 귀방을 물리치고 나서 다시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을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시대를 달리 하는 여러 기록들이 단군조선이 분명한 우리 역사였음을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우리 역사 교과서를 보면 단군조선은 물론 그 이후 역사 서술도 그야말로 어정쩡하다.

우리 교과서는 부여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만일 그동안 부여에 대한 연구가 충실히 이루어졌다면 우리 상고사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허무할 정도로 빈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단군조선 말기의 정치상황부터 돌아봐야 한다.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삼조선(三朝鮮)체제로 바뀌면서 점점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러다 제43세 물리단군 때 사냥꾼인 우화충이 역모를 일으켜 도성(都城)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물리단군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그 도중에 돌아가시게 된다. 이런 가운데 당시 욕살(지방장관) 구물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평정한다. 그러고는 주위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제44세 단군에 즉위한다. 이 분이 구물단군이다.

구물단군의 즉위는 단군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점이 되는데 먼저 그는 도읍을 종래 백악산에서 장당경으로 옮기면서 단군조선의 제3왕조 시대를 열었다.



나아가 국호도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었다. 이때까지도 나라의 틀이 형식상으로는 삼조선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조선이 대부여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부단군이 통치하던 기존의 두 조선, 번조선과 막조선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대부여와 함께 여전히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번조선과 막조선이 점차 독자적인 병권兵權을 가지면서 대부여의 통제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독립국이 된다. 이 때문에 종래 단군조선의 통치체제인 삼한관경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이로 인해 대부여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약화된다.




대부여의 제47세 고열가단군을 끝으로 대부여(진조선)는 그 역사의 막을 내리고(BCE 239년) 그 뒤를 해모수의 북부여가 계승한다. 진조선은 이처럼 대부여를 거쳐 북부여로 계승되었다.
그런데 우리 국사 교과서를 보면 단군조선 다음에 북부여가 아니라 위만조선의 역사가 이어진다.


'위만조선'이란 명칭은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정확한 명칭은 위만정권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단군조선의 서쪽 영토 일부를 일시적으로 장악했던 지방 정권에 불과했다.

대륙의 북부여가 진조선을 계승한 직후 그 서쪽의 번조선 땅에는 중국에서 넘어온 난민들로 넘쳐났다.
위만은 그런 난민들의 우두머리격 인물이었다.
당시 번조선을 다스리던 준왕이 위만을 받아들이고 번조선의 서쪽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 그런데 정작 위만은 자신의 임지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서기전 194년 준왕의 왕검성을 친 것이다.
그렇게 준왕을 몰아내고는 스스로 '번조선 왕이다' 칭하고 왕위를 차지하는 배은망덕한 일을 저질렀다.

이 같은 위만정권을 지금의 강단사학계에서 버젓이 위만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호칭이다. 위만정권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서는 안된다.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을 이루던 삼조선의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중심은 진조선이었다. 그 진조선의 국통은 분명히 구물단군의 대부여를 거쳐 해모수의 북부여로 이어졌다. 그것이 올바른 국통 맥이다.

반란을 통해 그저 일시적으로 왕위를 찬탈했던 위만에게 단군조선의 계승국을 의미하는 조선이란 명칭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북부여의 제6세 고무서단군이 후사 없이 죽자 그 사위인 주몽이 대통을 이어받았다고 쓰여 있다. 주몽은 잘 알려진 것처럼 유화부인의 아들이다.
유화부인은 혼인 전 몰래 임신해 부모에게서 쫓겨났는데 마침 동부여의 해부루 왕이 그녀를 동부여로 데려갔다. 이렇게 해서 주몽은 동부여의 왕궁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동부여 사람들의 질시로 신변의 위협을 받자 북부여로 탈출한다. 그리고는 북부여를 다스리던 고무서단군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 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어 나중에 왕위를 물려받고 고구려를 열게 된다.


이처럼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가 일찍이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환단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삼국유사'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삼국사기'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광개토왕비 역시 주몽의 출자가 북부여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선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이 정확한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단군조선, 나아가 북부여와 어떻게 연결돼 있습니까?


백제는 고구려에서 직접 갈려나온 나라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백제를 열어젖힌 시조는 고구려 출신 온조이다. 그는 바로 소서노의 아들로 일찍이 그의 배다른 형제인 유리가 장차 고구려 왕권을 이을 것임을 알고는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이주해 백제를 세웠다.
신라 역시 부여와 밀접한 관계 속에 나라가 세워졌다. 일찍이 북부여 제실의 딸인 파소婆蘇(삼국유사에는 사소娑蘇라고 기록됐는데 북부여 고두막한의 딸로 추정됨)가 아버지 없이 아이를 잉태하는 바람에 뭇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되자 당시 진한 땅으로 이주한다.
그렇게 이주한 뒤 낳은 아들이 곧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이다.
'삼국유사'에는 파소가 중국 제실의 딸이다, 그렇게 쓰여 있는데 이는 북부여의 제실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신라에서 성산으로 모시는 성모산의 '성모聖母'가 바로 이 파소 부인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한 시조들뿐 아니라 그 주민들 또한 대부분 단군조선의 유민들이었다. 한민족의 후예들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이처럼 단군조선과 북부여의 국통 맥을 이은 한민족의 나라들이었다.
단군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고 굴절돼 신화로 격하된 것일까?
두 가지 악의惡意가 그 생생한 역사를 짓밟고 지워버렸다.
하나는 한민족의 정신마저 지배하려 한 일제의 야욕이고
다른 하나는 왜곡된 역사를 통해 자기 지위와 이권을 유지하려는 식민사학자들의 탐욕이다.
일제는 식민지 문화정책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왜곡하고 나중에는 아예 우리 역사에서 송두리째 들어냈다. 그 바람에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한 이후 단군조선의 역사는 그저 신화로 이야기되고, 한민족사는 이른바 위만정권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축소, 서술됐다.
더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그렇게 왜곡된 단군신화론 나아가 위만정권 이후 2000년으로 쪼그라든 한민족사가 마치 진실인 양 이 땅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후세들의 뇌리에 뿌리를 박았다.
그들은 이른바 실증사학을 앞세우면서 일제가 남긴 식민사학의 해독을 이 나라에 퍼뜨려 왔다. 한민족의 진정한 뿌리, 진정한 역사를 외치는 목소리들을 억눌러 왔다. 그 때문에 나라가 광복된 지 70년이 넘었어도 우리 역사는 광복되지 못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역사의 모든 진실을 증언하는 '환단고기'가 남았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진실을 따라 이제 한민족 역사의 실체, 한민족 뿌리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렸던 식민사관과 중화사관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한민족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9천년 한민족사는 신화 따위가 아니다. 힘겨운 고비는 많았지만 국통이 끊어진 적 없이 지금까지 생생한 현실로, 당당한 역사로 이어져 왔다.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왕검은 운사雲師 배달신으로 하여금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을 비롯해 태백산 천황단, 지리산 노고단 등 지금도 남아 있는 여러 제천단을 축조하게 했다. 이는 단군이 왕과 제사장을 겸한다는 사실, 나아가 단군조선이 제정일치 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제정일치의 전통은 일찍이 환국과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한민족의 역사요 전통이었다. '태백일사'에 보면 단군조선의 수도인 왕검성, 즉 아사달이 '삼신께 제사지내는 곳'이라 했다. 이 또한 단군의 통치와 하늘 제사가 동시에 이뤄지던 단군조선의 제정일치 체제를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조선은 환국-배달의 국통을 이어받은 우리 한민족의 뿌리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역사다.

